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7화
3일 후.
띠리리리.
시끄러운 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
나갈 준비를 마치고 나와 보니 소파에 리우가 대자로 뻗어 있었다.
놈을 흔들어 깨우려다 예전 기억이 떠올라 멈칫했다.
옆에 있는 음료 캔을 놈의 머리를 향해 던졌다.
딱. 부웅.
아니나 다를까. 그가 머리에 캔을 맞자마자 손을 휘둘렀다.
“응?”
어리둥절한 그의 모습을 보니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야,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
“안 돼. 캡틴이 무슨 일이 있어도 곁이 꼭 붙어 있으라고 했어.”
“캡틴?”
“그래, 캡틴 최.”
“네가 언제부터 시큐리티 소속이었다고 효석 형님을 캡틴이라고 부르냐.”
“크크, 목숨 걸고 함께 싸웠으면 동지 아니겠어?”
어이없지만, 어느 정도는 맞는 얘기니 넘어가자.
“오늘도 바쁘게 돌아다녀야 하니까. 준비나 하고 있어.”
“Ok.”
잠시 후.
시큐리티 요원이 모는 차를 타고 이동하는 길에 어제 스미토모 화학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얼마를 준다고 하더라도 절대 안 되니 돌아가슈.
이 말과 함께 그대로 쫓겨났다.
심지어, 이 당시 스미토모 화학의 1년 순이익과 비슷한 4천억 원이라는 거액을 제시했는데도 말이다.
내가 스미토모 화학을 찾은 이유는 바로 2019년 7월 1일 일본 정부에서 단행한 수출 규제 때문이다.
원 역사에서야 강제 징용 배상 판결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만.
‘내가 미츠미시를 빼앗으면 더 강한 규제를 할 수도 있다.’
물론, 내가 애국심 뽕에 가득 찬 인간은 아니다.
오히려, 조선 시대에 태어났다면 쿠데타를 일으켜 답답한 나라를 무너뜨리는 데 인생을 쏟지 않았을까, 란 생각을 한다.
문제는, 저번에 인수한 기업 23곳 중 3곳이 반도체 생산 업체라는 점이다.
이유야 어떻든 인수하자마자 나락 가는 꼴을 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SC 인베스트먼트가 상현 전자의 대주주이기도 하지.’
수출 규제가 시작되어 정신없을 이강진 회장에게서 무엇을 뜯어낼까도 고민해 볼 문제다.
‘어차피, 앞으로 한 달은 일본에 남아 있어야 하니까.’
창밖을 통해 하늘을 바라보니 구름이 길게 찢겨 있는 게 보였다.
***
2011년 3월 9일 정오가 조금 안 된 시각.
업무를 보고 있던 스다오 행장은 진동을 느꼈다.
두두두. 탁.
책상 위에 뉘어 있던 그의 만년필이 진동에 굴러떨어졌다.
“지진?”
지진임을 깨닫자마자 행장실에 있던 스피커에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산리쿠 앞바다에서 모멘트 규모 7.3의 강진이 발생했습니다. 사내에 계신 직원들은 안전 수칙에 따라….]
지진 정보를 알리는 사내 방송이 울려 퍼졌지만, 스다오는 무시하고 업무에 열중했다.
일본 땅에 태어나 수없이 많이 겪어 본 지진이다.
이 정도 지진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어야 일본 남아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스다오가 업무에 집중하고 있을 때.
띠리리링.
그의 휴대전화에서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다오가 저장된 이름을 확인한 후, 눈살을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
“오, 시미즈 상이 아닙니까?”
굉장히 밝은 목소리로 말이다.
“점심이요? 예, 좋습니다. 그럼 그곳에서 뵙겠습니다.”
잠시 후.
긴자에 있는 고급 가이세키 요리점에서 그는 도쿄 전력의 최고 경영자인 시미즈 마사키를 만날 수 있었다.
“이거 오랜만입니다. 안 그래도 연락을 드린다고 생각하던 차였는데 먼저 연락을 주시다니.”
“우리, 사이에 누가 연락하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둘은 훈훈한 분위기 속에 식사 자리를 가지기 시작했다.
맛있게 차려진 요리들을 먹으며 서로 안부를 물었고 근래에 있었던 일들의 의견을 나눴다.
자리가 거의 끝나가자 시미즈가 본론을 꺼내려는지 목소리를 깔았다.
“미츠미시에서 우리 회사에 대한 주가 보험을 체결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얼마 전, 거액의 보험을 체결했습니다.”
“그것 때문인지 몰라도 어제부터 대량의 공매도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공매도요?”
스다오가 눈살을 찌푸리다 무언가를 깨닫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비열한 조센징 같으니라고.”
말이 혼잣말이지 조용한 다다미방에 단둘이 앉았기에 시미즈가 그 소리를 못 들을 리 없었다.
“조센징이라고요?”
“네, 얼마 전….”
스다오가 얼마 전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굉장히 좋은 일이군요. 매출을 ‘1조 엔’이나 올리지 않았습니까? 요즘 같은 때에 말입니다.”
사정을 들은 시미즈가 돈을 강조했다.
“괜히 저희 때문에….”
“괜찮습니다. 자기 일을 하신 게 아닙니까?”
시미즈가 괜찮다며 말했지만, 눈은 달랐다.
마치, 너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며 탓하는 눈빛.
미츠미시의 큰 손님인 도쿄 전력을 달래 주려 스다오가 얼른 대책을 제시했다.
“저희 미츠미시 은행이 이번 일에 대해 책임지겠습니다.”
“책임이요?”
“네, 행으로 복귀하자마자 도쿄 전력의 주식을 매입해 주가를 원상 복구 시키겠습니다.”
스다오의 대책을 들은 시미즈의 얼굴이 밝아졌다.
“오오! 미츠미시가 나서 준다면야 안심이겠습니다.”
시미즈와의 만남 후, 스다오는 미츠미시 증권을 방문해 도쿄 전력 주식 매입을 명령했다.
매입을 시작하자 도쿄 전력의 주가가 소폭이나마 회복되는가 싶었지만.
“주식의 매도 수량이 너무 많습니다. 오늘만 벌써 400억 엔이 넘는 주문량이 몰려들었습니다.”
엄청난 매도량에 묻혀 얼마 버티지 못했다.
그걸 본 스다오는 보험 계약의 내용이 떠올랐다.
‘바보도 아니고. 겨우 공매도로 주가를 90%나 떨어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나?’
속으로 엘을 비웃는 것도 잠시.
스다오가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다잡았다.
‘상대는 골드만삭스를 반으로 갈라 버린 엘이다. 끝까지 방심하면 안 돼.’
그는 곧 방향을 선회해 주가의 상승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주가 하락만 지연시켜. 버티기만 해도 우리의 승리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더 이상의 매도 물량은 없었다.
확인한 스다오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나선 것을 보고 포기했나 보군.’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채로 말이다.
***
“하하.”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지난 일주일 동안, 수십 군데가 넘는 곳을 방문한 끝에 기어이 기술 이전 계약서에 사인을 받을 수 있었다.
며칠 전, 하도 답답해 리우를 시켜 책임자를 ‘데려’와서 심문한 결과.
기술 이전 대상이 SC였던 게 문제였다.
포토레지스터나 불화수소 같은 반도체 생산 기술은 비공식적으로 한국으로의 이전이 금지되어 있다나 뭐라나.
결국, 비고르에게 부탁해 러시아 동부 산업 단지에 있는 회사의 이름으로 기술 이전 계약서에 서명을 받아 낼 수 있었다.
혹시나 나중에 딴말이 나올까 봐 그 자리에서 잔금까지 모두 지급했고.
계약서상 말도 안 되는 엄청난 금액의 위약금 조항까지 삽입했다.
‘처음부터 이럴걸.’
괜히 시간만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상념에 빠져 있을 때.
드르륵.
어디서 구해 왔는지 유카타를 입은 리우가 히죽 웃으며 다다미 객실의 여닫이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때? 여기 마스터가 빌려줬어.”
“넌 그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냐?”
“왜? 원래 이렇게 입는 거 아냐?”
“미친놈.”
일본인의 체형에 맞춘 유카타를 2m가 넘는 리우가 입으니 다 큰 성인이 초등학생의 옷을 입은 짝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리우는 상관하지 않고 내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캡틴이 일본에 언제까지 있을 거냐는데?”
“아직 일이 남아서 삼 주는 더 있어야 될 거야.”
“알았어, 전달해 놓을게.”
말을 마친 리우가 대낮부터 캔맥주를 땄다.
“너만 먹냐?”
“여기.”
내가 타박하자 그가 가져온 캔맥주 하나를 내밀었다.
“캬아.”
맥주를 마신 리우가 개운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그때.
두두두두.
커다란 진동이 느껴졌다.
퍽. 퍽.
마치 도쿄가 진원지인 것처럼 호텔 집기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응?”
생각보다 큰 진동에 리우가 놀란 눈을 했다.
“시작됐군.”
나직이 중얼거리며 맥주캔을 땄다.
엄청난 돈을 벌어들일 것에 대한 나만의 축배였다.
***
동일본 대지진은 원 역사와 다르지 않게 흘러갔다.
일본의 기상청은 강도 7.9의 지진이 발생했다고 알림과 동시에 쓰나미 주의보를 내렸다.
어찌 됐든, 경보를 확인한 주민들은 곧바로 지역을 벗어나기 위해 이동했으나.
곧 높이 15m의 거대한 해일이 모든 것을 쓸어 버렸다.
사망자와 실종자의 숫자를 합쳐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은 천재지변이었다.
하지만, 이런 천재지변 속에서 인재로 인한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후쿠시마 원전 1호기의 침수였다.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의 부지는 원래 해발 35m인 절벽 위에 존재했다.
그러나, 도쿄 전력이 해수 펌프의 운영 비용을 낮추기 위해 절벽의 높이를 25m로 낮췄고 40년이 지난 후 그 대가를 받게 되었다.
사건이 알려지자 일본의 아소 총리는 곧장 원자력 전문가들을 불러 모았다.
빠른 조치를 통해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원자로의 파괴를 피하고 싶었던 도쿄 전력의 계속되는 사건 은폐와 거짓으로 골든 타임을 놓쳐 버렸다.
그리고 이어진 후쿠시마 원전 2호기의 폭발.
이제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렸다.
그리고 이 사건은 곧바로 주식 시장에 반영되었다.
-장외 거래로 동일본 신탁은행이 가지고 있는 도쿄 전력의 지분 7%를 현재가로 사들였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팔지도 못하고 휴지 조각이 될 주식을 사 준다니까 아주 좋아하던데요?
빠른 움직임. 역시 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시작하시죠.”
-예.
대답한 첸이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일본 은행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지진이 일어난 지 한 달밖에 되질 않았는데 벌써 금리를 두 번이나 인하했습니다.
“인플레이션을 감수하고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생각대로 경기 부양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엔화를 잔뜩 찍어 내겠죠.”
-그날이 기대됩니다.
다음 날부터.
첸은 7%에 달하는 도쿄 전력의 주식을 내던졌고 주가가 빠른 속도로 하락했다.
원 역사에서도 도쿄 전력의 주가는 동일본 대지진을 기점으로 90일 이후에 95%가 하락했다.
나는 돈을 지불해 그 시간을 좀 더 빠르게 앞당겼다.
미츠미시가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며칠 후.
도쿄 전력의 주가가 보험 체결 기준일에 대비해 10% 밑으로 떨어지자마자 미츠미시 은행으로 이동했다.
사실, 며칠 전부터 스다오에게서 계속해서 연락이 왔었다.
깎아 달라고. 혹은, 지급 기한을 늦춰 달라고.
그의 처지에선 부탁이겠지만 나로선 단순한 생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연락을 받은 나는 그에 대한 평가를 하향했다.
명색이 일본 3대 은행 중 한 곳의 행장이 아닌가.
생떼를 부려도 최소한의 명분과 근거를 가져야지 밑도 끝도 없이 깎아 달라면 누가 들어줄까.
‘어차피, 깎아 줄 생각은 없지만.’
미츠미시 은행에 도착해 창구 직원에게 보험 증권을 내밀었다.
직원의 얼굴이 사색이 되며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 그, 금방, 처리할 사, 사람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향했다.
20분쯤 지났을까?
슬슬 기다림이 지루해질 찰나.
직원과 함께 스다오 행장과 함께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이 내 앞에 서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미츠미시 히데오.”
“뭐야? 이 노인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