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화
이지석이 돌아가고 이강진 회장에게 회담 결과를 알렸다.
-수고했네. 한시름 덜었어.
“그럼, 이지석 총리를 미는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물론이지. 우리에겐 자비롭고 적에겐 가차 없다. 이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나?
이제 별일 없으면 이지석이 경선을 통과하고 곧바로 대선까지 승리할 거다.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니푸라 기지에 전차와 자주포, 전투기 같은 무기를 한국 정부로부터 사들인다.
그렇게 국방력을 갖춘 니푸라 기지의 난민들을 데리고 리비아 내 괴뢰 정부를 설립.
리비아 유전 지대를 꿀꺽함과 동시에 러시아의 지지를 얻어 UN으로부터 국가 인정을 받는 게 내가 그린 큰 그림이다.
그렇게 되면.
‘세금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거지.’
오션과 오션에 속한 계열사들이야 한국에 소재를 두고 있기에 매년 꼬박꼬박 엄청난 세금을 내고 있지만.
현재 SC 내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인베스트먼트는 다르다.
만약 세금을 제대로 낸다면 연간 수백억 달러에 이르는 세금을 내야 한다.
현재까지는 파나마에 만든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최대한 세금을 피하고 있지만.
이 같은 방법은 언젠가 걸린다.
원 역사에서 2030년이 지나 일어난 AI 혁명은 세계 각국 세무 당국의 추적 능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켰다.
그 결과,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세금을 회피한 기업들은 전부 덜미를 잡혔다. 엄청난 가산세는 기본이었고.
실제로 이름만 들으면 알 법한 글로벌 기업들이 많이 힘들어하던 때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직접 국가를 세운다면?
그거야말로 완전한 텍스 프리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애초에 세금을 걷는 주체와 내는 주체가 같으니 말이다.
어쨌든 이지석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지금 급한 일은 모두 처리되었다.
남은 건 위안화 투자가 얼마나 성공을 거두는지 확인하는 것인데 이건 첸이 어련히 알아서 할 문제.
당장은 내가 할 일은 없다.
‘남은 건 미국인가?’
나는 미국으로 향하기로 마음먹었다.
금융 위기의 여파를 어느 정도 회복한 미국이다.
당연히 빌더버그 놈들도 슬슬 살판이 나지 않겠는가.
다른 놈들은 몰라도 그놈들 등 따습고 배부른 꼴은 보지 못하겠다.
‘제대로 분탕질을 쳐 주마.’
***
뉴욕 외곽 로스차일드 저택.
이제는 가주가 된 질리언 로스차일드가 자신의 할아버지가 쓰던 서재에서 엘에 대한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그러기를 잠시,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보고서를 내팽개쳤다.
“허! 화이트 도어를 제거한 게 그였다니. 그것도 직접.”
질리언이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정말 미친놈이 아닌가.
세계적인 투자 회사를 이끌고 있는 이가 총을 들고 직접 나서다니.
심지어, 수백 명을 몰살시켰단다. 단 한 명의 생존자 없이.
물론, 이전에도 직접 움직인 적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호주 항구를 불태운 일이나 리비아 내전에 개입하여 유전 지대를 차지한 일 같은.
하지만, 그것들은 사업적으로 움직인 일이지 이번처럼 학살이 목적이 아니지 않은가.
본래 질리언은 엘을 존경하고 있었다.
아무 배경 없이, 단시간에 믿을 수 없을 만큼의 부를 쌓은 과정을 보고 그의 팬이 될 만큼 말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전대 가주인 프랭크의 명령으로 그의 곁에서 함께 일해 본 결과, 질리언은 그의 성공 비결을 엿볼 수 있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기회를 보는 눈과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 내는 과감함, 그리고 그것들을 뒷받침하는 판단력까지.
투자가로서 뭐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큰 실망감을 느꼈다.
자신이 배우고 싶었던 사람은 세계적인 투자자인 엘이지, 인간 백정인 엘은 아니었으니까.
“그의 과감함이 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조지 소로스가 이전과는 다른 깍듯한 태도로 질리언을 대했다.
“맞습니다. 위험하다고 느껴질 정도로요. 그가 더 크기 전에 제거해야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가주님께선 그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좋아합니다. 지금 일로 실망했지만요.”
놀란 얼굴을 한 조지를 보며 질리언이 말을 이었다.
“그건 개인적인 감정이죠. 가문의 미래를 위해서는 언제가 되었든 그를 제거하는 게 옳습니다.”
“직접 제거할 이유가 있겠냔 생각이 듭니다. 어찌 되었든 지금 우리와는 협력 관계가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만, 그는 너무 과격합니다. 수틀리면 직접 적을 처단하죠. 그 말은 그의 총구가 우리를 향할 수도 있다는 뜻이죠. 그러기 전에 제거하는 게 옳다는 겁니다.”
냉혹한 질리언의 대답에 조지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래, 로스차일드의 가주라면 감정보다 가문의 이익을 생각해야지.
이제 막 가주 자리에 오른 질리언이다.
그런 그가 하루하루 성장해 나가는 것 같아 뿌듯한 조지였다.
“그건 그렇고 엘이 위안화 절하에 투자했다고요?”
“네, 5,000억 달러가 넘는 자금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는 이번에도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을 추구하는군요.”
“맞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저런 식으로 투자할 수는 없지요.”
“미리 알았다면 따라갔을 텐데, 아쉽군요.”
질리언의 목소리에서 깊은 안타까움이 묻어 나왔다.
전처럼 엘을 따라 투자했다면 큰돈을 벌 수 있었을 텐데.
엘이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저번 엔화 투자 이후 그의 움직임을 전혀 읽을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위안화가 떨어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 결과에 도달하지는 않았습니다. 최종적으로 엘의 투자가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조지의 부정적인 의견에 질리언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성공할 겁니다. 그는 투자에 있어서 신의 계시를 받는 선지자와 같은 존재니까요.”
***
‘후진타오 새끼가 돈 안 빼돌렸다면 이번 위안화 투자는 망했겠지?’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신문을 읽다가 갑자기 든 생각이다.
‘앞으로는 깝죽거리지 말고 미래 지식을 기반으로 의견을 말해야겠어.’
예전 같았으면야 내가 의견을 제시하면 첸이 분석해서 보완하여 리스크를 줄였지만.
이제는 무슨 말만 해도 밑도 끝도 없이 따르니 리스크를 줄일 기회가 없어졌다.
한번은 농담으로 2020년쯤에는 하늘을 나는 자동차가 개발된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다음 날 첸이 투자하겠다며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관련 기업 리스트를 뽑아 와서 놀란 적이 있었다.
가장 놀라운 건 그 리스트 안에는 2055년에 반중력 자동차를 개발하는 데 성공한 회사도 있었다는 거다.
하여튼 간에, 계속되는 성공으로 나에 대한 첸의 믿음이 위험 수위에 다다른바.
앞으로 투자 의견은 미래 지식에 기반해서만 말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위이잉. 쿵.
상념에 빠져 있던 차에 비행기가 착륙했는지 흔들림이 느껴졌다.
[승객 여러분. 저희….]
짧은 기내 방송과 함께 비행기의 문이 열렸다.
“으어어!”
퍼스트 클래스라고 하지만 좁은 좌석에만 갇혀 있다 보니 몸이 뻐근했는지 리우가 지겹다는 얼굴로 기지개를 켰다.
우리는 공항을 빠져나와 맨해튼에 있는 한 빌딩을 찾았다.
1983년 완공이 될 당시 뉴욕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꼽혔던 트럼프 타워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황량한 느낌이 들었다.
미국의 부동산 시장이 호황일 때는 사람들로 넘쳐났겠지만, 지금은 이곳에 사는 주민을 제외하고는 정장 입은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잠시 기다리자 오늘 만나기로 약속한 이가 보였다.
“Hey, Fired.”
“하하, 사인이라도 해 드립니까?”
유쾌한 반응.
내가 생각한 이미지와는 달랐다.
아니면, 불경기 속에서 손님을 잡기 위한 이미지 관리일 수도 있고.
“처음 뵙겠습니다. SC 인베스트먼트의 엘입니다.”
“반갑습니다. 도널드 존 트럼프입니다.”
그렇게 간단한 인사를 마친 후, 그의 개인 집무실로 올라갔다.
뉴욕에서 손꼽히는 부동산 기업을 운영하는 트럼프도 불황을 피해 갈 수는 없었는지 사무실에는 일하는 직원이 생각보다 적었다.
내 눈치를 봤는지 그가 재빨리 변명을 시작했다.
“워낙 불황이라서 대부분 관뒀습니다. 부동산 중개업이 기본급이 없는 직종이라….”
“그렇군요.”
그의 사무실에 마련된 소파에 앉자 트럼프가 본론을 꺼냈다.
“부동산을 매입하고 싶으시다고요? 그것도 상당히 많이.”
“네, 어느 정도까지 매입할 수 있겠습니까?”
“중개 수수료를 받는 저희 입장에서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그건 저도 마찬가집니다.”
내 대답을 들은 트럼프가 오묘한 표정을 짓더니 자신의 사견을 밝혔다.
“잘못하면 투자한 모든 돈이 기약 없이 묶일 수도 있습니다.”
“솔직하시군요.”
“월가에 끈이 있어 당신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세계적인 투자자 엘이 겨우 이런 정보가 없을 리 없죠.”
트럼프가 특유의 직설적인 화법으로 암울한 전망을 내놨다.
어떻게 보면 저게 당연하다.
한때, 미국의 부동산 가격은 지하 맨틀을 찍고 반등했다.
그렇게 평년의 가격을 회복하나 싶었지만, 최근 다시 폭락을 거듭했다.
문제는, 이 폭락의 이유를 아무도 설명하지 못한다는 거다.
그런 불확실한 시장 상황에 투자한다고 나섰으니 이 풍성한 머리를 가진 아저씨가 이상하게 볼 수밖에.
“트럼프 회장님께서는 부동산 시장을 암울하게 보고 계시는군요.”
“저는 고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계속해서 부동산 업무를 해 왔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
“미국에서 저보다 실력이 좋은 부동산 전문가는 없다고 자부합니다. 그런 제가 단언컨대 지금 부동산 시장은 혼돈 그 자쳅니다. 제가 돈을 벌지 못해도 좋으니 투자하시는 걸 말리고 싶습니다.”
자신의 이익보다 고객의 지갑을 지켜 주려는 그의 주장에 나는 인지 부조화가 느껴졌다.
뭐지? 내가 아는 그 사람과 동일인이 맞나?
혹시, 나와 같은 빌런과가 아니라 사실은 선하고 정정당당한 사람이 아닐까?
이러한 느낌을 받던 차에 그가 내 감정을 온 힘을 담은 사커 킥으로 날려 버렸다.
“그러지 마시고 저와 같이 라스베이거스에 카지노를 지어 보는 게 어떻습니까? 이게 투자하기만 하면 아주 노다지…. 또 제가 기획한 게 있는데 이게 아주 기가 막힙니다. 그리고….”
역시나 사람은 바뀌기가 힘든 법.
고의 파산으로 4번이나 투자자를 등쳐 먹은 그의 본성이 바뀔 리가 없지.
“필요 없습니다.”
“어흠, 이거 굉장히 좋은 기횐데….”
“계획했던 대로 부동산 투자를 진행하겠습니다.”
“저야 돈을 벌어 좋지만, 권해 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유가 시장의 불확실성 때문이라고 하셨죠?”
“네.”
“그렇다면 뉴욕의 부동산 전부를 매입해 가격을 올리면 어떻겠습니까?”
“네?”
트럼프가 어디선가 계산기를 가져와 두들기기 시작했다.
“불가능합니다. 그러려면 1조 달러에 가까운 자금이 들어갈 겁니다.”
“뉴욕에 있는 부동산 전체가 매물로 나오지는 않겠죠? 기껏해야 매물로 나온 건 10% 이하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럼 1,000억 달러 정도면 매물로 나온 건 전부 매입할 수 있겠군요.”
“차고 넘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시작하시죠.”
“예?”
트럼프가 놀랐는지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돈은 준비되어 있으니까 바로 시작하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