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화
연막탄을 터뜨린 덕분에 피아 구분이 전혀 되지 않는 복도.
아군과 적군이 뒤엉켜 있었기에 원거리에서 적을 사격하는 행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까이 붙어야만 상대가 보이는 이곳에서.
쉬익.
적의 단검이 은밀하고 신속하게 머리 쪽으로 날아왔다.
고개를 내려 단검을 피해 냄과 동시에 놈의 명치를 향해 칼을 내질렀다.
푹.
놈이 급한 대로 맨손으로 칼날을 잡았다.
손에서 피가 흘러 바닥을 적셨다.
“크윽.”
놈이 벌게진 얼굴로 칼을 막으려 했지만.
결국, 칼이 놈의 명치에 틀어박혔다.
피 분수가 터져 나와 내 얼굴을 적셨다.
콰직! 콱.
앞선 리우가 적을 돌파했고.
그가 흘린 적들을 나와 최효석, 그리고 대원들이 상대했다.
여태까지와 같은 패턴이지만.
“커헉!”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대원들의 피해가 빠르게 늘어났다.
탕. 탕. 푹. 챙.
사방에서 총과 칼 소리가 나며 비명을 질러 댔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날아드는 칼을 피하고 찌르고 쏘며 한참을 전진한 끝에.
“크허.”
몰아치는 호흡을 내뱉으며 마지막 층에 도달했다.
이제 계단을 막고 있는 문만 열면 놈들이 있는 곳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장이량이라고 했던가?
30층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보스몹이.
허억. 허억.
뒤쪽 계단에서 숨을 몰아쉬는 대원들을 돌아봤다.
대부분 호텔 1층 로비에서 호텔로 지원 오는 상하이 공안들을 상대하게 하고 최정예 요원 스무 명만 데리고 올라왔다.
하지만, 그런 최정예임에도 불구하고 남은 대원들은 일곱밖에 되지 않았다.
그만큼 상대가 만만치 않았던 탓이다.
약간의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괜찮아. 다들 각오하고 온 일이다.”
최효석이 내 어깨를 두들겼다.
고개를 흔들어 마음을 바로잡았다.
그래, 이제 거의 다 왔다.
빌어먹을 전생의 질긴 악연을 끊어 낼 장소에.
“가자!”
덜컹.
최효석의 외침에 대원 하나가 문을 열고 연막탄 두 개를 던졌다.
치이익.
순식간에 복도를 가득 채우는 연기가 시야를 가린다.
탕. 타탕. 탕.
적들의 총알이 날아와 벽을 두들겼다.
그러기를 잠시.
총성이 멈추자 이번에는 대원들이 튀어 나가 반대쪽으로 총알 세례를 퍼부었다.
그리고.
“크흡!”
숨을 들이쉰 리우가 폭발적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나와 최효석 역시 마찬가지.
뿌연 시야를 헤치며 칼로 적들의 목숨을 갈랐다.
쉬익.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모를 적의 칼이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뜨끈한 감각이 느껴졌지만, 고통에 몸부림칠 정도는 아니었다.
곧바로 놈의 팔을 잡고 목을 향해 단검을 밀어 넣었다.
놈이 양손으로 내 팔을 잡고 저항했지만, 힘이 약했다.
“크륵.”
곧 목에 칼이 들어와 피거품을 흘리며 즉사했다.
시체를 그대로 스위트룸의 문 쪽으로 밀어붙였다.
덜컹!
스위트룸의 문이 열리며 시체 뒤로 대기하고 있는 암살단 놈 둘이 보였다.
시체를 놈들에게 던짐과 동시에 소파 뒤로 몸을 굴렸다.
탕탕. 퍽.
놈들이 쏜 총알이 시체를 뚫고 바닥에 박혔다.
그리고.
타탕. 타타탕.
근처에서 지켜보던 대원들이 놈들에게 총알 세례를 먹였다.
“커억!”
한 놈이 맞았는지 배를 부여잡고 쓰러졌고.
콰직.
“크륵.”
다른 한 놈은 내 칼에 목이 꿰뚫려 피거품을 물고 죽었다.
전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총을 쏘고 칼로 찌르고 쑤시고.
계속되는 살인에 모두의 눈에서 살기가 흘러넘쳤고.
단말마와 함께 생명이 빠르게 꺼져 갔다.
그렇게 20여 분. 올라온 일곱의 대원 중 서 있는 사람이 고작 셋으로 줄었고 적의 시체가 사방에 널려 있었을 때.
탕. 끼이익.
마침내, 마지막 문을 열어 낼 수 있었다.
30명에 가까운 놈들이 보였다.
놈들이 재빨리 총구를 들었으나.
푸욱!
“켁.”
감각이 극대화된 리우가 칼을 던졌다.
움직이던 간부 하나가 목이 꿰뚫려 즉사했다.
주르륵.
목에서 흐른 피가 스위트룸의 바닥을 적셨다.
그게 신호였다.
타타탕. 타타탕.
대원들이 무장한 놈들만 골라서 사격을 시작했다.
놈들이 어떻게든 저항하려 했지만, 문주를 포함한 백문의 간부는 대부분 비전투원.
총알이 날아오는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머리를 부여잡고 엎드렸다.
“장이량이 누군지 알려 주면 나머지는 살려 주도록 하지.”
순도 100% 거짓말이지만, 놈들이 고개를 들고 눈알을 돌렸다.
살려 준다는 말에 자신들의 문주를 팔아먹은 거다.
피식.
원래 가진 게 많을수록 자신의 목숨을 중히 여기는 법이다.
그런 점을 노리고 뻥카를 쳤고.
“모두 죽여.”
내가 지시하자 한국말을 알아들은 몇몇이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이 주위에 내 말을 전파하기 전에.
타타탕. 탕.
대원들이 쏘아 낸 총알이 사정없이 그들의 몸을 관통했다.
덜덜덜.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 명.
장이량뿐.
“사, 사. 살려만 주면, 돈을 주겠다.”
장이량이 몸을 떨면서 목숨을 구걸했다.
그리고 그걸 보는 내 심정은 복잡해져만 갔다.
시시했던 탓이다.
백문을 무너뜨리는 과정이 시시한 게 아니라.
명색이 백문주라는 인간 자체가 시시했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영화 속 악역이 멋있고 강해야 이야기가 재밌다고.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장백이면 모를까 이놈은 악역 감은 아니다.
그리고, 최후의 악역은 저 멀리 바다 건너에 살고 있을 테고.
그건 그렇고, 실리는 챙겨야지?
시간 없으니까 최대한 빠르게.
살려 달라고 빌고 있는 장이량에게 미소 지었다.
놈이 나를 보더니 협상이 된다 생각했는지 반색했다.
“얼마 줄 수 있는데?”
“그, 그게.”
“어라? 바로 안 나오는 거 보니까 생각도 안 하고 있었나 보네?”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 올리자 장이량이 그제야 소리 질렀다.
아주 다급하게 말이다.
“배, 백억 달러 이상은 돈을 줄 수 있다. 그 정도면!”
“어쩌지? 그런 푼돈은 안 받는데.”
타앙!
놈의 발등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발등을 관통해 바닥에 박혔다.
“끄아아악!”
“계속 소리 지르면 이번엔 머리통에 총알을 박아 주마.”
“흐…. 흐….”
고통에 흐느껴 우는 놈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사실, 돈 따위는 필요 없어. 내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조금 있으면 난징 군구에서 파견한 병력이 올 텐데 돈 챙기다가 죽을 수는 없잖아?”
“바, 바로 줄 수 있다! 가장 안쪽 방에 있는 금고에 백문이 가진 재물이 있다. 제발….”
“오, 진짜?”
내가 눈짓하자 대원 몇이 들어가서 확인했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거로 보아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다.
“비밀번호.”
“그….”
장이량이 입을 열려다 다물고 눈알을 굴렸다.
놈도 아는 것이다.
자신의 효용 가치가 없어진다면 죽는다는 것을.
그렇다고 시간을 끌 수도 없는 노릇.
서걱. 푹.
“끄억!”
놈의 엄지발가락을 잘라 버렸다.
그리고 잘린 발가락에 칼을 꽂아 넣었다.
자신의 잘린 신체가 또 잘린다는 정신적인 충격을 주기 위함이었다.
“으으….”
놈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그것을 바라봤다.
“말해. 혹시나, 거짓말할 생각 하지 말고. 배 속 장기가 꺼내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
역시나 놈은 입을 다물었다.
당장의 고통 따위는 참고 목숨을 보전하겠다는 뜻.
이럴 때 방법은 하나다.
푹. 푹. 서걱.
고통을 키워 차라리 죽음이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잠시 후.
비명을 지르던 장이량이 포기했는지.
“…4885.”
비밀번호로 추정되는 숫자를 불었다.
내 모습을 보던 대원이 질린 기색으로 금고를 확인하러 들어갔고 곧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대원들이 금고의 물건을 챙기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장이량이 모든 걸 체념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발 고통 없이 죽여다오.”
“그래.”
어차피 더 찌를 데도 없으니까.
서걱!
놈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집에 가죠.”
***
바다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쉬웠다. 처음에만.
공안들은 겁을 먹었는지 시민들의 안전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멀찍이서 우리를 보기만 했고.
상하이 내에 있는 소규모 군부대는 감히 덤벼들지 못했다.
그렇게 약속된 장소에 신속하게 도착하니 송동익 선장이 미리 마련해 둔 보트들이 보였다.
“빨리 올라타!”
최효석의 말에 대원들이 재빠르게 움직여 보트에 올라탔다.
부아아아.
이대로 공해상으로 나아가면 위장 선박이 우리를 기다릴 거고 우린 그걸 타고 인천항으로 입항할 계획이었다.
그렇게 십 분 정도 나아갔을까?
“시팔.”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
멀리서 군함 하나가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뭐래?”
“멈추지 않겠다면 쏘겠답니다.”
“빌어먹을. X 됐네.”
총 몇 자루로 군함에 저항할 수는 없는 노릇.
최효석뿐만 아니라 대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잡혀 가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원인이야 어쨌든, 저들이 보기엔 우리는 상하이 시내에서 수백의 사람을 죽인 테러 집단일 뿐이니까.
그렇게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군함이 크게 흔들렸다.
콰아앙!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번의 굉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터엉.
군함이 반쪽으로 쪼개져 가라앉기 시작했다.
거리가 상당히 멀었는데도 물살이 밀려와 보트가 크게 흔들렸다.
나를 포함해 모두가 영문도 모르고 있을 때.
촤아악. 촤아악.
멀리서 잠수함 세 대가 머리를 드러냈다.
그리고.
덜컹.
내가, 아니 우리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나타난 구세주가 다시 한번 강림했다.
“비고르!”
그를 발견한 최효석이 양손을 들고 환호했다.
잠시 후, 잠수함에 올라타 비고르를 만났다.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엘이 작전에 돌입하기 전부터 공해에서 상하이에 있는 군함들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이상 행동이 보이자 바로 온 거고요.”
정보를 받기 위해 수시로 연락했지만, 그가 이렇게 근거리에서 돕고 있을지 몰랐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비고르를 보면 러시아와 좋은 관계를 가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집니다. 그리고 각하도 마찬가질 거고요.”
잠시 훈훈한 시간을 가지다 생각난 바가 있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남의 나라에서 전함을 침몰시킨 건 큰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내 질문에 비고르가 뜻밖의 사실을 전달해 줬다.
“후진타오가 보낸 전함이었습니다. 본인도 연루되어 있으니 아마 함부로 나서지는 못할 겁니다.”
“이 개새끼가.”
백문을 없앴으니 이제는 나를 죽이겠다?
중국 놈들 신의가 없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하루도 되지 않아 뒤통수치는 건 너무 하지 않은가.
“그럼 돌아가 보겠습니다. 공해까지는 10분 정도 걸릴 겁니다.”
“고맙습니다.”
선실을 나가는 비고르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함을 느꼈다.
내가 후진타오에게서 받기로 한 보상은 중국 내 조선 회사 6곳의 지분과 경영권이다.
한국과 중국, 양쪽의 선박 점유율은 전 세계의 과반을 넘는 바.
충분한 이득을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에서 요구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사실, 후진타오의 통수는 예상 범주 안이다.
이렇게 빨리 태도가 돌변할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일단 한국으로 돌아가서 놈에 대한 응징을 계획하기로 했다.
‘급한 환자도 있고.’
“끄응.”
호텔에서 챙겨 온 리청풍이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