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누군가? 자네는.”
오랜만에 만난 이강진 회장이 나를 보고 뱉은 첫 마디다.
그의 오른팔 최우현 실장이 얼굴 가득 웃음기를 띄었다.
“혹시 삐지셨습니까?”
“삐져어?”
“오랜만에 봤다고 대뜸 모른 척하시는 게 딱 봐도 삐지신 거 맞는데요.”
“푸홧.”
최우현 실장이 더는 못 참겠는지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런 그에게 이 회장이 못마땅한 눈빛을 보냈다.
“아니 자네는 내 편을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죄송합니다. 회장님, 저도 모르게 그만….”
“에잉, 이놈이나 저놈이나 마음에 안 들어.”
일흔이 다된 노인의 투정.
이 모습만 보면 누가 이 사람을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상현 그룹의 오너라고 볼까.
“어째 사람이 연락 한 통이 없나? 리비아에 갔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아나?”
“그동안 바빴습니다. 죄송합니다.”
“자네 바쁜 거야 알지. 그래도 이지석이 뒤치다꺼리를 내가 전부 맡아서 해줬는데….”
“그 건에 대해선 나중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씨익.
내 입에서 보답이란 단어가 나오자 이강진 회장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잊지 말게. 나한테 빚을 진 거네.”
능구렁이 같은 영감탱이.
어째 말꼬리를 잡는다 했다.
“들어가시게나. 아직 식사 준비가 안 된 듯하니 가서 술이나 한잔하지.”
“좋습니다.”
두 사람을 따라 별장 내부로 들어갔다.
제니와 사용인들이 바쁘게 저녁준비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 왔습니다.”
“아! 오셨어요?”
내 인사에 제니가 다소곳하게 대답했다.
뭐지?
내가 알던 제니가 아닌데?
내가 의문에 가득 찬 눈으로 보자 그녀가 아주 작게 고개를 저었다.
닥치란 뜻이다.
연기에 어울려주기로 마음먹고 고개를 끄덕이자 제니가 작게 웃었다.
“안 오고 뭐 하나?”
“갑니다.”
별장 안쪽 이강진 회장의 방에 들어가니 위스키와 간단한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한 잔 받게.”
쪼르륵.
이강진 회장이 위스키병을 들고 내 술잔에 가득 부어줬다.
“나도 한 잔 주고.”
“저도 주시죠.”
이 회장이 잔을 내밀었고 평소라면 이 회장 뒤에 서 있을 최우현 실장까지 합류했다.
“캬아.”
“크허.”
이 회장과 최 실장, 두 사람이 시원한 소리와 함께 잔을 내려놨다.
그리고는 서로를 바라보더니 큭큭대며 웃었다.
“그동안이 좋은 걸 안 마시고 어떻게 살았는지 몰라.”
“그래도 저는 회장님 안 계실 때, 전략실 직원들과 한 번씩 마셨습니다.”
“이 사람이. 나만 빼놓고 이 좋은 걸 마셨다고?”
최 실장과 잠시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던 이 회장이 잔을 내밀며 물었다.
“자네, 서른은 넘었나?”
“이제 막 넘겼습니다.”
“허, 참. 겨우 이립에 나라를 훔치다니, 삼국지의 영웅들을 보는 것 같네그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운이라는 말에 두 사람이 어이없어했다.
최 실장은 흥분하며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게 운으로 된다면 우리는 뭐가 됩니까?”
“하하하.”
내가 웃음으로 때우려 하자 이 회장이 마시던 잔을 내려놓았다.
“최 실장의 말이 맞아. 나도 이번 일을 보며 감탄을 감출 수 없었네.”
“과찬이십니다.”
“항상 보면 겸손이 지나치다니까. 세상 어느 기업인이 산유국을 통째로 훔칠 수 있단 말인가. 안 그런가? 게다가 자금력은? 밝혀진 재산만 하더라도 세계 1위의 부호가 아닌가?”
얼마 전, 그러니까 내가 공화당을 찾아가 트럼프의 일을 담판 지을 당시 포브스지에서 나를 세계 1위의 부호로 지목했다.
누구에게도 밝히진 않았지만 어떻게 알아냈는지 오션을 지배하고 있는 ㈜SC의 지분 전부가 내 소유인 것을 밝혀냈고 그걸 근거로 내 재산을 산출해냈다.
덕분에 정계에서 세무조사에 착수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는데 대통령이 된 이지석이 막아줬는지 지금은 조용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페이퍼 컴퍼니와 다름없는 인베스트먼트의 지분 구조와 운용 자금의 규모는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만약 거기까지 밝혀졌다면 주위가 시끄러웠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 자네가 세상에 나온 지 십 년이 채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나 많은 걸 이루다니.”
이 회장이 감탄하자.
“저도 포브스를 몇 번이나 읽어봤습니다. 대충 알고 있었지만, 숫자로 보니까 황당하더군요.”
최 실장이 답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차.
똑. 똑.
“식사 준비 다 됐어요.”
제니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
커다란 테이블로 가자 한식 위주로 멋들어지게 차린 한 상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자 제니가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많이 드세요.”
“잘 먹겠습니다.”
달그락.
식사 자리가 시작되고 아까와는 다른 주제의 대화가 이어졌다.
“자네, 건강은 어떤가?”
“아직 서른입니다. 건강하지 않을 리가 없죠.”
“그래?”
이 회장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런데 여자는 왜 없고?”
“갑자기 말입니까?”
“이상하지 않나. 한창땐데 여자 만나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 말이야.”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결혼 생각이….”
“하룻밤 상대도 만나지 않으니 하는 소리야. 인물 좋지. 돈 많지. 성격 시원하지. 여자가 따를 게 분명한데 누구 하나 만나는 꼴을 본 적이 없어. 무릇 영웅은 호색이라고….”
“따님 앞입니다. 회장님.”
발언 수위가 높아지자 제니의 얼굴이 빨개졌다.
이 회장이 민망했는지 헛기침을 했다.
“어흠.”
그렇게 여유로운 식사 자리가 끝나자마자 나는 이 회장과의 독대를 요청했다.
오늘 찾아온 본론을 꺼내기 위함이다.
“무슨 일인가?”
“다음 대의 상현을 여쭙고자 합니다.”
“역시, 자네가 궁금해할 줄 알았어.”
“저뿐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사람 중에서 궁금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가?”
“네.”
그가 창문을 통해 회한 서린 눈으로 서재 바깥은 바라봤다.
“자네가 보기엔 나는 어떤 사람이었나?”
그의 말에 나는 그동안 생각했던 바를 말해주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인이십니다.”
“두 번째로 밀려났지. 자네가 있으니까.”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저야 있던 기업들을 돈으로 사거나 빼앗았지만, 회장님께선 손수 만들지 않았습니까? 상현 전자만 보더라도 선대 회장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자는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고요.”
씨익.
듣기 좋았는지 이 회장의 입가가 찢어졌다.
“부정적인 평가는 없나?”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왜?”
“쓴소리를 하는 이유는 듣는 사람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함인데 지금의 회장님께선 모든 걸 포기하시지 않았습니까? 충고를 드려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요.”
“정확히 봤군.”
꿀꺽.
이 회장이 술잔을 들어 남은 술을 마시며 말을 이었다.
“심장 기능이 떨어졌다더군. 기껏해야 일 이년 정도가 남은 거 같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나는 차분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 대 상현을 물려받을 이가 궁금하다고 했지?”
“네.”
“없네.”
“네?”
“후계자는 없다고.”
“수진 양이 있지 않습니까? 설마 딸이라서 물려주지 않는다는 고리타분한 생각은 하지 않을 거고요.”
“그럴 리가 있겠나.”
“그럼 왜 물려줄 사람이 없다고 하시는 겁니까?”
“본인이 싫다더군. 아무리 설득해봐도 요지부동이야.”
역시나, 예상했던 바다.
나는 이 회장에게 차선책을 제시했다.
“최 실장은 안됩니까? 그룹에 대해서 빠삭하게 알고 있고 무엇보다 능력이 확실한 사람 아닙니까?”
피식.
“내가 안 물어봤겠나? 몇 번이나 설득했는데 나 은퇴하면 산에 올라가 조용히 살고 싶다고 하더군.”
“가족들을 위해서라고 설득하면….”
가족이란 말이 나오자 이 회장이 의외라는 듯이 대답했다.
“자네 모르나?”
“네?”
“최 실장은 가족이 없다네. 그 나이 먹도록 나만 따라다니느냐고 혼기를 놓쳤어. 그래서 내가 항상 미안해하는 거고. 오늘만 봐도 주말인데 여기 와있지 않나. 내가 오라고 한 거 아니야. 본인이 할 거 없어서 온 거지.”
차선책으로 생각했던 최 실장마저 거절했다는 소리를 들으니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민에 빠지자 나를 보던 이 회장이 오묘한 미소를 짓는 게 보였다.
그가 이런 얼굴을 할 때면 아마….
“결혼 생각 없습니다.”
“크흠, 의사가 내년에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니까. 곧 죽을 사람 소원도 못 들어주나? 에잉.”
이 회장이 약한 척을 했지만 저건 거짓말이다.
전 회차에서 그는 병석에 누운 뒤에도 4년을 버틴 사람이다.
내년은 개뿔이.
“잘 생각해보게나. 엄청나게 남는 장사 아닌가? 결혼 한 번에 상현 그룹을 통째로 가져갈 수 있어. 무려 상현이라고 상현.”
“압니다.”
“그럼 대체 왜? 수진이의 외모가 마음에 안 드나? 그 정도면 이쁜 편 아닌가? 정 마음에 안 들면 내 성형 수술이라도….”
“제가 외모 따위에 흔들리는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가끔 흔들리긴 하지만 일시적인 거니까 접어두자.
“내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래. 이유를 말해주면 깔끔하게 포기하지.”
“따님이 싫은 게 아니라 그냥 제가 결혼 생각이 없는 겁니다.”
“크흠…. 하긴, 평안감사도 제가 싫으면 안 하는 법이니까.”
내 대답을 들은 이 회장이 아쉬웠는지 불편한 신음을 내더니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어 내밀었다.
유언장이었다.
“읽어보게. 자네만 동의한다면 내일 변호사를 불러 공증을 받을 것일세.”
스륵.
그의 말에 유언장을 꺼내어 읽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본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이건?”
“크크, 어떤가? 기발하지 않나?”
“이건…. 미쳤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네요.”
나도 모르게 험한 말이 나갔다.
그만큼 유언장의 내용이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노인에게 못하는 말이 없군.”
“아, 죄송합니다. 너무 파격적이어서 저도 모르게 그만 말이 헛나왔습니다.”
“끌끌, 그럴 만도 해. 내가 봐도 파격적이거든.”
유언장의 내용은 이랬다.
이 회장이 은퇴하면 상현 그룹의 지분은 제니가 물려받는 대신 의결권은 향후 20년간 내가 가지게 된다는 내용.
즉, 재산은 피붙이에게, 영향력은 내게 물려주겠다는 뜻이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단 하나의 해결책이다.’
이 회장 본인은 엄한 놈이 그룹을 망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고.
제니는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는다.
마지막으로 나 역시 큰 이득을 본다. 내가 필요한 건 상현 그룹이라는 물질적인 자산보다 사람과 영향력이니까.
“어떤가?”
내가 감탄하고 있자 나지막한 물음이 들려온다.
“묘수라고 보입니다. 회장님이 은퇴하시고 생길 모든 문제를 관통하는.”
“그렇지? 다 늙은 머리통 좀 굴려봤네.”
“대단하십니다.”
“그렇다는 얘기는 자네도 동의한다는 뜻인가?”
“네, 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딱 하나 걱정되는 건….”
이 회장의 아쉬움이다.
평생을 이끌어온 그룹을 피붙이도 아닌 남의 손에 맡기는 그의 아쉬움이 상상도 되지 않는다.
우려 섞인 눈으로 바라보자 이 회장이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마. 자네가 크게 키워주면 될 일 아닌가? 아니면, 자신 없나?”
피식.
“자신 없다니요. 여태 저를 보고도 의심하십니까?”
내가 자신감을 보이자 이 회장이 만족했는지 웃음을 보였다.
인생의 마지막 걱정거리를 내려놓은 듯해 보였다.
나는 그런 그에게 마지막 선물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보여드리죠.”
“무엇을?”
“제가 상현을 어떻게 키워내는지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