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화
“젊군.”
송양 자동차 그룹의 회장 장호철.
그가 나를 보자마자 내뱉은 첫마디는 내 젊음에 관한 감탄사였다.
“몰랐나?”
항상 느끼는 거지만, 나는 반골이다.
장호철이 반말로 지껄였기에 나 역시 똑같이 대해 줬다.
“흐음.”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래도 내가….”
“나이 얘기 할 거면 하지 마. 서로 존중할 사이는 아니잖아?”
“허, 참.”
그가 어이없어하며 말을 이었다.
“내 딸아이의 뺨을 때렸다고 들었네만.”
“예의 없게 굴길래 교육 좀 해 줬지.”
“천하의 이신후 회장이 여자에게 손을 대는 사람인지는 몰랐군.”
“맞을 짓 했으면 여자건 남자건 맞아야지. 아! 그래도, 여자라서 힘 조절은 했어. 잘못해서 죽으면 안 되잖아?”
“그래서, 남의 집 자식 이를 부러뜨린 게 잘했다는 뜻인가?”
“왜? 자식 교육 제대로 못 시킨 당신 이를 뽑아 줄까?”
으득.
내가 한마디도 지지 않자 장호철이 이를 악물었다.
시간 낭비 하기 싫어 분개하는 그에게 나는 본론을 강요했다.
“본론이 뭐야? 사과 한마디 받자고 하는 건 아닐 테고.”
“딸이 맞고 왔는데 가만히 있을 아버지가 있나? 당연히….”
“한 번만 더 말 돌리면 오늘 만남은 그대로 끝이야. 나는 시간이 많은 사람이 아니거든.”
협박성 멘트에 장호철이 헛기침을 하며 본론을 꺼냈다.
“자네가 러시아 쪽 인맥이 두텁다는 걸 알고 있네.”
“그래서?”
“사과의 의미로 자네의 인맥을 소개받고 싶네. 그렇게만 해 준다면 이번 일은 넘어가도록 하지.”
“허.”
맥 빠지는 그의 말에 헛웃음이 지어졌다.
물론, 러시아의 푸틴이 가벼운 인맥은 아니다.
어떻게 사용하냐에 따라서 송양 자동차에 있어선 최고의 기회가 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싸우는 걸 포기하고 바로 실리를 찾는 그를 보니 실망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너무 쪼잔하지 않은가.
이강진 회장이 아닌, 다른 거인을 만난다는 생각에 약간의 기대를 가졌던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차라리, 싸우자고 하지 그랬냐….’
그랬다면, 재미라도 있었을 텐데.
혹시 아는가.
싸우다 친해져서 이강진 회장처럼 도움을 주고받을 사이가 될지.
“대신, SC 오션이 짓고 있는 러시아 공업 단지에….”
“입주해 주겠다? 일자리를 창출한 걸로 러시아에 어필할 수 있도록?”
“맞네.”
나는 그의 제안에 두 글자로 답했다.
“지랄.”
“뭐?”
“천하의 송양 회장이 겨우 이런 남자였다니, 찾아온 내가 병신같이 느껴지는군.”
쾅!
장호철이 분노에 찬 얼굴로 책상을 내리쳤다.
“뭐라?!”
“마음대로 해 봐.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더는 그와 대화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가 분노한 찬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대로 떠나면 후회할 거다.”
“퍽이나.”
그대로 송양 자동차의 사옥을 떠나 대기하고 있던 차를 타고 SC의 사옥으로 향했다.
기다리고 있던 신종민이 커피를 타 왔다.
“잘 만나고 오셨습니까?”
“네, 뭐.”
“그쪽에서 원하는 게 뭐랍니까?”
“러시아 쪽 인맥을 원하더라고요.”
“송양에서 동유럽 시장을 원하나 봅니다.”
신종민의 말을 듣자 한 가지 사실이 떠오름과 동시에 장호철이 왜 러시아 인맥을 요구했는지 이해되었다.
‘이맘때쯤 송양이 러시아에 진출했다.’
안 그래도 러시아 진출을 타진하려던 차에 건수 하나 잡았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런 차에 내가 그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무시했으니 분노할 수밖에.
“차라리 잘됐습니다. 고위급 공무원 몇 명 소개해 주고 퉁치시죠?”
“네?”
“말 그대롭니다. 송양가와 싸워 봤자 얻는 게 없지 않습니까? 사람 좀 소개해 주고 넘기자는 말입니다.”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내 말을 들은 신종민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회장님, 서, 설마?”
“후회할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요?”
“얼마든지 해 보라고 하고 나왔습니다.”
“…일을 키우셨군요.”
맞는 얘기다. 신종민의 말처럼 사람 몇 명 소개해 주고 퉁쳐도 되는 거니까.
하지만, 내 성미에 맞지 않았다.
만약 타협하며 살아왔으면, 회귀 1회차에서 백문의 제안을 받았을 때 거절하지 않았을 거다.
그런 나를 오랜 기간 겪어 왔기 때문인가?
신종민이 오히려 후련한 얼굴을 했다.
“사실,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회장님이 어떤 분이신데요.”
“…….”
뭐지? 드디어 미친 건가?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도 듭니다. 안 그래도 저번 인수 건으로 인해 전경련에서 말이 많이 나오거든요.”
“그래요?”
“이번 기회에 SC가 어떤 곳인지 보여 줘야겠습니다. 아니, 회장님 스타일대로 완전히 박살 내 앞으로 SC란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게 만들겠습니다.”
내가 언제 그랬다고….
“회장님은 가셔서 회장님의 일을 하십시오. 이번 일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당분간 좀 바빠지겠군요.”
***
송양 자동차 그룹.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자동차 기업이며, 생산량 기준으로 세계 5위의 대기업이다.
장호철이 전대 회장이자 아버지인 장영주 회장에게 물려받을 때만 하더라도 이만큼의 성세는커녕 곧바로 찾아온 IMF에 무너질 뻔까지 했지만.
특유의 뚝심과 과감함으로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자동차 기업이자, 세계 5위의 생산량을 가진 완성차 회사로 키워 냈다.
그런 장호철이 자부심을 가지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들이닥친 엔저에 그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경쟁자인 도요타가 엄청난 가격 경쟁력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
이에 장호철은 기획실의 목을 졸랐다.
그렇게 각종 경영 이론으로 무장한 기획실에서 전략 한 가지가 나왔다.
러시아에 공장을 지어 러시아와 유럽 시장을 확보하자는 기획서.
장호철은 옳다구나 싶었다.
오랜만에 그의 본능이 꿈틀거릴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송양 자동차의 러시아 진출을 위해 여러 방면으로 조사한 결과.
러시아에 SC 오션이 진출했고 대규모의 산업 단지를 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보통 해외 진출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다른 그룹과는 달리, SC는 철저히 숨겼기에 그제야 알게 된 것이다.
이에 장호철은 SC의 도움을 받기로 마음먹었다.
문제는.
교류가 없다는 것이다.
ST가 인수되기 전에야 하진철과 형 동생 하는 사이였지만.
SC로 사명이 바뀌고 나서는 전혀 교류가 없다.
그렇다고 자존심을 접고 부탁하기엔 장호철이 가진 프라이드가 너무 높았다.
자신이 재계의 어른이란 생각이 팽배했던 탓이다.
그러던 차에 장호철의 딸 장미령이 누군지도 모르는 놈에게 뺨을 맞아 이가 다섯 개나 부러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연히 장호철은 분노했다.
감히 어느 누가 송양가의 여식을 건드리는가.
그는 보복을 결심하고 범인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아낸 범인의 정체에 그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SC 그룹의 오너인 이신후.
바이러스 사건으로 재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철저하게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빌미로 러시아에 진출할 발판을 만들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직접 만나 본 이신후는 미친놈이었다.
도움은커녕 모욕만 들었기에 분노한 장호철은 전화기를 들어 누군가에게 연락했다.
“나다.”
***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고즈넉한 저택.
“어서 오게.”
이강진 회장의 초대를 받고 도착했다.
“어서 오세요.”
제니 역시 함께 있었는데 앞치마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식사 거리를 준비하는 듯 보였다.
“둘이 결혼하라고 하지 않을 테니 편안히 있다 가게나.”
“아빠!”
이강진 회장의 농담에 제니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녀가 부끄러워하며 총총걸음으로 저택으로 돌아갔다.
“앉지.”
“예.”
자리에 앉자 저택의 사용인이 시원한 음료수를 가져다주었다.
목이 마르던 차에 한 모금 크게 들이켰고.
“콜록, 콜록.”
모조리 뱉어 버렸다.
“큭큭큭.”
이강진 회장이 평소 체통은 쓰레기통에 가져다 버린 듯이 배를 잡고 웃었다.
“이거 뭡니까?”
“고삼차라네. 건강에 좋은 음료지. 푸흐흐.”
“재밌으십니까?”
“그럼, 재밌지. 항상 로봇처럼 딱딱하게 구는 자네가 당황한 모습을 보니 속이 다 시원하구먼.”
“저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최우현 실장이 큭큭대며 말을 보탰다.
적당히 웃은 이강진 회장이 본론을 꺼냈다.
“수진이 때문에 장가 놈하고 트러블이 생겼다고?”
“트러블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조심해야 할걸세. 장가 놈, 보통이 아니거든.”
“조심할 게 있겠습니까? 힘으로 덤비면 싸워 주고 돈으로 덤비면 눌러 주면 그만입니다.”
이강진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지. 자네가 일본 투자에서 번 돈만 들여와도 상장 기업의 절반은 살 수 있으니까.”
일본에서의 내가 번 돈을 알고 있음을 암시하는 이강진 회장의 말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아아, 걱정하지 말게. 자네의 진정한 정체를 알고 있으니 알아차린걸세. 그냥 이신후라는 사람만 알고 있었으면 절대 몰랐을걸세.”
“제 정체라고 하면….”
“미국의 월가를 털어먹고 중국에 IMF를 불러일으킨 전설적인 투자자인 엘이 자네의 진정한 정체가 아닌가.”
“제니가 말해 준 겁니까?”
“설마, 저 아이는 일 이야기는 내게 단 한마디도 하지 않네. 그저 나 혼자 알아봤을 뿐이야.”
내 정체를 짐작한 이유에 대해 흥미가 일어났다.
눈치를 챘는지 그가 내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한 가지 의문이 들더군. SC 오션의 재무 구조가 너무 깨끗해.”
“재무 구조요?”
“중공업 계열의 회사가 그럴 수가 없거든. 배 한 척 만드는 데 돈이 좀 깨지나? 당연히, 대출로 만든 다음 팔아서 갚는 거지.”
“…….”
“결론은 하나 아니겠나. 자네가 다른 주머니를 가지고 있다는 거지. 그것도 엄청나게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SC 오션이 경영을 잘해서 그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상현 중공업과 비슷한 매출 규모를 가진 SC 오션이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이강진 회장이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행한 지방 기업들의 인수가 결정적이었네.”
“그건 HS 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돈으로 진행했습니다.”
“나를 바보로 아나? 어느 은행이 담보보다 5배나 큰돈을 빌려주겠나. 필시 자네가 끼어든 걸 테지.”
뭐 하나 반박할 말이 없었다.
나이가 들수록 지혜로워진다는 말은 바로 이강진 회장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그다음부터는 쉽지. 자네가 이동한 국가의 돈의 흐름만 보면 되니 말이야. 자네가 미국에 있었을 시기와 홍콩에 있었을 시기, 그리고 일본에 있었을 시기를 분석하니 답이 나오더군.”
“…정답이십니다.”
“허허허, 최 실장 봤나? 천하의 엘이 감탄하는 거. 내가 아직 이 정도야.”
최우현 실장이 웃으면 답을 했다.
“역시 회장님이십니다.”
이강진 회장이 잠시 웃다가 할 말이 남았는지 목소리를 깔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장가 놈을 얕보지는 말게.”
내 정체를 알고 있음에도 하는 경고에 궁금증이 일었다.
자본의 세계에서 돈이면 안 되는 것이 거의 없는 걸 알고 있는 이강진 회장의 경고이기 때문이다.
“송양에는 역사가 있어. 상현 못지않은.”
“역사 말입니까?”
“우리가 사람을 키워 정계에 심었다면 그쪽은 재계에 심었네.”
“…….”
“아마, 장가 놈 한마디면 재계의 회장들뿐만 아니라 언론사의 사주들까지 자네를 적대시하게 될걸세. 자칫하면 자네 주위가 망가질 수도 있을걸세.”
“도와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내 요청에 이강진 회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장가 놈과 성격이 달라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다네.”
도와주고 싶어도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물고 뜯는 싸움, 익숙합니다. 저희식대로 싸워 보죠. 대신, 일은 좀 커질 수는 있겠지만.”
“패기 넘치는구먼. 젊었을 땐 그래야지.”
이강진 회장이 더욱 마음에 드는 얼굴을 했다.
“식사하세요!”
제니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에 이강진 회장의 얼굴에 웃음이 만발하는 게 보였다.
잠시 웃던 그가 나지막이 내게 말했다.
“고맙네. 저 아이의 속을 풀어 줘서.”
“회장님의 딸이기도 하지만, 제 소중한 동료이기도 하니까요.”
“그냥 둘이 결혼하면 안 되나?”
“돌아갈까요?”
***
다음 날.
이강진 회장의 경고가 떠오르는 일이 생겼다.
[SC 오션이 환투기를 했다는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현장에 나가 있는 정호영 기자 연결하겠습니다.]
[정호영입니다. 제 뒤에 보이는 이곳은 최근 SC 오션에서 사들인 러시아 산업 단지입니다. SC 오션은 금융 위기로 국내에 외환이 모자랄 때, 해외에서 번 돈을 빼돌려 이곳 러시아 동부에 대규모의 부동산 투기를….]
“참나.”
띠리리리.
어이가 없어 웃음이 지어지던 차에 전화벨이 울렸다.
신종민이었다.
“뉴스 봤습니다.”
-걱정하실까 봐, 전화했습니다.
“신 회장이 알아서 할 텐데 그딴 걸 뭐 하러 합니까.”
-곧바로 송양 시멘트와 산업개발 그리고 유통의 인수를 진행하겠습니다.
“인수요?”
-한 대 맞으면 서른 대로 갚으라는 게 회장님의 지론 아니었습니까? 제대로 갚아 주겠습니다.
그런 적 없지만, 전장에 나가는 선봉장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는 없는 법.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신종민의 자신 있는 대답을 듣고 한 시간쯤 지났을까?
지이이잉.
문자가 왔다.
[산업개발 지분 4.9%, 시멘트 지분 9.7% 확보 완료.]
자본주의의 악당, 신종민다운 빠른 움직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