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화
“장관님께서 여긴 어쩐 일로….”
“엘을 만나러 왔지. 흐흐.”
이제는 친구 같은 관계가 된 바실이 내 어깨를 감쌌다.
“말씀 주셨으면 제가 찾아뵀을 텐데요.”
“용건 있는 사람이 찾아오는 게 맞지 않겠어?”
그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각하께서 엘을 만나고 싶어 하시는데 가능하겠어?”
“지금요?”
“시간만 괜찮다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다.
21세기 차르가 부르는데 거절할 수 있을 리가.
거기다, 리비아에서의 도움을 생각한다면 찾아가 감사 인사를 하는 게 맞다.
“가시죠. 차르, 아니 각하께서 부르신다는데 얼른 가야죠.”
내 승낙에 바실이 반색하며 반가워했다.
잠시 후.
“오랜만일세.”
푸틴이 나를 반겨 줬고 나는 그가 내민 손을 공손히 맞잡았다.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이 친구도 참. 그렇게나 예의 차릴 필요 없다니까. 앉지.”
자리에 앉자 그가 홍차를 내어 줬다.
후룩.
역시나 이번에도 맛있었다.
내가 감탄한 얼굴을 하자 푸틴이 흡족한 듯 웃으며 내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100g에 16만 루블짜리니 맛없을 리가 없지.”
한국 돈으로 250만 원이 넘는 가격.
100년이 넘는 세월을 산 나도 들어 본 적 없는 가격이다.
“엄청나게 비싼 차로군요. 아껴 마셔야겠습니다.”
“아껴 마신다고? 으하, 으하하하.”
푸틴이 내 말에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한참 웃던 그가 진정되었는지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내게 이유를 설명했다.
“미안하네. 내가 아는 세계 제일의 부호가 홍차 따위를 아껴 마신다는 소리를 들으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네.”
“각하께서 오해하시는 거 같아 말씀드리지만, 제가 세계 제일의 부자는 아닙니다. 로스차일드나, 선덜랜드 같은….”
푸틴이 반박하려는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부는 가문의 것이고 자네의 부는 온전히 자네 혼자만의 것이 아닌가. 그러니 자네가 세계 제일의 부호가 맞지.”
“그래 봤자, 숫자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리비아에 가지 않았나. 석유와 국가라는 힘을 얻기 위해.”
역시, 이 사람은 내 생각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놀란 마음과는 별개로, 조그마한 두려움이 일어났다.
가장 강한 위치에 있으며 본인의 능력까지 뛰어나니, 절대 적으로 돌리면 안 되는 사람이다.
‘하긴, 그러니까 러시아를 수십 년이나 지배할 수 있었겠지.’
푸틴이 본론을 꺼내려는지 서류를 하나 내밀었다.
“우크라이나 프로젝트?”
제목을 보자마자 감이 왔다.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노리고 있다고.
내 등장으로 인해 러시아의 경제 상황이 좋아지자 그가 원 역사보다 빠르게 야심을 드러낸 듯 보였다.
“자네의 의견을 듣고 싶어 불렀네.”
“흐음….”
“왜? 어렵겠나?”
“나라를 빼앗는 일입니다. 절대 쉬울 리가 없죠.”
“그렇게 말할 줄 알았네.”
푸틴이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다 펜을 들어 한 줄기 선을 그었다.
우크라이나를 대각선으로 갈라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는 어떤가.”
“전체를 노리는 것이 아닌 동부와 남부만을 노리시는 거군요.”
“자네의 고향 속담 중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더군.”
동부와 남부만이라도 가져오겠다는 뜻.
하지만, 그것 역시도 쉬운 일이 아니다.
섬 하나의 영위권을 놓고 전쟁을 벌이는 게 국가다.
하물며, 국토의 절반이나 빼앗는 일이 쉬울 리가.
제갈량을 보는 유비처럼 나를 보는 푸틴의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답을 주기로 했다.
2014년의 푸틴이 단행한 크림반도의 병합을 참고해서 말이다.
“각하, 차라리, 실리를 챙기시지요.”
내 질문에 푸틴이 눈살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화가 나서가 아닌, 처음 듣는 말 때문에 고뇌에 빠진 얼굴이었다.
“실리라…. 어떤 걸 말하는 건가?”
“각하께선 우크라이나를 차지해 서방 국가들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싶으시겠죠.”
“정확하네.”
“또한, 크림반도를 얻어 흑해로의 진출도 모색하실 테고요.”
“맞네.”
“그럼 크림반도를 독립시킨 뒤 병합해 버리시지요. 그렇게만 하더라도 각하의 목적 대부분은 달성될 겁니다.”
“독립이라?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드는군.”
의문을 품는 그에게 쐐기를 박았다.
“어렵지 않습니다. 당근을 들고 동부에 사는 친러 성향의 국민을 자극하면 될 일입니다.”
“당근이라면 어떤 걸 말하는 건가?”
나는 그에게 검지와 엄지를 이은 손을 보여 주었다.
“돈 아니겠습니까? 더 나은 삶을 미끼로 흔들면 분명 넘어올 겁니다. 마침, 좋은 예시가 동부에 있지 않습니까?”
“그렇군!”
푸틴이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를 보는 그의 눈빛에 신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자네를 부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군. 자네가 아니었다면 누가 이런 생각을 해내겠는가.”
‘2014년의 당신.’
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조용히 입을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기뻐하던 그가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는 듯이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내일 있을 승전 기념식 파티의 초대장이라네. 자네가 마침 모스크바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파티에 초대하려고 불렀는데 그만 깜빡했군.”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타국에 있었던 탓에 최대한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참석하겠습니다.”
차르의 초대를 거절할 수야 없는 법.
공손히 그가 건네는 초대장을 받았다.
그가 내 생각을 짐작하는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바쁜 건 알지만, 참석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걸세. 각국의 고위층을 만날 몇 안 되는 기회가 아닌가. 그리고.”
“…….”
“중국의 상무위원들도 참석하기로 했다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뻔했군요.”
나와 중국의 관계를 아는 푸틴이 흥미진진한 눈빛을 했다.
그날 저녁.
초대를 받아 바실 장관의 자택을 방문했다.
그와 그의 아내가 나를 맞아 주었다.
“장관님.”
“오! 어서 와.”
빈손으로 오기 뭐해 요원들과 함께 산 선물을 건넸다.
바실에게 줄 시계와 그의 가족들을 생각하며 산 상현 전자의 스마트폰들이었다.
“그냥 오지. 이렇게나 들고 왔어?”
“별거 아닙니다. 저번에 보니 손목이 영 허전해 보여서 하나 구했습니다.”
그의 안내를 받아 식탁으로 향하니 멋들어진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집사람이 자네가 온다는 소리를 듣고 직접 차린 거야. 많이 들어.”
“이거 생각지도 못한 호사를 누리는군요.”
내 아부에 그의 아내가 뿌듯한 듯 내 접시에 음식들을 담아 주었다.
“정말 맛있습니다.”
“그래요? 많이 들어요.”
그렇게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바실과 단둘이 술자리를 가졌다.
내가 푸틴에게 해 줬던 조언의 내용을 들었는지 그가 여러 가지를 묻고 나는 그에 대한 답을 해 주었다.
그리고.
“사실, 나는 반대하는 입장이야.”
“반대요?”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니 바실이 피식 웃으며 자기 생각을 피력했다.
“생각해 봐.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석유와 가스를 팔아서 연명하던 나라였어. 그걸 엘이 와서 바꿔 줬고.”
“…….”
“그런데, 이제 겨우 먹고살 만해지니까 우크라이나라니. 너무 리스크가 크다는 생각 안 들어? 과연 서방 세력이 우리를 가만둘까?”
“크림반도까지라면 그들도 용인할 겁니다. 독립 합병이란 방법도 그래서 제시한 거고요.”
원 역사에서도 크림반도를 병합한 푸틴을 욕하기는 했지만.
제재를 가하거나 하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겪어 보지 않은 미래라서일까?
바실이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푸틴을 비판했다. OR 푸틴의 선택을 비판했다.
“아니야. 이건 위험한 선택이야. 각하의 머리가 이상해진 거라고.”
“바실! 위험한 생각은 그만두세요.”
“알았어. 알았어. 없는 사람 욕도 못 하나?”
바실의 농담에도 웃음이 나지 않았다.
푸틴의 최측근으로 분류된 그가 이런 생각을 품고 있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었으니까.
“바실.”
“응?”
“어디 가서 절대 그런 소리 하시면 안 됩니다.”
“하하. 알아. 각하께서 나를 가만둘 리 없겠지. 그저 자네 앞이니까 한 소리야.”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가정이 맴돌았다.
그와 푸틴이 파국을 맞게 된다면?
십중팔구 바실은 실각할 거다.
그의 오른팔 비고르 역시 마찬가지일 거고.
SC의 행보에 제동이 걸릴 수도 있는 일이다.
아무리 푸틴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하고 SC가 러시아에 필수 불가결한 존재라고 하더라도.
바실을 후원했던 우리를 고운 눈으로만 보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건 곧 앞으로의 싸움에서 최고의 동맹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의 생각을 바꿔 놓기 위해 계속해서 그를 설득했다.
그런 내 노력이 통했는지, 바실이 수긍했다.
“그래, 이번만큼은 자네 말을 듣지.”
“고맙다고 해야 합니까?”
“그럴 리가.”
“많이 드셨습니다. 내일 기념 파티에서도 드셔야 하니 이만하죠.”
“그러지.”
푸틴에게 반항하는 그의 모습을 처음 봐서일까?
바실의 눈에서 전과 다른 야망을 느꼈다.
다음 날인 5월 8일.
척. 척. 척.
붉은 광장에서 열리는 전승 기념식에 참석했다.
광장에는 열병식에 참여한 군인들로 가득했고 단상 위에는 수천 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
‘강군이군.’
열병식을 보다 보니 나도 모르게 감탄이 흘러나왔다.
손발만 척척 맞추는 제식 따위가 아닌 그들의 눈빛과 얼굴에서 투지를 느꼈기에 감탄했다.
그렇게 열병식이 마무리되자 푸틴이 연설을 시작했다.
[TV나 매체를 통해 들리는 소리 구분 기호는 전승 기념일을 축하합니다. 전 세계의 운명이 걸린 위대하고 역사적인 승리…. 우라! (만세)]
연설을 마친 그가 외치자 열병식에 참여한 군인들이 함성을 터뜨렸다.
“우라! 우라!”
곧 광장이 함성으로 가득 찼다.
그들이 단상 앞에서 경례와 함께 행진을 시작했다.
푸틴은 단상에 서서 그들의 경례를 계속해서 받았다.
육군, 공군, 해군, 특수 부대의 행진이 끝나자 곧바로 기갑 부대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T-34를 시작으로 러시아의 구형 전차부터 최신형 전차들이 계속해서 단상 앞을 지나갔다.
이어지는 전략군의 행진.
세상을 몇 번이나 파멸시킬 미사일들이 무서운 위용을 뽐냈다.
그것들을 보다가 문득 욕심이 생겼다.
‘가지고 싶다.’
돈은 충분하다. 더 많은 돈을 벌 기회 역시 남아 있다.
항상 아쉬웠던 건 무력이었다.
훈련된 정예 병력은 충분했지만, 전투기나 전차, 그리고 미사일 같은 무기는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
만약, 저것들을 가지고 있었다면 리비아에서 그 고생을 할 이유도 없었을뿐더러 국가 단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이너서클과의 싸움에서 밀릴 이유가 없다.
‘역시 국가를 가져야 해.’
개인의 자격으론 저런 무기들을 구할 수는 없다.
오직 국가의 자격으로만 구할 수 있다.
회귀 2회차에서부터 가졌던 생각에 확신이 드는 순간이었다.
어느 정도 그걸 노리고 리비아 내전에 참가하기도 했고 말이다.
상념에 빠져 있을 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엘이라고 불리는 작자인가?”
목소리에서부터 거만함이 느껴졌다.
중국 상무위원회 부총리인 리커창이었다.
“호구들의 우두머리군.”
내 말에 그가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하! 오만방자하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군.”
“틀린 말은 아니지 않아? 병신처럼 나라 곳간 싹 털렸잖아.”
“미친놈.”
“그런 얘기 많이 들어.”
“대중화를 적으로 돌린 것을. 후회하게 될 거다.”
“얼마든지.”
분위기가 고조되었을 때 반가운 얼굴이 끼어들었다.
“오! 리 부총리가 아닙니까? 이거 오랜만이군요.”
이현준의 아버지이자 한국의 총리인 이지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