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화
스다오는 마치 본인이 주군을 지키는 사무라이라도 되는 듯이 끝까지 버텼다.
가족들의 목숨이 달려 있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는 말은 스다오에게 있어서 히데오라는 존재가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신적인 존재라는 뜻.
나는 그런 경외심을 깨 주기 위해 미츠미시 일가를 몰살시키려던 계획을 히데오 본인만 납치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흐힉!”
안대가 벗겨진 그가 도착하자 비명을 질렀다.
커다랗게 멍이 든 눈두덩이가 인상적이었다.
“여어.”
“너, 너!”
내가 여유롭게 인사하자 놀란 히데오가 말을 잇지 못했다.
“네놈이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진부한 대사.
아니, 할 말이 저것뿐이 없나?
“네놈이 나를 납치해 강제적으로 보험금 포기 각서에 서명하게 한 건 무사할 거 같고?”
“이, 이놈이!”
“여기가 어딜 거 같아?”
내 말에 그가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폐공장과는 비교할 수 없게 깔끔한 실내와 실용적이며 고풍스러운 가구들.
그리고, 창밖 너머에 있는 빌딩과 멀찍이 보이는 도쿄 타워.
분명, 아는 것 같은데 생각나지 않는 얼굴을 하는 히데오에게 정답을 알려 줬다.
정확히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에 의해 그가 정답을 알게 되었다.
“오랜만이군요. 미츠미시 총수님.”
바로 주일 러시아 대사였다.
“미하엘 대사가 여긴 어떻게….”
“러시아 대사가 대사관에 상주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요.”
미하엘 대사가 자신이 찾아온 이유에 관해 설명했다.
“총수님께서 러시아 장관에 대해 살인을 교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그게 무슨! 절대 그런 적이 없소!”
히데오의 눈에 황당함이 물들었다.
“여기 있는 엘이 러시아 동부 발전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얼마 전, 푸틴 각하께서 동부 장관직에 임명하셨죠.”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장관직을 수여 받은 건 맞지만, 명예직이었고 거기에 딸린 부하 직원은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놀란 히데오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런 그에게 다가가 앞으로의 일을 설명했다.
“내일 아침 신문이 재밌겠어? 미츠미시 그룹의 총수, 러시아 장관에 대해 살인 교사를 지시하다. 이야, 이거 전쟁 나는 거 아니야? 안 그래도 쿠릴 열도 문제로 전투기 왔다 갔다 하던데.”
“나, 나는 모르는 일이다. 전부 스다오 녀석이 벌인 일이야!”
“내가 바보로 보이나? 스다오 놈이 무슨 이득이 있다고 이런 일을 꾸며? 네가 시키니깐 어쩔 수 없이 했겠지.”
“그, 그놈이 원래 공명심이 강하다. 출세를 위해 일을 저질렀을 거야.”
“그래?”
“그렇다. 당신이 원한다면 내가 직접 놈을 처벌하도록 하지. 아니, 놈뿐만이 아니라 놈의 가족들까지 잡아다….”
히데오가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걸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꽃이 펴졌다.
“스다오.”
끼익.
문밖에서 나와 히데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스다오를 불렀다.
스다오의 얼굴을 본 히데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직도 같은 생각이야?”
“…….”
그가 복잡한 얼굴로 바닥만 내려다봤다.
“어떻게 해 줄까? 공장에서 말한 것처럼 히데오의 모가지를 잘라 줄까?”
“흐힉!”
과격한 말에 히데오가 깜짝 놀라 했다.
“아니. 괜찮다.”
그가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배신을 당했어도, 평생 모신 사람의 죽음을 보기에는 싫은 듯 보였다.
잠시 고민하던 스다오가 결심을 내렸는지 고개를 들었다.
“자수하겠다.”
“잘 생각했어.”
스다오의 결심을 듣자마자, 최효석을 불러 히데오를 풀어 주라고 부탁했다.
사실, 이 자리에서 죽이는 게 속이 편했겠지만, 그건 정말 최후의 방법이다.
일본에서 손꼽히는 권력자인 그를 직접 죽인다면 명분을 모두 잃게 될 것이고.
내가 원하는 건 미츠미시 은행과 돈이지 히데오의 머리는 아니기에 그를 온전히 풀어 줬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그가 나가 발버둥 칠수록 세상의 이목이 쏠려 우리에게 유리하면 유리했지 불리하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
미츠미시 은행의 스캔들은 골드만삭스의 건과 똑같은 수순으로 진행되었다.
사람이 한번 뒤돌면 무섭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스다오는 이번 사건뿐만 아니라 그동안의 비리를 싹싹 긁어모아 자수했다.
횡령, 탈세, 배임, 거기다 그동안 저지른 살인 교사의 증거까지 가져갔다.
심지어, 스다오 본인이 공범으로 참여한 범죄까지 가져가 증거의 신뢰도를 투쁠 한우급으로 높였다.
당연하게도, 미츠미시 그룹 측에서는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그들은 검찰과 경찰을 매수해 스다오가 제출한 증거를 탈취했고 막대한 광고비로 언론을 움직여 그들의 입을 막았다.
심지어, 살인 교사 혐의로 유치장에 갇혀 있던 스다오는 이름 모를 제소자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일까지 생겼다.
하지만.
미츠미시 측에서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게 하나 있다.
바로, 내가 일반적인 기업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시작은 한국이었다.
나는 신종민에게 지시해 국회와 청와대를 움직였다.
아무리 민심이 등을 돌린 청와대라도 일본을 공격하는 일에는 5천만 대한민국 국민의 뜻이 함께하기 마련.
약간의 지지율이라도 회복하고 싶었던 이창우 대통령은 이때다 싶어 강력하게 일본에 항의했다.
심지어, 사건의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거나 내가 보험금을 받지 못한다면 한국에 있는 일본 기업들의 모든 자산을 압류하겠다는 으름장까지 놓을 정도였다.
영문도 모른 채 얻어맞은 일본 정부에서 진상 파악에 나섰다.
그들은 외무대신을 보내 미츠미시 은행과의 거래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고 찾아온 이들은 내가 받을 보험금이 10조 엔이고 히데오가 해당 보험금을 주기 싫어 살인 교사를 저질렀다는 사실에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사건이 해결되나 싶었는데.
웬일인지 언론이든 사법부든 간에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수백 년 넘게 일본에서 군림해 온 미츠미시란 이름의 무게가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아마, 여기까지만 했다면 기존의 수순대로 미츠미시 은행을 얻기 위한 법정 싸움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히든카드는 한 장만 있는 게 아니었다.
지구에서 몇 장 없는 SS급 히든카드 푸틴이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지난 몇 년간, 나는 러시아 동부에 많은 돈을 들여 산업 단지를 조성했다.
단순히 땅만 고르고 건물만 올린 게 아니라.
첸이 인수한 중국의 기업들을 이주시켜 그 안까지 채워 넣었다.
그 결과, 블라디보스토크 근처의 지방은 대규모 공업 단지가 형성되었고 실업률이 급감했음은 물론 러시아 전체적으로 보더라도 소득 수준이 가장 높은 축에 들었다.
나에 대한 푸틴의 총애와 믿음은 더없이 커졌음은 물론이다.
그는 내가 살해 위협을 받았다는 사실을 듣고는 크게 분노해 이창우보다 더욱 강력하고 무서운 퍼포먼스를 보여 줬다.
쿠릴 열도 주변으로 하루 한 번씩 핵 폭격기를 날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성명.
[러시아 동부 장관의 정당한 재산을 빼앗는다면 폭격기가 어디까지 내려갈지 모른다.]
설마, 나 때문에 전쟁이야 치르겠냐마는.
핵에 대한 아픔이 있는 일본 정부와 국민은 아연실색했다.
안 그래도 후쿠시마 사태로 인해 정신이 없는 때다.
사태가 커지는 걸 원치 않았던 아소 총리가 원인 파악과 해결에 직접 나섰다.
아무리, 일본의 흑막이라 불리던 미츠미시 히데오라도 명분을 가진 총리가 나선 이상 더는 사건을 틀어막지는 못했는지.
[미츠미시 그룹 총수 미츠미시 히데오의 그동안의 악행!]
같은 언론의 기사가 우수수 쏟아짐과 동시에 그는 검찰 때문에 체포되어 구치소에 수감되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리고.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재무대신이 찾아와 공식적으로 항복을 알렸다.
“보험금과 적당한 피해 보상.”
내 말을 들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츠미시 은행을 실사해 보니 10조 엔이란 자금을 만들 수는 없더군요.”
“그럼 은행을 가져가야 하겠습니다.”
“크흠….”
그가 침음성을 흘리며 난감한 얼굴을 했다.
곤란하다는 뜻으로 보였다.
“그럼 청산 절차를 밟는 수밖에요. 10조 엔 전액을 회수하지 못한 게 아쉽긴 해도 손해는 아닐 테니까요. 아! 요즘 같은 때에 미츠미시 은행이 파산하면 재밌겠습니다.”
회담은 이걸로 끝이 났다.
은행의 파산이 불러일으킬 재앙을 모를 리 없던 재무대신이 내 말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주인만 바뀌는 게 시장이 받을 충격이 가장 작으니까.’
그 후, 모든 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재무성의 지휘 아래 미츠미시 은행이 가지고 있던 현금성 자산 3조 엔을 내게 지급함과 동시에 나머지 7조 엔만큼의 신주를 발행해 내게 귀속시켰다.
그 양이 전체 발행 주식의 53%나 되어 경영권을 확고히 한 것은 물론.
피해 보상으로 미츠미시 히데오가 가지고 있던 1.2%의 주식도 넘겨받았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사태 해결을 위해 몇 가지 정책을 발표했다.
대량의 엔화 발행과 극단적인 금리 인하.
엄청난 엔저 현상을 불러일으킬 조치였다.
엔저에 2천억 달러를 넘게 투자한 첸이 덩실덩실 춤을 춘 건 당연했다.
-엘이 또 한 번 해냈습니다.
“제가 뭐, 했나요? 다 첸과 인베스트먼트의 직원들이 수고해 준 덕입니다.”
-엘….
첸이 감동하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렸다.
미소녀 연예 시뮬레이션이었다면 호감도가 단번에 MAX를 찍을 정도로 말이다.
“앞으로 몇 년간 엔저와 고유가는 계속될 겁니다. 꽉 붙잡고만 있어도 SC 인베스트먼트의 실적은 승승장구할 테니 첸이 잘 조정해 주세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금방 받아 적겠습니다.
이제 내 말이라면 하늘의 별이 달이라고 해도 믿을 첸이 온갖 호들갑을 떨었다.
그렇게 첸에게 앞으로의 지시 사항을 일러주고 나서.
“가시죠.”
비더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영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
몇 시간의 비행 후, 런던에 도착해 선더랜드가의 저택을 찾았다.
처음 와 본 최효석이 호들갑을 떨며 귀족의 저택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이야! 이게 영국 양놈들의 경복궁이구나!”
“양놈들의 경복궁은 버킹엄이구요. 여긴 귀족의 저택입니다.”
“그게 그거 아니겠냐.”
정문 앞에 잠시 대기하자 문이 열리며 비더러가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오오! 나의 친구 엘! 다시 찾아왔구려.”
그가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반가움을 표시했다.
나에 대해 반가움인지 아니면 미츠미시 은행에 대해 반가움인지 모르겠지만.
예전에야 그가 나를 시험했다는 사실에 분노해 반말을 지껄였지만, 모두가 보고 있는 앞에서 그럴 수야 없는 법.
“별고 없으셨습니까. 비더러 공작님.”
동방예의지국의 예를 갖춰 인사했다.
“허허, 허허허허.”
내 바뀐 태도에 그가 어이없이 웃었다.
“들어가시지요.”
그 역시 나를 정중히 맞아 줬다.
잠시 후.
예전에 방문했던 비더러의 서재에 도착했다.
“미츠미시 은행 건에 대해 들었소.”
“걱정해 주신 덕분에 잘 처리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번에 한 약속은….”
비더러가 욕망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당연히, 미츠미시 은행을 넘겨드려야죠.”
“오오! 역시….”
긍정적인 답을 주자 그가 환한 웃음을 지었다.
“매도 가격은 1,500억 달러. 먼저 빌려주신 700억 달러가 있으니 800억 달러만 주시면 되겠습니다.”
“…….”
“설마, 공짜로 얻으실 생각이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