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화
인베스트먼트는 모기지 사태 직후 미국 전역의 부동산을 사들이고.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된 뒤 처분해 쏠쏠한 이익을 거둔 적이 있다.
그때는 지금처럼 어딘가에 맡겨서 전속으로 일을 진행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트럼프에게 모든 중개를 맡기려 한다.
이유야 뭐, 단순하다.
히죽. 히죽.
엄청난 수수료를 벌 생각에 히죽대고 있는 저 아저씨가 나중에 미국 대통령이 되니 미리 얼굴도장을 찍어 놓는 거지.
어찌 됐든, 내가 트럼프와 맺은 수수료 계약은 매입가의 1%다.
매도자 쪽 수수료는 알아서 챙기는 거로 하고 순순히 내 쪽에서 지급하는 수수료.
엄청난 금액을 사용하는 만큼, 트럼프가 나서서 미국의 평균적인 중개 수수료인 4%보다 저렴하게 받겠다고 제안했다.
솔직히, 매도자와 짜고 매입가를 올려 치는 사기를 치지 않을까 살짝 걱정되기는 하는데.
‘설마, 나중에 미국 대통령씩이나 되는 인물이 그러기야 하겠어?’
라고 생각했지만.
“그럼, 저만 믿으십시오. 엘을 부자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전형적인 사기꾼의 멘트를 치는 트럼프를 보니 살짝 불안해졌다.
지금이라도 취소할까 생각하다가 그냥 감수하기로 했다.
그래, 좀 해 먹어도 된다. 대신 나중에 대통령이 되면 내가 잘해 준 거만 잊지 말아다오.
그리고, 이번 목표는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빌더버그를 괴롭히는 데 있었으니까.
‘조금의 손해 정도야 충분히 감수할 만하지.’
그렇게 계약을 마치고 숙소로 잡은 플라자 호텔로 돌아갔다.
“으어!”
쿵.
스위트룸에 도착하자마자 리우가 침대로 점프하더니 곧바로 코를 골고 잠을 잤다.
명색이 고용주 앞인데 너무한 거 아닌가 싶었지만.
드르렁.
미운 정에 고운 정, 그리고 같이 생사가 오가는 전장을 누벼서 그런지 이젠 저 모습이 꽤 정겹게 느껴졌다.
그렇게 좀 쉬려던 찰나에.
똑. 똑.
“문 앞에 있겠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불러 주십시오.”
내 경호를 맡기 위해 시큐리티를 그만두고 그룹 보안실로 자리를 옮긴 요원 중 하나가 찾아왔다.
“비행기 타고 오느라고 피곤할 텐데 오늘은 그냥 쉬세요. 맨해튼의 5성급 호텔에서 무슨 일이야 있겠습니까?”
“그럴 순 없습니다.”
“어라? 지금 오너의 지시 사항을 무시하시는 겁니까?”
간단한 농담을 던지자 요원이 고집을 피워 댄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회장님의 경호를 철통같이 하는 건 저희의 의무이자 정체성입니다. 그리고, 회장님 말씀대로 쉬면 몸은 편하겠지만 마음이 불편합니다.”
“어쩔 수 없군요. 그냥 편하신 대로 하시죠. 무리만 하지 마시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혀 감사받을 일이 아니지만 어쩔 수 있나. 그냥 쉬면 마음이 불편하다는데.
“혹시 우릴 감시하는 사람은 없었습니까?”
“3명이 우릴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꽤 숙련된 놈들인지 회장님께서 사전에 언질을 주지 않으셨다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따라왔습니다.”
“알겠습니다. 앞으로도 똑같이 모른 척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역시나, 낚싯대를 던지니 곧바로 미끼를 무는 놈들이 나타났다.
***
“트럼프 타워?”
질리언이 눈살을 찌푸리며 정보원이 가져온 자료를 확인했다.
수천억 달러의 부호가 미국까지 날아와 가장 처음 방문한 곳이 겨우 부동산 개발 회사?
물론, 트럼프가 작은 규모의 부동산 기업을 운영하는 건 아니지만 로스차일드가를 이끄는 질리언이 보기엔 동네 부동산이나 다름없는바. 질리언의 의심이 깊어져만 갔다.
“엘 같은 세계적인 부호가 겨우 집을 사기 위해 직접 방문할 리는 없고.”
탁. 탁. 탁.
질리언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생각이 깊어지면 나타나는 그의 습관이었다.
10분쯤 지났을까?
질리언이 결론을 내렸는지 책상을 두드리는 행위를 멈췄다.
“투자로군. 엘이 직접 움직일 만한 엄청난 규모의.”
현재 미국의 부동산 가격은 침체 상태.
결코, 투자의 적기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자를 단행한다는 건, 충분한 상승 요인이 있거나.
“여태처럼 본인이 직접 상승 요인을 만들거나.”
확신이 들어찬 질리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빌더버그 회의를 소집해야겠어.”
***
리우와 요원들을 데리고 뉴욕 곳곳을 누빈 지 일주일.
“지겹다….”
리우가 불평을 쏟아 냈다.
충분히 이해되는 반응이다.
차에 타서 아무 곳이나 가서 돌아다니다 식사 때가 되면 밥을 먹고 또다시 돌아다니다 숙소로 복귀하는 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했으니 지겨울 수밖에.
“조금만 참아. 며칠 남지 않았어.”
“차라리 리비아로 보내 주는 게 어때? 모르긴 몰라도 내가 가면 캡틴 최가 든든하지 않을까?”
“어차피 반군이랑 휴전 협정 맺어서 네가 할 일도 없어.”
“그럼 중국은 어때? 마음에 안 드는 놈 이름만 말해. 가서 모가지 따 오게.”
요원들 역시 지겨웠는지 리우의 투정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쉬는 날도 없이 돌아다녔으니까.’
부하들이 이렇게까지 싫어하는데 밀어붙이는 건 전형적인 꼰대가 아니겠는가.
평소 부하들을 아끼는 나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행위기에 그들을 위해 유급 휴가라는 작은 이벤트를 열기로 했다.
“다들 힘들어하니 당분간 쉬겠습니다. 그동안 호텔 레스토랑에서 밥도 먹고 근처에서 쇼핑도 하고. 다들 어떻습니까?”
어쩌긴 어째. 좋아 죽겠지.
다만 고용된 처지에서 쉽게 표현을 하지 않을 뿐이지.
“진짜지? 와!”
리우 놈만 빼고.
그렇게 호텔로 돌아가자 익숙한 얼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전화해 주셨으면 바로 오는 건데.”
“하하, VIP 고객님을 기다리는 게 또 영업 사원의 덕목 아니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의 눈은 상관하지 않는지 트럼프가 아첨꾼처럼 양손을 싹싹 비볐다.
그나저나 트럼프 호텔의 로비에서 트럼프를 보다니.
아주 어릴 적 크리스마스에 봤던 영화의 한 장면이 따로 없었다.
“그나저나 이곳은 오랜만에 오는군요.”
“95년도에 매각하셨죠?”
“맞습니다.”
“어떻습니까? 다시 와 본 이곳은.”
“…그냥 착잡한 심정일 뿐입니다.”
사업체가 자신의 손을 떠난 지가 20년이 지났어도 미련을 놓지 못하는 모습.
나를 제외한 보통의 경영자가 보일 만한 반응이다.
“10년 버텼으면 2배는 더 벌 수 있었는데….”
정정하겠다. 이 사람은 사업체를 아쉬워하는 게 아니라 돈을 아쉬워할 뿐이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보면 볼수록 신뢰가 쌓이기 마련인데.
이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내 신뢰를 잃는 말만 해댄다.
“…방으로 올라가시죠. 여기서 계속 있을 수는 없으니.”
“예.”
잠시 후, 함께 방으로 올라간 트럼프가 일의 진행 상황을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사기꾼 스타일의 어투로 말은 많이 했지만, 속에 담긴 내용은 간단했다.
“잘되고 있네요.”
뉴욕 부동산을 매입하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말과.
“잘됐군요.”
한꺼번에 많은 돈이 풀려서 그런지 뉴욕의 부동산 가격이 벌써 5%의 상승 폭을 보인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10분이면 할 브리핑을 장장 2시간을 내뱉은 트럼프가 이마의 땀을 훔쳤다.
대부분의 군필인 한국 남자라면 모두가 알 법한.
나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알아달라는 액션이다.
아니, 직접 도장 찍으러 다닌 것도 아니고 실무는 직원들이 모두 처리했을 텐데 본인이 힘들 게 뭐가 있겠는가.
내가 눈치채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트럼프가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자신의 노력에 굉장히 흡족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가 떠나기 전 잊은 게 있는지 몸을 돌렸다.
“아! 알려 드릴 오피셜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겁니까?”
“월가의 은행들이 모기지 론 자금을 확충하고 이율을 내린다는 소식입니다. 재원이나 방법은 내일모레쯤 발표될 예정이랍니다.”
좋은 소식이다.
한국으로 치면 주택 담보 대출과 같은 상품이 모기지 론인데.
그것의 허들이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부동산의 가격이 오르지 않겠는가.
“그래요? 이거 아주 좋은 소식이네요.”
“하하, 엘은 역시 투자의 신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어쩜 이렇게 손대는 거마다 터지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손대서 터지긴.
놈들이 미끼를 물어서 터진 거지.
***
트럼프가 돌아가고 그날과 그다음 날은 제대로 쉬었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방에서 쉬는.
마치, 돈 많은 백수나 다름없는 생활을 즐겼다.
리우와 요원들의 만족도가 하늘을 찍은 건 물론이다.
그러던 차에.
내가 기다리던 사람이 찾아왔다. 정말 꿈에도 그리던 사람이 말이다.
“오! 질리언!”
얼마나 반갑던지 나도 모르게 하이텐션으로 그를 맞았다.
“…엘이 이렇게 반겨 주는 건 처음이군요.”
질리언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살짝 민망함이 느껴졌지만, 안 그래도 소식을 기다리던 사람이 갑자기 나타났으니 텐션이 오를 수밖에.
“그리고 누가 뭐래도 홍콩에서 중국에 함께 대항한 ‘전우’ 아닙니까?”
“전우라…. 좋은 표현입니다. 앞으론 시간 날 때 종종 찾아뵙겠습니다.”
딱 봐도 그냥 던지는 빈말이다.
나중에 밥 한번 먹자와 언제 한번 술 한잔하자 같은 거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몸소 찾아와 자발적으로 빌더버그에 폭탄을 넣어 주는 질리언을 홀대할 수는 없는 법.
“그러시죠. 한국 찾아오시면 제가 제대로 쏘겠습니다.”
나 역시 완벽한 빈말을 던졌다.
흡족하게 웃던 질리언이 자그마한 초대장을 건넸다.
“모건가에서 하는 파티의 초대장입니다. 엘과의 접점이 있는 제가 대신 전해 드리려 찾아왔습니다.”
“파티는 영 익숙지 않은데요?”
내가 한번 튕기기 위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질리언이 머리를 들이밀고 속삭였다.
“그래도 웬만하면 참석하는 게 좋을 겁니다. 파티가 끝나고 시작되는 빌더버그 회의에도 초대되셨거든요.”
드디어 걸려든 대어에 나는 곧바로 챔질을 시작했다.
“그래요? 빌더버그 회의에 참석할 수 있다니 이거 영광이군요.”
혼신의 연기를 하면서 말이다.
질리언이 대단히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며 내 어깨를 두드린다.
마치 아랫사람을 대하는 제스처.
저런 거 보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게 틀린 말이 아니다.
그게 좋은 쪽이든 안 좋은 쪽이든 말이다.
“그럼, 파티장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날 뵙죠.”
그렇게 완벽하게 낚인 질리언이 떠나갔다.
나라는 핵폭탄을 빌더버그 회의에 들여보낼 초대장을 놓고서.
며칠 뒤, 파티의 당일이 되었다.
시간에 맞춰, 이날을 위해 산 최고급 정장을 입고 파티장인 모건 저택으로 향했다.
그렇게 리우와 요원들의 배웅을 받고 저택에 들어서려던 찰나.
한 가지 잊은 게 떠올라 몸을 돌렸다.
“리우.”
“응?”
“오늘 사고 치면 미국에 두고 간다.”
그동안 놈을 제어하던 최효석은 없다.
그 말은 오늘 리우가 사고 칠 확률이 굉장히 높단 뜻이다.
특히, 오늘같이 미국의 유력 가문들이 참가한 파티는 그들이 데려온 다수의 경호원이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어 사고 칠 확률이 더욱 높아진다.
아니나 다를까, 마치 먹잇감을 관찰하는 포식자의 눈으로 관찰하던 놈이 내 경고를 듣자 속내를 들켰다는 듯이 깜짝 놀라 했다.
“다들 철저한 감시 부탁드립니다.”
내 부탁을 들은 요원들이 짧게 고개 숙였다.
그런 그들을 두고 나는 파티가 열리는 모건 저택을 향해 걸었다.
입 벌려라. 폭탄 들어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