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화
“네?”
“말 그대로예요. 화이트 하우스는 빌더버그의 금권에 대항하려 해요. 그 첫 번째 동맹으로 당신을 선택한 거고요.”
어이없는 제안.
앞으로의 계획이 어떻든 현재 나는 빌더버그와 함께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그런 내게 그들을 배신하고 자기 쪽에 붙으라니.
‘백악관 놈들이 단체로 약을 처먹었나?’
“제가 당신들의 손을 잡아야 하는 이유는요?”
내 질문에 힐러리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마치, 내가 자신들의 편이 된 것처럼 말이다.
“조금만 생각해도 답이 나오죠. 빌더버그는 자신들의 영역에 그 누구도 끼워 넣지 않아요. 그들은 돈이 된다면 이용하고 버릴 뿐이에요. 그건 당신 역시 마찬가지일 테고요.”
“글쎄요. 비즈니스 세계에서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다고 하죠. 저야 지금 당장 돈만 벌 수 있으면 만사형통인 사업가일 뿐입니다.”
“돈은 저희 쪽에서도 충분히 채워 줄 수 있어요. 믿지 못하시겠다면 충분한 이권을 드리죠.”
피식.
그녀의 제안에 비웃음만 흘러나왔다.
명색이 백악관에서 배신하라며 내민 당근이 겨우 돈과 이권이라니, 너무 쪼잔하지 않은가.
“관심 없습니다.”
“엘, 저희가 서로 적대할 필요가 있나요?”
“빌더버그를 적으로 돌릴 필요도 없죠. 더군다나 협상을 위해 내 사람들을 납치한 자들을 믿을 만큼 제가 너그럽지는 않습니다.”
“그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자리 좀 비켜 주시죠. 당신들이 저지른 일을 처리하느라 피곤하군요.”
내 축객령에 힐러리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 생각 바뀌시면 언제든지 연락해 주세요.”
힐러리가 앉아 있던 자리에 명함을 두고 비행기를 떠났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앞으로의 일에 백악관이란 이름의 방해꾼이 끼어든 게 실감이 났다.
‘대책을 세워야겠어.’
***
뉴욕으로 돌아오고 한 달.
드디어 은행 설립 절차가 마무리되었고.
펑.
우와와.
트럼프를 내세운 모기지 론 전문 은행인 실버스타의 문을 열었다.
그가 대표로 샴페인을 터뜨리자 직원들이 환호하는 게 보였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의 활약, 기대하겠습니다.”
“으핫핫! 저만 믿으십시오. 제가 엘을 부자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응, 이미 부자야.
촐랑거리며 따라다니는 그가 귀찮았지만, 개업 첫날부터 오너와 사장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는 법.
“뭐가 되었든 도널드와 나눌 테니 열심히만 해 주세요.”
그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트럼프의 입가가 찢어졌음은 물론이다.
“고맙습니다. 믿고 맡겨 주시면 미국에서 제일가는 은행으로 키워 보겠습니다.”
그가 전형적인 사기, 아니 영업 사원 멘트를 내뱉어 자신의 성실함을 강조했지만.
이 사람은 내게 말도 없이 미국 곳곳의 부동산을 쓸어 담았다.
‘모기지 론의 허들이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부동산 가격이 뛰어오를 거라 예상했을 테니까.’
사실, 그런 모습에 그가 더욱 마음에 들었다.
정직하지 않은, 적당히 썩은 사람이 내겐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대통령이 될 사람이기도 했다.
그때를 위해서 수억 달러에 이르는 연봉과 인센티브를 약속했고 말이다.
잠시 후, 은행의 문이 열리자 고객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을 맞은 창구 직원들이 열심히 대출 상품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는 트럼프가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그날의 하루가 지나갔다.
퇴근 시간이 지나 트럼프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으로 이동했다.
그와 그의 가족들의 환대 속에 식사를 마치고 나서 술잔을 들고 그의 서재로 이동했다.
둘만 있는 공간에서 트럼프가 흥분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대성공입니다. 오늘 하루만 해도 자그마치 12억 달러에 이르는 대출이 이뤄졌습니다.”
미국 전역 82개의 지점을 가지고 있는 실버스타의 첫날 성적은 우수했다.
아니 우수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훌륭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실버스타 자체의 수익률을 0%대로 맞출 정도로 파격적인 이자율이 있지만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미리 투자한 부동산 가격이 오르는 건 물론이고 채권을 만드는 족족 월가에서 프리미엄을 얹어 사 갈 테니까.
그리고 거기서 얻는 수익 일부를 받는 트럼프의 입가가 찢어지는 건 당연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처럼만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전에 말씀드렸던 그 준비는 잘되고 있습니까?”
내 질문에 트럼프가 자신 있다는 얼굴을 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준비는 끝났습니다.”
아무리 빌더버그 놈들이 CDO에 환장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서브프라임이란 이름의 불량 채권을 받아 줄 리 없다.
예전 같았으면 얼마든지 받았겠지만.
2006년에 그렇게 데어 놓고서 또 받아 줄 정도로 놈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렇다면 정답은 하나다.
바로 서브프라임 고객을 프라임으로 탈바꿈시키는 것.
그걸 위해 익스페리언과 에퀴박스 같은 신용 평가사의 임원들을 매수해 놨다.
“중요한 건 추후 문제가 되더라도 단순한 ‘실수’로 끝나야 한다는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최대한 문제가 생기지 않게 조심하겠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소심하게 운영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비책’은 세워 놨으니까요.”
“물론, 믿고 있습니다.”
트럼프의 만족한 눈빛에 나는 본론을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를 찾아온 진짜 이유며 앞으로의 백악관을 견제할 수단이다.
“도널드, 그건 그렇고 정치에 뜻이 있으시죠?”
“네? 갑자기 무슨….”
“예전부터 TV쇼에 나서는 걸 보고 추측했습니다만 이미지를 쌓아 백악관에 가려 하는 게 아닙니까?”
트럼프가 입을 벌리고 놀랐다.
아마 아직 아무에게도 그 자신의 꿈을 이야기한 적이 없는 듯 보였다.
“그, 그걸 어떻게….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아까도 말했듯이 추측입니다.”
“놀랍군요. 아니, 두려울 정돕니다. 제 행보만 보고 생각을 읽을 수 있다니요.”
대화를 이어 가기 위해 놀란 트럼프를 달래 줬다.
“너무 놀라실 필요는 없습니다. 도널드를 유심히 보지 않았으면 저도 몰랐을 테니까요.”
“그러시군요. 하하.”
안심하는 그에게 나는 그가 넘어올 수밖에 없는 달콤한 미끼를 던졌다.
“도널드, 혹시 다음 대선에 나가 볼 생각 없습니까?”
백악관이라는 이름의.
***
여름에 미국에 와서 바쁜 일상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겨울로 접어들었다.
그동안 실버스타는 내가 더 이상 손댈 것도 없이 완전히 자리 잡았고.
트럼프는 나의 신봉자가 된 것은 물론.
빌더버그 놈들과도 여러 번 만나 회동했다.
심지어, 지금 있는 장소가 록펠러가 주최한 파티니 말 다 했지.
물론, 놈들과 자주 만나는 건 영 껄끄러운 일이지만.
앞으로 몇 년간 함께 가야 하니 최대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수밖에.
그렇게 파티장 한구석에서 음식들을 집어 먹으며 시간을 보내던 차에.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백악관의 견제가 들어오지 않고 있어.’
CIA를 시켜 아토즈사의 직원들을 모두 납치할 만큼.
실버스타의 탄생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백악관이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는 거다. 그것도 삼 개월씩이나.
‘뭐, 빌더버그 놈들이 알아서 하겠지.’
실버스타가 흔들리면 놈들이 CDO로 벌이는 사업 전체가 흔들린다.
그걸 모를 리 없을 테니 일이 터지면 최선을 다해 막을 게 분명하다.
‘그럼 이제 미국에서 볼일은 끝났군.’
당장 미국에서의 할 일은 끝났다.
오랜만에 최효석의 얼굴도 보고 니푸라-샤리르 기지의 상황도 확인할 겸 다음 행선지를 리비아로 정했을 때.
“여기서 뵙는군요.”
“아!”
눈이 휘둥그레지는 미녀가 말을 걸어왔다.
분명 아는 얼굴이지만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혹시 제 이름 잊어버리셨나요?”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그녀.
일단, 시간을 벌기 위해 필사적으로 입을 놀렸다.
“당신 같은 미녀의 이름을 잊어버릴 리가 있겠습니까? 그냥 너무 아름다우셔서 말을 잇지 못했을 뿐입니다.”
쉴새 없이 움직이는 내 입놀림에.
“어머.”
그녀가 감격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역시, 근묵자흑이라고 했던가?
트럼프와 함께 다니다 보니 말솜씨가 많이 늘었다.
그렇게 있는 말 없는 말 지어내며 시간을 벌던 와중.
“로즈나, 오늘은 오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느냐.”
마이클 록펠러가 다가와 난감한 이 상황을 풀어 줬다. 그가 나를 알아보고 인사했다.
“엘이로군.”
“마이클, 오랜만입니다.”
“저번 음악회 이후로 한 달만인가?”
“네, 잘 지내셨습니까?”
“하하, 자네 덕분에 아주 잘 지낸다네.”
마이클 록펠러가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실버스타가 운용된 지 겨우 한 달, 그동안 월가에서는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으니 당연히 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그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물었다.
“로즈나랑 아는 사인가 보군.”
뭔가 스산한 살기가 느껴지는 게 말을 잘못했다간 집에 가는 길에 히트맨을 만날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번 파티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한 번이란 말에 마이클 록펠러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러나.
“엘이 여기 있다는 소리에 얼른 옷 갈아입고 찾아왔어요. 너무나 반가운 거 있죠?”
로즈나의 한마디에 마이클 록펠러의 얼굴이 만년 서리가 낀 얼음처럼 얼어붙었다가.
“저번 파티에서 실례한 게 있어서 사과하려 했거든요.”
“그래? 허허, 그렇지. 남에게 잘못한 게 있다면 바로바로 사과해야지.”
화사한 봄날의 훈풍 맞은 것처럼 녹아내렸다.
“그럼 나는 가 볼 테니 로즈나와 ‘대화만’ 나누게나.”
“…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속으로 살았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던 찰나.
“후후.”
로즈나가 입가를 가리고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역시, 이 여자는 미친년이 맞았다.
“그러길래 누가 남의 이름을 잊어버리래요?”
거기다 눈치가 빠르기까지.
“…눈치채셨군요.”
“하루에도 수십 명씩 만나는 게 일이에요. 남의 표정 읽는 게 특기죠. 뭐, 그래도 상황을 모면하려고 댄 핑계는 마음에 들었지만.”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근데 그동안 왜 연락 안 하셨어요? 개인 번호까지 드렸는데. 설마? ”
로즈나가 말을 멈추더니 내 중요 부위를 지그시 바라봤다.
“멀쩡합니다. 아주 튼튼하고 건강해요.”
“그럼 게이?”
“여자 좋아합니다. 아주 환장하죠.”
“그런데요?”
“바빠서 연락 못 했습니다. 영국에 다녀오기도 했고 실버스타 건 때문에 바빴거든요.”
영국이란 말에 로즈나의 눈이 빛나더니.
“이상하네요. 영국에는 겨우 3일 있지 않으셨나요?”
“3일인지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그것만 알까요? 엘이 힐러리를 만난 것도 아는데요?”
“……!!!”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한 일을 밝혔다.
나를 감시하고 있었나?
어디까지 알고 있지? CDO의 등급을 조작하는 거까지 알고 있나?
잠시 심각한 상상을 하다가.
‘죽여야 하나?’
과격한 결론을 지을 때.
그녀가 방긋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아까 제가 남의 표정 읽는 게 특기라고 했죠? 무슨 생각 하고 계시는지 다 보여요.”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과격한 생각을 했겠죠. 히트맨을 보낸다든가. 아니면 엘이 직접? 여태까지의 행보를 생각해 봤을 때 아마 후자겠네요.”
“…….”
“저를 죽여도 소용없어요. 빌더버그 최상층 대부분은 아는 사실일 테니까요.”
“왜 그렇죠?”
“엘이 영국으로 타고 간 항공기, 그게 어디 소유인지 잊으셨나요?”
그동안 수없이 항공사를 이용했지만, 전혀 생각지 못한 문제다.
한편으론 안심이 되었다.
비행기 내에서만 감시가 이뤄졌으면 내 움직임 전부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닐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내가 안심할 말을 내뱉었다.
“걱정과는 다르게 이번 일은 빌더버그 내부에서는 엘을 더욱 신뢰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화이트 하우스의 제안을 뿌리친 걸 다들 흡족해하는 분위기예요.”
“그렇군요.”
“덕분에 빌더버그는 오바마 행정부와 기 싸움 중이에요. 엘 덕분에 그들의 움직임을 미리 알 수 있었기 때문이죠.”
백악관이 조용한 이유가 이거였나?
날카로운 분위기가 풀리자 그녀가 교태를 부렸다.
“그건 그렇고, 왜 연락하지 않았느냐니까요? 서운해, 증말.”
갑자기 여러 정보를 전달해 준 그녀가 예뻐 보였다.
“그럼 나가서 술 한잔하실까요? 사죄의 의미로 제가 사죠.”
몇 가지 알아볼 것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