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4화
쿵.
장미령이 그대로 쓰러지며 파티장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이, 이게….”
제니가 믿기지 않는지 말을 내뱉지 못했다.
나는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에 묻은 피와 침을 닦아 냈다.
“미령아!”
장미령의 지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인파를 헤치고 달려왔다.
장미령의 상태를 확인한 그가 대뜸 달려들었다.
“이 새끼가!”
슬쩍 피한 후,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자 그가 바닥에 볼썽사납게 나 둥글었다.
쿵.
일어나지 못하게 그의 가슴께를 밟았다.
“큭.”
남자가 두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봤다.
제니가 슬그머니 다가와서 이들의 정체를 알려 줬다.
“송양 자동차의 막내 장미령이에요. 남자는 대양 건설 상무인 지현우고요.”
송양 자동차란 이름을 듣자 제니를 대하는 장미령의 태도가 이해가 되었다.
“저 여자가 제니에게 이런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죠?”
“뒤에서 말한 건 들었고 이렇게 직접 들은 건 처음이에요. 그나저나 발을 좀….”
제니의 말에 지현우의 가슴께에 올린 발을 치웠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향해 무언가 말하려던 때.
“뭣들 하고 있는 거죠?!”
오늘 파티의 주인공, 고하영이 다가왔다.
홀로 온 것이 아닌 경호원들을 대동한 것으로 보아 상황을 대충 파악하고 온 듯 보였다.
그녀가 자신의 파티를 망친 나와 제니를 노려봤다.
“어떻게 된 일이죠?”
“다 알고 온 거 아닌가?”
으득.
그녀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오늘 일, 그냥 넘어가기 힘들 거예요.”
겁을 주려는지 같잖은 협박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당신입니까? 우리 아가씨를 저렇게 만든 게.”
연락을 받았는지 장미령이 데려온 수행원들이 내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감히, 송양가의 금지옥엽을 건드리고도….”
“진부한 대사는 할 필요 없고, 조만간 찾아갈 테니 그동안 딸 교육이나 잘 시키라고 장호철 회장에게 전해.”
그들의 말을 자르고 파티장에 참석한 면면을 둘러봤다.
“한심하군. 자신의 힘으로 뭐 하나 이룬 거 없는 주제에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꼴이라니.”
“당신!”
내 말에 고하영이 발끈하는 게 보였다.
파티를 망친 것도 모자라 자신이 초대한 손님들에게 독설까지 했으니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파티를 망쳐서 미안하군. SC의 신종민 회장에게 연락하면 섭섭지 않게 보상해 줄 거야. 돈이든, 사업이든 간에.”
내 정체를 짐작했는지 고하영이 놀란 눈을 했다.
나는 파티장을 나서기 위해 제니의 손을 잡아끌었다.
“잠깐.”
장미령의 수행원 중 하나가 내 앞으로 막아섰다.
덩치가 꽤 큰 것으로 보아 경호 업무를 맡은 듯 보였다.
“아가씨께 사죄하기 전까지 이곳을 떠나실 수 없습니다.”
그가 내뱉는 경고를 무시하고 그대로 그를 지나치려는데.
척.
그가 자신의 몸으로 다시 한번 내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 주세요.”
그러자, 고하영이 장미령의 경호원에게 지시했다.
“하지만, 저희 아가씨가….”
“미령이가 일어나면 제가 설명할 테니까 지금은 그냥 비켜 주세요. 미령이도 이 이상 일이 커지는 것을 바라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 경호원이 길을 비켰다.
나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지나갔다.
“이번 일로 짤리거나 하면 SC 시큐리티로 연락해. 특채로 받아 줄 테니까.”
제니가 호텔을 나오자마자 앞에 서 있는 택시를 잡아탔다.
“최우현 실장에게 연락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왕 망친 거 끝까지 놀아 보죠. 뭐 하세요? 빨리 타요.”
그녀의 새침한 말에 나도 모르게 택시에 올라탔다.
“경복궁이요.”
잠시 후.
경복궁 정문에서 내린 제니가 당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예약해야지만 야간 입장이 가능하다니.”
“그냥 주변이나 걷죠. 궁 밖 돌담길도 꽤 운치 있지 않습니까?”
“좋아요.”
휘이이잉.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그녀에게 외투를 벗어 주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이렇게 둘이 있는 건 뉴욕에서 처음 만났을 때를 제외하고 처음이네요.”
“아! 맞네요. 그때 커피!”
우리는 옛일을 생각하며 킥킥대며 웃었다.
“그때 엘의 옷에 커피를 쏟지 않았다면 저는 한국으로 오지도 아버지와 다시 만나지도 않았겠죠?”
“천륜이라는 게 있으니 한 번쯤이라도 찾아오지 않았을까요?”
“아뇨, 절대 오지 않았을 거예요. 평생 아버지를 원망만 하면서 살았거든요.”
“그렇습니까?”
“제가 하버드 경제학과에 간 이유를 말씀 안 드렸죠?”
“네.”
제니가 하늘에 떠 있는 달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말해 줬어요. 아버지는 살아 있고 한국에서 상현 그룹이라는 대기업을 이끌고 있다고요.”
“…….”
“화가 나더라고요. 엄마하고 둘이 살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았거든요.”
이강진 회장에게도 듣지 못한 이야기다.
“원망과 복수라는 마이너스한 감정으로 미친 듯이 공부만 했어요. 꼭 성공해서 복수하겠다는 마음으로. 그래서, 하버드를 졸업하고 JP모건에 입사한 거예요.”
“왜 은행이었습니까?”
“나중에 CEO가 돼서 상현 그룹을 인수하려고 했거든요. 뭐, 나중에는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지만요.”
“그렇긴 합니다.”
“그리고, 막상 한국에 돌아와서 아버지를 만나고 보니 오해였다는걸 깨달았어요.”
그녀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다 문득 생각이 났는지 내게 물었다.
“아까 경복궁에 추억이 있다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아.”
“뭐예요? 사귀던 애인이랑 여기서 데이트? 아니면 이별의 장소?”
“별거 아닙니다.”
“그렇게 반응하면 더 궁금한 거 몰라요? 그냥 말해 줘요.”
“어릴 때가 생각나서 바라봤습니다.”
“소풍 오셨던 기억인가 봐요?”
그녀의 말에 100년도 훌쩍 지난, 아주 어릴 적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어렸을 적에 어머니랑 이곳에 같이 온 적이 있습니다. 오랜만에 나들이하러 가는 마음에 신이 났던 것 같습니다. 워낙 가난하게 자라 어디 놀러 가는 일이 거의 없었거든요.”
“그래요?”
“한참 구경하다 어머니가 제게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쥐여 줬습니다. 그리고 그러더군요.”
“…….”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설마?”
뻔한 순서에 제니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맞습니다. 그 뒤로 어머니를 다시 볼 수는 없었죠. 그대로 보육원에 갔고 그곳을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
이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회귀하기 전과 회귀 1회차에서는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뭐, 옛날 일이죠.”
분위기가 서먹하게 바뀌었다.
잠시 돌담길을 걷다 제니가 무언가를 말하려는지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저기….”
그렇게 얼굴이 붉어진 제니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할 때.
우리가 타고 왔던 차가 나타났고 최우현 실장이 조수석의 문을 열고 내렸다.
“여기 계셨군요.”
“어머? 여기 어떻게.”
“제가 연락해 뒀습니다. 경복궁 근처에 있으니 데리러 오라고.”
최우현 실장이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제니가 무언가를 말하려다 한숨을 쉬며 차에 탔다.
“밤도 늦었으니 수진 씨만 데려가시죠. 저는 따로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떠나는 차의 창문 바깥으로 제니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가 입 모양으로 무언가를 말했다.
줘도 못 먹냐고.
***
파티에 다녀온 후, 일상은 계속되었다.
리우의 딸 줄리아는 얼마 전 심장 이식 수술을 받았다.
결과는 대성공.
국내 최고의 심장 전문의가 셋이나 붙어 이뤄 낸 결과였다.
덕분에 리우는 줄리아의 안정기가 찾아올때까지 병원에 붙어 있기로 했는데.
워낙 임팩트가 강렬한 놈이 눈에 보이지 않자 조금 심심하긴 했다.
최효석은 시큐리티 요원들을 두고 MARS의 요원들과 아프리카로 떠났다.
아무래도, 본인이 지휘할 부대이기에 손발을 맞춰 보려 하는 모양.
한 가지 걱정되는 건.
‘영어도 못 하는데 어떻게 손발을 맞춰 본다는 거야?’
전쟁터나 다름없는 곳에 통역사를 데리고 갈 수도 없는데 말이다.
얼마 전, 지주 회사인 ㈜SC의 대표이사로 승진한 이현준은 그동안 눈코 뜰 새는커녕 잠을 잘 시간도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얼마 전, 인수한 23개 기업의 실사와 감사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쪽에서 협조만 제대로 해 준다면야 진즉 끝날 일이긴 하지만, 해먹은 놈이 협조할 리가 없지 않은가.
덕분에 이현준과 감사실 직원들은 맨땅에 헤딩하듯이 감사를 진행했다.
워낙 위태로워 보였기에 나는 특별 조처를 내렸다.
“공문 날리십시오.”
“공문이요?”
“감사에 협조하지 않은 임직원들은 즉시 해고한 뒤, 1원이라도 해먹은 정황이 발견되면 무조건 형사 고발과 민사 소송을 같이 진행한다고 날리세요.”
“그, 그렇게 하면 해당 회사들의 노조가 파업을 결의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도 같이 날리세요. 감사에 불만을 가져 파업할 시 해당 사업장을 러시아로 이전한다고요.”
이러한 강력한 조치를 날리고 이현준의 얼굴이 한결 펴졌다.
자신의 비리를 감추기 위해 감사를 방해하면 해고 뒤 소송이 들어오는 반면.
조용히 자수하고 해먹은 돈만 가져다 놓으면 해고로만 끝났기 때문이다.
첸은 점점 허리와 목이 굽어 갔다.
그의 나이 삼십 대 초반.
굽을 나이는 절대 아니지만.
깨어 있는 모든 시간 동안 모니터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굽지 않을 수가 있나.
그렇다고 쉬엄쉬엄하라고 충고하기도 애매한 게.
“흐흐흐흐.”
그가 높아져 가는 SC 인베스트먼트의 투자 수익을 보며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기 때문.
‘뭐, 본인이 행복하다면야.’
엔저에 투자한 SC 인베스트먼트의 현재 수익률은 약 170%.
2,000억 달러가 넘는 돈을 투자했으니 이번 투자만으로도 웬만한 국가의 일 년 예산이 넘는 돈을 벌어들였다.
또한, 이제 몇 개월만 기다리면 일본의 총리가 바뀌며 본인의 이름을 딴 전격적인 인플레이션 정책을 펼치게 된다.
그 말은즉슨, 엔화가 더욱 가파르게 하락한다는 뜻이며.
그건 곧 SC 인베스트먼트가 막대한 수익을 거둔다는 얘기가 된다.
신종민은 평온 그 자체의 삶을 살고 있다.
그렇다고 그가 평범하고 한가한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동안 워낙 바쁜 일상을 보내 왔기에 이제는 완벽히 적응했다고 보일 뿐이다.
하루 날 잡고 옆에서 본 결과.
신종민은 가히 업무 분쇄기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양의 업무를 처리했다.
중공업, 상선, 조선이 합쳐진 본사의 업무부터 인수한 기업들의 사정을 살피고 러시아 산업 단지까지 확인한 후에야 퇴근한다.
살인적인 업무 처리량에 나도 모르게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회장님.”
그런 신종민이 어디선가 걸려 온 전화를 받고 당황한 얼굴로 나를 불렀다.
“왜요?”
“호, 혹시 송양 자동차 장미령 본부장이랑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
신종민의 말에 얼마 전, 제니와 함께 간 파티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버릇이 없길래 혼내 줬습니다.”
“이가 다섯 개나 부러질 정도로요?”
“허약하군요.”
내 대답에 신종민이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방금, 송양 자동차의 장 회장이 항의 전화를 했습니다.”
“뭐라고요?”
“뭐겠습니까? 당장 사과하라고 난리죠.”
당황하는 신종민에게 어제 장미량이 제니에게 했던 말을 읊어 주었다.
“죽일 년이군요.”
“맞습니다.”
“그쪽에서 단초를 제공했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될 여지는 많습니다. 이쪽은 증거가 없고 그쪽은 넘치니까요.”
“문제라면요?”
“장호철 회장, 전경련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가뜩이나 우리를 견제하려는 이들이 많은 곳이죠.”
속이 타는지 신종민이 앞에 놓여 있는 물을 마시고 말을 이었다.
“가뜩이나 우릴 견제하려고 하는 곳이니, 건수 하나 크게 잡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이번 일을 언론에 퍼트릴지도 모르구요.”
“얼마든지 하라고 하십쇼.”
“네?”
“맞을 년 때려 줬는데 뭐가 부끄럽겠습니까? 일이 이렇게 커질 줄 알았다면 두 대 때려 주는 건데.”
“회장님!”
“그리고, 우리가 송양, 아니, 전경련 따위를 두려워할 군번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번에 일본에서 벌어들인 돈만 하더라도 송양 자동차 정도는 인수하고도 남는다. 그것도 아주 많이.
신중한 성격의 신종민이 반박하지 못했다.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
“그래도 한번 만나는 봐야겠죠?”
“누굴 말씀이십니까?”
“누구긴 누굽니까? 송양 장 회장이죠.”
마침, 엔화 투자가 마무리되지 않아 한가하던 참이다.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