#107화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 하나 못 들어주겠나.
이런 개소리가 없다.
애초에 죽은 사람이 소원을 빌 수도 없을뿐더러 아무런 대가 없이 소원을 빌어봤자 누가 들어주겠나.
하지만, 이강진 회장은 대가를 지불했다. 그것도 상현의 경영권이라는 어마어마한 대가를 말이다.
이 정도면 소원 하나가 아니라 두 개도 들어줄 만하지 않은가.
게다가 상현 전자의 대주주 중 하나가 바로 SC 인베스트먼트다.
그의 소원인 상현의 발전은 곧 내 이익에 부합하기도 한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 영국 케임브리지로 향했다.
바로 그곳에 상현 그룹, 정확히는 상현 전자가 한 층 도약할 수 있는 히든카드인 ARM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곳을 인수해 상현 전자에 붙여 다가올 스마트폰 전쟁에서 상현이 승리할 수 있게 만들 생각이다.
그렇게 우리는 케임브리지 조용한 주택가 근처에 자리 잡은 ARM 본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HS 은행을 통해 약속해둔 탓에 곧바로 CEO를 만날 수 있었다.
“사이먼 시거습니다.”
“SC의 엘입니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한국의 ‘조선업’을 쥐락펴락하시는 분이라고요.”
유달리 조선업을 강조하는 날카로운 말투.
게다가 표정 역시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마음에 안 드나 보군.’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다.
그를 소개하자면 전형적인 공돌이.
당연히 IT 계열이 아닌 회사에 인수될 가능성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회사의 방향성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
아직 인수 협상 전이다.
나쁜 인상을 줄 필요는 없기에 그를 안심 시키기 위한 말을 던졌다.
“무엇을 걱정하고 계시는지 압니다만, 저희가 인수한다고 하더라도 걱정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제가 뭘 걱정하시는지 아십니까?”
모를 리가.
펩리스 업체 대부분이 그렇지만, CPU라는 하이테크놀로지를 개발하는 ARM의 경우 시작과 끝이 R&D라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하다.
지금 사이먼이 걱정하는 건 내가 ARM을 인수한 뒤 기술만 얻은 뒤 R&D를 등한시하는 것이다. 아니면 기술과 자산만 빼먹고 깡통 회사를 만들어 다시 매각해 버리든지.
사례까지 넘쳐나지 않나.
과거 중국 기업들이 자본력을 앞세워 몇 번이나 그런 거지 같은 일을 벌였으니까.
그로 인해 아시아 기업들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지는 건 당연했다.
“연구 개발 투자를 등한시할 것을 걱정하는 거 아닙니까?”
“아신다니 다행입니다. 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믿기 힘들다면 계약서에 특별 조항으로 넣을 수도 있습니다.”
계약서와 조항이란 말이 나오자 사이먼이 멈칫하며 의외라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진심입니까?”
“어차피 인수 협약식에 참여하실 거 아닙니까? 그때 확인하시면 되죠.”
“…그렇다면, 믿겠습니다.”
그제야 사이먼의 표정이 풀어졌다.
사실, 인수만을 위해서라면 그를 설득하는 과정은 필요 없다.
그냥 ARM 회장인 스튜어트 체임버스를 만나 인수대금 합의 후 인수 계약서에 서명만 하면 끝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내 목적인 ARM의 테크놀로지를 얻지 못한다.
정확하게는 ARM의 비전을 얻지 못한다는 게 정확하겠다.
사이먼, 그리고 휘하 연구진들이 남아있어야 앞으로 개발될 ARM의 CPU의 품질이 보장되기 때문.
만약 인수에 불만을 품고 그들이 모두 떠나간다면 나는 수백억 달러를 쏟아붓고도 빈 껍데기만 가져오는 처지가 된다.
이 같은 일을 피하고자 이런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 사이먼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남은 건 ARM의 인수뿐.
실탄 충분하겠다.
사어먼과 그 휘하 연구원들의 지지도 이끌어냈겠다.
거칠 것이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거절합니다.”
스튜어스 체임버스를 만나자마자 이런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
2015년 여름.
스튜어스 체임버스가 여름마다 들르는 휴양지인 터키의 한 항구도시에 도착하자 햇볕이 뜨거울 정도로 우리를 감싸 안았다.
“어휴, 아우.”
체온조절이 안 되는지 리우가 입고 있는 티셔츠를 흔들어 재꼈다.
“정신 사납다. 가만히 좀 있어라.”
“아우, 안 되겠다. 싸장, 아이스크림 사 올 건데 먹을래?”
“사 오는 김에 여기 요원들 것도 사와.”
“알았어.”
터키 아이스크림이라….
쫀득한 맛이 괜찮았던 거로 기억 한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퍼주는 터키인들이 컵을 이리저리 흔들며 치는 장난도 재밌…
쾅!
큰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리우가 아이스크림 좌판을 박살을 내놓은 게 보였다.
“뛰어!”
그를 말리기 위해 요원들이 재빨리 튀어 나갔다.
척.
나도 모르게 이마에 손을 얹고 생각했다.
저 새끼를 어쩌면 좋지?
잠시 후.
아이스크림 좌판 주인에게 충분한 배상을 하고 나서 약속 장소로 가는 길.
“그놈이 먼저 나를 약 올렸어.”
리우가 억울함을 표출했다.
요원들이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누구 하나 말문을 열어 따지지 못했다.
나만 제외하고.
“닥쳐. 죽여버리기 전에.”
“싸장은 내 편 해줘야지.”
“미쳤냐? 그깟 장난에 남의 밥벌이를 부숴버린 놈이 뭐가 이쁘다고 편들어줘?”
타박을 들은 리우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처박았다.
그런 리우를 무시하고 운전대를 잡은 요원에게 물었다.
“얼마나 남았습니까?”
“십 분 정도만 가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적막이 흐르는 차를 타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니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널찍한 노천카페 안에 중년 남성이 커피를 마시고 있는 게 보였다.
바로 ARM의 회장 스튜어스 체임버스였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네.”
모두를 두고 카페 안으로 들어가 그의 앞에 앉았다.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생각보다 젊으시군요. 실제로 젊으신 겁니까? 아니면 젊게 보이시는 겁니까?”
“동안은 아닙니다. 그저 나이에 맞게 보일 뿐이죠.”
“실례지만, 나이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제 막 30이 되었습니다.”
그가 감탄한 얼굴을 했다.
“그 나이에 세계 최고의 부호가 되다니, 놀랍습니다.”
내가 포브스지에 얼굴이 실리는 걸 꺼린 이유가 여기서 나왔다.
물건을 파는 처지에서 내가 돈 많은 걸 알고 있으니 물건값을 세게 부를 게 뻔했으니 말이다.
“그저 운이 좋았습니다.”
“요새는 운도 실력이라는 말도 있죠?”
스튜어스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 본사에는 벌써 다녀가셨다고요?”
“네, 사이먼 시거스 CEO와 의견을 나눴습니다.”
“어떻던가요?”
“일단은 긍정적인 대화를 나눴습니다.”
“오호, 그 고집불통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다니. 대단하십니다.”
스튜어스가 여유로운 태도로 웃었고.
나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느꼈다.
‘남 얘기하듯이 대화를 하고 있다.’
스튜어스 자신이 소유한 회사의 매각을 조율하기 위한 자린데도 본인의 일이 아닌 것처럼 지껄였다.
“스튜어스 회장님. 제가 찾아온 이유는 알고 계시죠?”
“물론입니다. ARM의 인수 금액 조율을 위해서 찾아오지 않으셨습니까? 무려 세계 최고의 부호께서.”
명백한 비아냥.
자신의 지분을 매각하겠다는 사람이 이런 태도를 보인다?
뭔가 이상했다.
그런 그에게 가져온 제안을 던졌다.
“저희는 ARM 인수대금으로 300억 달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떠십니까?”
내년 손정의가 ARM을 인수할 때 제시한 액수다.
당시에도 오버 배팅이라고 말이 많았을 만큼, 충분한 금액이라고 생각했지만.
“거절합니다.”
역시나, 스튜어스는 내 제안을 단박에 거절했다.
“…혹시 원하시는 액수가 있으십니까? 이쪽에서 최대한 맞춰드리죠.”
다시 제안하자, 스튜어스가 입가에 비웃음 가득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글쎄요. 저는 500억 달러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500억 달러면 ARM의 시가총액의 두 배가 약간 넘는 금액인 건 알고 계십니까?”
“미래 가치라는 것도 있죠. 경영권 프리미엄도 무시 못 하고.”
이쯤 되니 하나는 알 것 같았다.
이 새끼는 처음부터 나와 인수 협상을 할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말이다.
매각 의사도 없으면서 여기까지 사람을 불러?
농락당한 것 같아 속에서 부글부글 끓었지만.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결국, 내가 원하는 건 ARM이고 키는 밉든 곱든 내 앞에 있는 놈이 쥐고 있기 때문.
잠시 심호흡을 하며 머릿속으로 작금의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놈이 이러는 이유가 뭘까?
어차피, ARM은 내년에 손정의에게 300억 달러라는 금액에 팔린다.
그렇다는 말은 인수대금의 규모가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놈이 원하는 게 대체 뭘까?
그렇게 생각이 깊어지던 차.
무언가가 벼락같이 떠올랐다.
스튜어스 체임버스가 ARM의 회장은 맞다.
하지만, 그가 지분 전체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즉, 겨우 10%가 조금 안 되는 지분을 가지고 있을 뿐 진정한 의미의 주인이 아니라는 거다.
그 말인즉슨, 내가 인수대금을 아무리 높게 불어도 놈에게 떨어지는 돈은 한계가 명확하다는 거다.
300억 달러의 10%인 30억 달러.
놈은 이보다 더 많이 가지고 싶은 거다.
모르긴 몰라도 손정의도 이런 과정을 거쳤을 게 뻔하다.
그는 무려 4년이나 이놈을 쫓아다니며 ARM 인수 의사를 타진했으니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오히려 여유가 생겼다.
이런 뒷거래야 내 전문이 아닌가.
스튜어스에게 다시금 제안을 던졌다.
“얼마를 원하십니까?”
내 물음에 그가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 말씀드린 데로 500억 달러를….”
“제가 궁금한 건 이사회에서 원하는 금액이 아닌 스튜어스 당신이 원하는 금액입니다.”
“제가 원하는 금액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가 모른 척 시치미를 뗐지만.
정곡을 찔렀는지 스튜어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개소리 집어치우고 솔직히 말해. 원하는 게 돈 아니야?”
“……”
“손 마사요시에게 따로 얼마를 받기로 했는지는 모르지만, 협상이 틀어져 내가 여기서 일어나면 최선을 다해 그의 ARM 인수를 막을 거다. 설마, 세계 최고의 부호가 그 정도도 못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겠지?”
내 협박에 그가 잠시 생각하더니 한 마디를 뱉었다.
“40억. 추적 불가능한 깨끗한 돈으로.”
처음부터 이럴 것이지.
귀찮게 하고 있어.
“50억을 주지. 대신.”
“대신?”
“인수대금은 250억 달러다. 이해했으면 곧바로 가서 이사회를 설득해.”
내 제안을 들은 스튜어스가 잠시 고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이사회를 설득하지.”
“시간은?”
“일주일. 대신 실패할 수도 있어. 손 마사요시가 우리에게 던진 제안이 있거든.”
“얼만데?”
“250억 달러. 이사회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같은 액수라….
애매한데?
“알았다. 손은 내가 처리할 테니 너는 이 길로 영국으로 돌아가. 일주일 있다가 어떻게 됐는지 연락하고.”
그렇게 스튜어스를 영국으로 돌려보낸 후 나는 곧장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빅터, 부탁이 있다.”
러시아에서 데려온 천재 해커.
빅터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