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화
제니와의 만남 이후.
일상은 계속되었다.
주로 계열사들을 돌아다녔는데.
오션이나 벤처, 인베스트먼트야 말할 것도 없고.
최근 벤처의 투자를 받아 빅터가 창업한 BT 게임즈까지 방문해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기다리던 소식이 TV를 통해 들려왔다.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이 오는 13일 방한 일정을 잡았습니다. 이는 대중 무역 규모가 늘고 있는 우리나라를….]
바로 후진타오의 방한 소식이었다.
-주석께서 보자고 하십니다.
며칠 뒤, 내 예상대로 리커창의 연락이 왔다.
장소는 공교롭게도 지난번 사고가 있었던 소공동에 있는 루덴 호텔.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가 묵고 있다는 층에 내리자 리커창이 경호원들 사이를 헤쳐 나와 나를 맞았다.
“어서 오게.”
“시간 없으니까 빨리 안내해.”
내 태도에 주위 경호원들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알았네.”
리커창이 나를 데리고 후진타오가 묶고 있는 스위트룸 앞으로 향했다.
문 앞에선 그가 진지한 얼굴로 후진타오를 만날 때 주의할 점을 읊기 시작했다.
“후 주석을 만날 때 주의할 점을 알려 주겠네. 주석께서 부를 때까지 절대로 눈을 마주치지 말고….”
마치, 명청시대 중국 황제를 만날 때나 하는 예법.
전혀 따를 생각이 없던 나는 리커창에게 간단히 대답해 줬다.
“지랄.”
덜컹.
당황한 듯, 눈을 휘둥그레 뜬 리커창을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가자 중앙 소파에 후진타오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으니 후진타오가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봤다.
“시간 없으니 본론만 간단히 하자.”
“대충 들었다만, 중화를 침몰시킨 자의 정체가 이런 망나니일 줄 몰랐군.”
“싫으면 그냥 돌아가지.”
내 협박을 들은 후진타오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오히려 마음에 드는군. 이 정도의 미친놈이 아니면 어찌 놈들과 싸울까.”
“글쎄? 미친 건 나라 빚 갚는다고 국민을 갈아 넣은 당신이지 않을까?”
“으하하하. 맞네, 그때는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지. 어떻게든 위기를 벗어나려 뭐든 했을 때니 말이야.”
“인정하는군.”
“인정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 과정이야 어쨌거나 자랑스러운 결과가 아닌가? 환란을 3년 만에 극복해 냈으니.”
당당하게 말하는 그에게서 부끄러움 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피식.
그의 뻔뻔한 모습에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또한, 차라리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겉과 속이 다른 놈들보다야 낫지 않은가.
그의 이런 모습이 마음에 들어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
다음 날.
동이 틀 때까지 후진타오와 회담을 마치고 오피스텔에 돌아온 나는 상황을 분석했다.
‘생각보다 어렵다.’
그와의 대화 끝에 내린 결론.
이대로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주석 자리는 시진핑에게 넘어갈 게 확실했다.
물론, 그가 올해 시진핑에게 주석 자리를 넘기고 은퇴하는 게 역사의 흐름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의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이었지, 지금처럼 정치적인 압박 속에서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고.
당시의 시진핑 역시 백문의 편의를 봐주는 정도였지 이런 식으로 그들의 개가 되지는 않았다.
이 모든 게 내가 일으킨 나비 효과 때문이다.
홍콩을 반쯤은 독립시키고 본토에 IMF를 불러일으킨 일이 공산당에 대한 불신을 불러일으켰고.
IMF를 헤쳐 나가기 위한 그의 무대 포식 방법이 인민들의 불만을 가져왔다.
백문은 바로 그 틈을 놓치지 않았을 뿐이다.
그들은 막대한 자본으로 공산당의 원로들을 포섭, 정치력을 얻음과 동시에 시진핑과 모종의 합의 끝에 그에게 권력을 몰아주었다.
덕분에 후진타오는 정치적으로 크게 고립됨과 동시에 그를 따르던 군구들도 등을 돌렸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북경 군구 하나와 공산당 하급 당원들의 지지뿐.
그나마 다행인 건 북경 군구에는 중국 최고의 정예인 백랑대가 속해 있다는 것과 하급 당원들의 지지로 인해 당장은 버틸 수 있다는 점이다.
리커창이 말한 대로 전면전은 가능성이 없다.
상하이나 베이징이 잿더미가 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전면전을 펼친다고 이긴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후진타오와 밤새 상의한 결과 실행 가능한 선택지는 딱 한 가지였다.
북경 군구가 백문 휘하의 군구들을 견제. 그들의 발을 묶어 놓고.
우리 쪽과 백랑대의 정예를 투입, 백문의 문도들을 깡그리 잡아들임과 동시에 시진핑의 뒤에 선 공산당의 원로들을 모조리 참살하는 거다.
일이 거기까지만 진행된다면, 후진타오는 곧바로 중국 내 백문의 모든 자산을 동결 및 압류할 수 있다.
그 말인즉슨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과 더불어 그들의 자금을 모두 빼앗을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쉽지만은 않다.
아니,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그래도 해야만 하는 이유는.
‘이대로 시진핑이 주석이 되면 중국이 백문의 것이 되니까.’
또한.
후진타오가 제시한 보상이 너무나도 달콤했다.
그렇기에 나는 후진타오와 손을 잡고 백문과의 오랜 악연을 끊어 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챙길 건 챙겨야겠지?’
곧바로 나갈 준비를 마치고 광진구에 위치한 인베스트먼트의 사옥을 찾았다.
“회장님!”
“엘!”
몇몇 직원이 나를 보고 어느 척을 하더니 경외가 담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첸에게 전염된 모양.
그들을 지나쳐 대표실에 다가가자 그의 비서이자 연인인 소홍이 아는 척을 해 왔다.
“어서 오세요.”
“잘 있었습니까?”
“그럼요. 식사도 거르고 일에만 빠져 사는 누구 때문에 걱정이 느는 것만 빼고요.”
“하하, 그건 제가 어떻게 해 줄 도리가 없네요.”
“알아요. 그냥 신세 한탄 좀 해 봤어요.”
잠시간의 대화를 나눈 소홍이 첸이 있는 대표실의 문을 열었다.
“흐흐흐흐.”
미친 사람처럼 모니터를 보며 웃고만 있는 첸.
그런 첸의 곁에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응? 엘!”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확인하고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말씀을 주시죠! 기다렸을 텐데….”
“바쁜데 괜히 시간 낭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한가한 사람이 찾아와야죠.”
사무실 소파에 앉으니 센스 있는 소홍이 커피와 간단한 다과를 가져왔다.
“피곤해 보이세요.”
“아, 잠을 좀 설쳤습니다.”
한숨도 못 자고 온 거지만 말이다.
후룩.
따뜻한 커피를 마시니 피로가 조금이나마 가셨다.
“요새 위안화 상황이 어떻죠?”
“250원 수준입니다. IMF가 끝나고서 절반 가까이 절하되었습니다.”
“더 내릴 기미가 있습니까?”
“아뇨, 당분간은 여기가 한계라고 봅니다. 아시다시피 내전이 난다는 소문 때문에 국외 자본이 들어가지 않고 있거든요.”
“그렇다면 잘됐네요. 엔화 포지션을 청산하고 위안화 풋 옵션으로 자리를 옮기세요.”
“네? 그렇지만….”
첸이 반문하려다 무언가 생각났는지 말을 멈추더니.
덜컹.
대표실의 문을 열고 모두에게 소리쳤다.
“엔화 포지션 청산하고 위안환 풋 옵션을 사들인다!”
웅성웅성.
그 말에 직원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웅성거렸지만.
“엘의 예언이 있었다.”
“예!!!”
첸의 한마디에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한편, 상하이에 있는 크리스털 플라자 호텔.
백문 소유이기도 한 이곳 스위트룸에서 장이량은 한 가지 소식을 들었다.
“형님의 의심이 맞았습니다. 백랑대 전원이 상하이에 침투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 후 주석이 드디어 미쳤구나. 감히 이곳을 노리다니.”
치익. 후우.
장이량이 담배를 집어 들고 불을 붙였다.
그가 앞에 있는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암살단의 수장인 장삼을 바라봤다.
“어찌했으면 좋겠느냐?”
“지금 바로 암살단 전원을 파견해 그들을 모두 척살하는 게….”
장삼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지 장이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내가 아버지처럼 암살이라도 당하면? 네놈이 문주 자리에 앉으려고?”
“…죄, 죄송합니다.”
아무리 형제라도 장이량이 얼마든지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걸 아는 장삼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런 장삼의 뒤통수에 대고 장이량이 말을 이었다.
“절반.”
“예?”
“암살단 절반을 데려가서 격살하도록.”
“단원들의 희생이 커질 겁니다!”
“반문은 죽여 달라는 뜻으로 알아듣겠다. 정 염려된다면 난징군구에서 총알받이라도 몇 데려가든지.”
척.
장이량의 서슬 퍼런 명령에 장삼이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했다.
‘천하의 개잡놈 같으니라고. 제 놈의 안위를 챙기느라고 힘들게 키운 암살단을 죽음으로 몰아넣다니.’
그렇게 문을 열고 명령을 이행하려는 장삼의 뒤로 장이량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가면서 희락 조장에게 애들을 올리라고 전해라. 몸이 찌뿌둥한 게 좀 풀어야겠어.”
으득.
여자를 부르라는 소리다.
명색이 백문의 무력을 책임지는 장삼에게 말이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장이량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장삼이었으나 목숨이 아까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장삼의 대답을 들은 장이량이 입가에 비웃음을 지었다.
며칠 뒤. 새벽.
상하이시 충밍현 헝샤섬에 백랑대의 위치를 파악한 장삼은 암살단 절반과 난징 군구에서 빌려온 군인들을 이끌고 나갔다.
부앙.
그들을 태운 보트가 바다를 헤치고 나가길 30분.
얼마 지나지 않아 헝샤섬 해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척. 척.
곧바로 암살 단원들이 배에서 내려 주위를 경계했다.
첨벙.
난징 군구의 군인들 역시 마찬가지.
그들을 지켜보던 장삼이 조용히 앞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몇 시간 후.
타아앙!
한 발의 총성을 시작으로 평화로웠던 헝샤섬 곳곳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타탕! 탕!
퍽!
백랑대원의 미간에 구멍이 뚫렸다.
“젠장!”
곁에 있던 다른 백랑대원이 재빨리 도망쳤지만.
퍽. 퍽.
사방에서 쏟아져 나온 총알이 그의 몸을 꿰뚫었다.
그 모습을 본 백랑대장이 분개하며 외쳤다.
“모두 C사이트로 가! 가서 무장을 챙겨!”
무장을 숨겨 놓은 장소로 이동하라는 명령에 백랑대원 모두가 움직였다.
하지만, 진격보다 어려운 게 후퇴라고 했던가.
암살단은 그들의 뒤를 집요하게 추격했고 희생은 커져만 갔다.
그렇게 일방적인 전투가 진행되기를 세 시간.
겨우겨우 대원들을 챙겨 C사이트에 도달해 무장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크윽.”
백오십에 달하던 백랑대가 오십도 채 남지 않았다.
백랑대장 리청풍이 분한 얼굴로 주위를 돌아봤다.
“정보가 어디서 센 거지?”
남은 오십의 백랑대원들을 보던 리청풍이 곧 절망의 빠진 목소리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젠장!”
백랑대가 어떤 이들인가.
중국 북경 군구 최정예인 동방신검에서 거르고 걸러 뽑은 최정예가 아니던가.
그런 백랑대가 후퇴 중에 삼분지 이가 죽어 나갔다.
그만큼 적들의 무력이 심상치 않다는 뜻.
리청풍은 죽음이란 단어를 떠올리다 머리를 흔들었다.
으득.
그래! 여기서 모두 죽어도 된다.
진정한 문제는.
‘우리가 모두 죽으면 주석 또한 죽는다.’
백문을 처단하라는 명을 받고 여기까지 왔다.
그런 백랑대가 모두 죽게 되면 백문이 과연 가만히 있을까?
그럴 리가 없지!
“모두 죽을 각오로 싸워라. 오늘 밤 저들의 목숨을 거두고 상하이로 들어간다.”
그렇게 리청풍이 결의에 찬 대사를 내뱉고 있을 때.
타아앙!
한 발의 총성을 시작으로.
탕. 드르륵. 타타탕.
사방에서 총성이 울려 퍼지더니.
저벅. 저벅.
멀리서 날렵하게 생긴 남자가 백문의 암살단장인 장삼의 시체를 둘러메고 다가왔다.
퍽.
그가 장삼의 시체를 리청풍 앞에 던지며 말했다.
“백문주 모가지 따러 가는 길이면 같이 가지.”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