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6화
딸랑.
식사가 거의 끝날 때쯤, 문을 열고 미츠미시 증권의 직원이 들어왔다.
그가 스다오 행장에게 가져온 서류를 내밀었다.
“수고했네.”
스다오 행장이 서류를 확인한 후 내게 내밀었다.
보험 계약서였다.
겉으로 보기엔 주가가 하락해 손실이 발생하면 절반을 보상해 주는 지극히 평범한 보험이지만.
사실, 이건 파생 상품의 일종이라고 보면 된다.
해당 주식에 투자하지 않더라도 보험료만 내면 주가가 내려갔을 때, 보험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에 한 가지 조항만 채워 넣고 액수만 키우면 된다.
“혹시, 한 가지 조항을 추가할 수 있겠습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무리가 되지 않는다면 들어드리겠습니다.”
“주가가 70% 이상 하락했을 때, 보상 액수를 키워 주십시오.”
“어느 정도로 말입니까?”
“투자 가정액의 전부.”
스다오가 의심이 가득 찬 눈초리로 나를 바라봤다.
“…기준 금액을 얼마로 잡으실 예정입니까?”
“10조 엔을 잡고 싶습니다.”
“그,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그가 엄청난 금액에 질겁하며 바로 거절의 대답을 했다.
“도쿄전력 같은 곳의 주가가 70%나 빠질 수가 있을까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행이 파산할 만한 계약을 할 수는 없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구간을 90%로 변경하고, 기간은 1년으로.”
“흐음….”
스다오가 잠시 생각에 빠진 게 보였다.
‘도쿄전력 같은 대기업의 주가가 일 년 안에 10분의 1로 떨어질 리가 없다고 생각하겠지.’
화투판에서 호구에게 구 땡을 쥐여 준 것과 다름없다.
이제 판을 확정 짓기 위해 그의 패를 장땡으로 바꿔 줄 차례.
“그리고, 요율은 10%를 책정하겠습니다.”
“10%나 말입니까?”
“이렇게까지 해 주셨는데 행장님도 소득이 있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10%란 말에 그가 깜짝 놀라는 게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도쿄전력의 주가가 10분지 1토막만 나지 않으면 벌 수 있는 돈이 1조 엔이란 뜻이다.
가뜩이나 미국발 금융 위기에 사정이 안 좋아진 미츠미시 입장에서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나 마찬가질 터.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잠시 고심하던 스다오가 내 제안을 승낙했다.
“잘 선택하셨습니다. 도쿄전력 같은 곳의 주가가 10분의 1로 내려갈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천재지변’이 아니고서야.”
***
“알겠습니다.”
첸은 엘의 전화를 받고 메일을 확인했다.
그리고, 곧 그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주식 보험이라니. 그것도 이런 조건으로.’
메일로 들어온 내용은 첸이 아는 보험이 아니었다.
마치, 돈을 가져다 바치는 모양새.
그래도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공격적인 엘의 투자 성향을 따져 봤을 때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문제는.
‘왜 하필 도쿄전력을….’
종목이다.
소니나 도요타 같은 제조업 대기업은 실적과 사고로 인해 주가가 오르락내리락하지만.
전력 회사의 주가는 변동이 크지 않다.
하지만.
‘엘의 선택이라면 뭔가가 있겠지.’
중신그룹에 복수를 마친 첸은 이제 엘에 대한 믿음이 종교적인 믿음으로까지 발전한 지 오래다.
그는 곧바로 미츠미시의 지정 계좌로 보험료를 입금했다.
그가 곧바로 엘의 다음 메일을 읽기 시작했고 곧 그의 표정에 환희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메일을 다 읽은 그가 자신의 방을 나와 SC 인베스트먼트의 사무실을 바라봤다.
직원들 역시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하던 일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위대하신 엘의 계시가 내려왔다.”
자신들의 오너이자 불패의 투자자로 엘의 이름이 언급되자 직원들이 눈을 빛냈다.
“한 달 안에 엔화의 가치 폭락이 있을 거란 걸 예견하셨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겠나?”
첸의 연설에 직원 하나가 손을 들었다.
“레버리지를 최대한 땡겨서 풋 옵션을 사들여야 합니다. 어차피 엘의 예측이 틀릴 일은 없지 않습니까?”
그의 대답에 첸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또 다른 의견은 없나?”
“옵션에만 투자해서는 안 됩니다. 엔화에 직접적인 공매도를 거는 게 안전할 듯 보입니다.”
“좋아! 또 다른 사람?”
첸의 뒤에 있던 여직원이 손을 들었다.
첸의 여비서 소홍이었다.
“엔화의 가치가 하락하면 상대적으로 다른 안전 자산들의 값어치가 크게 뛸 리라 생각합니다. 금이나 미국의 채권에 투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입니다.”
“정확하다.”
소홍에게 간단히 대답한 첸이 직원들을 돌아봤다.
“방금 나온 이야기가 우리가 할 일이다. 이해 못 한 사람 없지?”
“예!!!”
입가에 미소를 띤 첸이 크게 소리쳤다.
“투자비는 541이다. 풋 옵션에 5, 공매도에 4, 안전 자산에 1, 지금부터 팀을 나눠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와. 확실하다고 느끼면 바로 결재해 줄 테니까.”
첸의 말이 떨어지자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팀을 짜고 회의를 시작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첸이 흐뭇한 얼굴을 했다.
***
며칠 후, 뉴욕 로스차일드가.
서재에서 프랭크 로스차일드와 조지 소로스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엔저에 베팅했다?”
“네. 거래소에서 들어온 정보니 확실합니다.”
“규모는?”
“엔화 풋 옵션에만 투자한 금액이 600억 달러가 넘습니다. 계속해서 늘어나는 추세이고요.”
“흐음….”
잠시 고민하던 프랭크가 조지를 바라봤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근거 없는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저번 모기지 사태 이후 달러의 가치는 하락했고 지금도 역시 하락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엔화는 끝없이 상승하고 있습니다.”
“질리언은 뭐라던가?”
“아직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자네는 아직도 질리언을 인정하지 않고 있군.”
프랭크의 말에 조지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의 말이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다.
엘과 함께했던 작년의 투자.
그 속에서 질리언은 빛나는 공을 세웠다.
중국의 알토란 같은 기업과 자산을 헐값에 사들였고 거센 공산당의 압박 속에서 그것들을 지켜 냈다.
중국을 견제하던 백악관과의 사이가 좋아진 건 덤이었다.
무엇보다 엘과 협의를 한 건 바로 질리언이었다.
만약 그 자리에 질리언이 아닌 조지가 나갔다면?
아마 엘의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다.
그만큼 엘의 제안이 얼토당토않았으니까.
이는 조지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렇게 미국으로 돌아온 질리언은 공을 인정받아 정식으로 후계자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질리언을 자신의 윗사람으로 인정하기엔 그의 나이와 경력이 너무 오래되었다.
그 때문에 조지와 질리언 사이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하는 것처럼 평행선만 그어지고 있었다.
프랭크는 바로 이 점을 지적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년 안으로 질리언이 가주 자리에 오를걸세.”
“알고 있습니다.”
“계속 이런 식이면 곤란해. 아직 자네가 할 일이 많단 말이지.”
프랭크가 돌려 말했지만, 이건 질리언을 따르지 않겠다면 그만두라는 뜻.
평생 로스차일드가를 위해 살아온 조지가 울컥했지만 티 내지 않고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가서 질리언을 불러오게.”
조지가 나가고 서재에 혼자 남은 프랭크가 한숨을 쉬었다.
잠시 후.
조지가 질리언을 데리고 서재로 돌아왔다.
“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질리언의 대답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중국에 머물던 1년간, 엘의 행적을 좇아 봤습니다.”
“어떻더냐?”
“그는 괴물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유는?”
“2년 전 있었던 석탄 파동에 대해 기억하실 겁니다. 호주 최대의 석탄 보관 항에 방화가 발생하여 석탄 가격이 30% 넘게 올랐던 사건이죠.”
질리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을 이었다.
“그 사건의 배후에 엘이 있었습니다.”
“짐작하고 있었다. 엘의 지시로 그의 부하들이 벌인 일이 아니더냐.”
“아닙니다.”
“그럼?”
“엘이 직접 벌인 일입니다. 데이사르 쪽에서 흘러나온 정보니 틀림없습니다.”
프랭크가 짐짓 놀란 얼굴을 했다.
“미친놈이군. 수많은 사람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놈이 직접 움직이다니.”
“네, 미친놈이 맞습니다. 그렇기에 따라가야 한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도박판에 올려놓는 사람입니다. 이번 투자 역시 마찬가지겠죠. 그가 엔저에 올인했다면 어떻게든 결과를 만들어 낼 겁니다.”
“우리는 그런 놈을 따라가서 이익만 보면 된다?”
“예, 공짜 점심을 얻어먹는 셈이죠.”
질리언의 의견을 모두 들은 프랭크가 흡족한 얼굴을 했다.
“어떤가? 조지, 나는 걸어 볼 만하다고 보내만.”
평생을 근거에 의한 투자를 한 조지는 질리언의 의견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랭크의 반응을 보아하니, 자신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강행할 것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우려되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말해 보게.”
“근거가 없는 만큼 다른 가문을 설득하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조지의 첨언에 평소 다른 가문들을 고깝게 보던 질리언이 나섰다.
“SC와 우리만 투자해도 시장에 충격을 주기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들과의 관계에 금이 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만 빼고 자기들끼리 엑시트를 단행한 놈들입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지킬 의무와 의리가 있긴 합니까?”
“가문 간의 관계는 그렇게 속단하긴 이릅니다. 좀 더 두고 볼 필요….”
프랭크가 조지의 말을 끊었다.
“괜찮네. 지금은 질리언의 말이 맞아. 우리가 언제까지고 그들을 데리고 갈 수는 없지 않나. 마침 중국에서의 일이 있으니 명분도 충분하고.”
이로써 로스차일드가가 엔저에 투자하는 게 확정되었다.
하지만, 이들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빌더버그 소속 가문들의 움직임이었다.
로스차일드보단 못하지만, 그들 역시 월가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몇몇 가문의 경우 직접 벌지 브래킷을 운영하는 만큼, 증권 거래소를 통해 엔화 풋 옵션에 막대한 돈이 걸린 것을 확인하여 곧바로 엔화 콜 옵션에 막대한 돈을 투자했다.
투자 근거는 간단했다.
모기지 사태 이후로 달러는 계속해서 약세였고 안전 자산이라고 평가받는 엔화는 강세였기 때문.
누가 봐도, 어떻게 봐도, 이게 정답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선택은 곧바로 차트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
-엔고에 베팅한 세력들이 나타났습니다.
“예상했던 바로군요. 아무래도 지금은 달러보단 엔화가 강세니까요.”
-그런데, 우리를 따라 들어온 쪽도 있는 것 같습니다.
첸의 말에 의문이 들었다.
차트에 보일 정도면 적은 돈은 아닐 터.
“일단, 알겠습니다. 조만간 한국에서 보죠.”
전화를 끊고 따라오는 쪽의 정체를 유추했다.
‘HS 은행? 아니야. 비더러가 근거 없는 투자를 따라 할 리가 없어.’
고심하던 끝에 머릿속에 질리언의 얼굴이 떠올랐다.
‘여우 같은 새끼.’
그들의 부가 커지는 건 경계해야 하는 일이다.
특히, 이번 투자가 성공을 거둔다면 그들은 계속해서 나를 따라올 터.
‘한번 맛 들인 무임승차는 이어지는 법이니까.’
이번에는 어쩔 도리가 없지만.
대응 방법이야 많다.
그렇게 머릿속에서 나를 따라온 놈들에게 엿 먹일 방법을 떠올리던 때, 달력이 보였다.
‘이제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
창문을 열어 보니 궂은 날씨 탓에 커다란 파도가 치고 있는 도쿄 앞바다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