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회장님께서 언제 한번 보자고 하십니다.
이강진 회장에게 전화하려 했지만, 저번 만남 이후로 왠지 부담스러워져 최우현 실장에게 연락했다.
부탁 내용은 저번 회의에서 말한 대로 정치권의 반발을 막아 주는 것.
대가는 이미 이 회장과 최 실장의 목숨을 구해 줬던 것으로 치렀기에 쉽게 승낙을 받았다.
물론, 상현 전자 경영권 방어는 따로 정산할 예정이었다.
‘인수 대상 기업의 숫자가 42개, 시가 총액의 합이 107조 원.’
신종민이 보낸 보고서에서 나온 숫자다.
평소 같았으면 턱도 없을 정도로 저렴한 인수 대금.
아무래도 글로벌 금융 위기의 여파가 가시지 않았고 최근에 벌어진 중국 사태가 주가에 영향을 줬을 거라 예상된다.
문제는.
현금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지분 100%를 확보할 필요는 없기에 107조 원 전부가 들어가진 않겠지만.
절반만 인수한다고 치면 53조 원이며.
적대적 인수를 선언하게 되면 주가가 뛰기 마련이라 90조 원 이상이 들어갈 수도 있다.
SC 인베스트먼트의 자금은 모두 홍콩으로 옮겨져 있는 상태.
오로지 오션의 자금으로 인수해야 한다.
어제 신종민의 보고에 따르면 회사 유보금은 11조 원가량이고 회사 주식을 담보로 대출받을 수 있는 최대치는 24조 원이다.
이것도 다 신종민이 열심히 회사를 키운 결과긴 했지만.
‘35조 원으로는 부족하다.’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전부 인수하지 않으면 하지 않느니만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에.
‘살네만에게 전화해야겠군.’
나는 돈을 만들기 위해 호구, 아니 우군에게 전화했다.
“HS 은행의 주인을 만나고 싶습니다.”
***
일주일 후 런던 외곽.
커다란 저택에서 열리는 화려한 파티에 참석했다.
“엘, 저택이 정말 예뻐요.”
제니와 함께 말이다.
“그래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그녀가 무신경한 대답에 쌍심지를 켰다.
“이런 곳에 여자랑 왔으면 여자가 개똥이 예쁘다고 해도 맞다고 하는 거예요.”
“…예.”
파티에 참석한 이유는 HS 은행의 주인을 만나기 위함이었는데.
[파티 초대장을 보냈네. 그곳으로 가면 HS의 주인을 만나 볼 수 있을 걸세.
PS. 파트너와 함께 참석해야 하네.]
위와 같은 개똥 같은 살네만의 메일을 받았기에 어쩔 수 없이 제니를 데리고 이곳까지 찾아왔다.
평소 같았으면 파티 초대 같은 불필요한 일은 무시했겠지만.
‘아쉬운 사람이 움직여야지.’
돈 빌리러 온 주제에 말이 많을 수는 없는 법 아니겠는가.
“엘, 우리 차례예요.”
제니의 재촉에 입구를 지키는 가드에게 초대장을 건넸다.
“들어가셔서 파티를 즐기시다 보면 가주님이 찾으실 겁니다.”
사전에 우리에 대해 들은 얘기가 있는지 가드가 간단한 안내를 해 줬다.
“우와!”
제니가 저택 안 정원에 들어서자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유는 다르지만 나 역시도 감탄사를 내뱉었다.
“존나 쓸데없어.”
자고로 집이란 아늑한 맛이 최고 아니겠는가.
“네?”
“아닙니다. 안쪽에 음식이 있는 것 같은데 간단히 요기나 하는 건 어떻습니까?”
제니가 음식이란 말에 흠칫 놀랐다.
“엘, 이런 곳에 오면 음식보다는 사교에 중심을 둬야 하는 거예요.”
“그럼 제니는 사교를 하시죠. 전 배가 고파서….”
내가 그녀를 지나쳐 음식이 모여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제니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지만.
“엘! 이것 좀 먹어 봐요. 어머 세상에, 트러플을 곁들인 스테이크라니. 향긋하고 살살 녹아요.”
음식을 목격한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음식들을 마구 쓸어 담았다.
제니의 오버에 살짝 쪽팔렸지만.
뭐, 깨작이는 그것보다야 백배 나아 보였다.
“음식에 정성을 많이 들인 것 같습니다.”
“그쵸! 그리고 저기에 캐비어폼을 올린 비스킷도 있어요. 이따 그것도 먹어 봐요.”
테이블에 앉아 그녀와 음식을 맛있게 즐기고 있다 보니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다.
키득. 키득.
정원 구석에서 와인잔을 들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던 무리가 우리 쪽을 바라보며 비웃음을 보냈다.
“엘, 무시해요. 일부 몰상식한 백인들이 동양인 무시하는 건 일상적인 거예요.”
평소 내 성격을 알고 있던 제니가 나를 만류했다.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말이다.
“아무것도 안 합니다.”
오해를 받아 살짝 억울한 마음에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제니가 긴장한 눈치를 보였다.
‘하긴, 나에 대해 들은 말이 있겠지.’
생각해 보면 그녀의 반응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거의 함께 다녔던 최효석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녀도 SC의 일원이니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대충이라도 알 것이니까.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와인이라도 마시자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녀가 깜짝 놀라 나를 불렀다.
“와인 가지러 가는 겁니다. 와인이요. 제니는 저를 어떻게 보는 겁니까?”
“미, 미안해요.”
제니가 당황하며 미안한 얼굴을 했다.
문제는.
“헤이! 옐로우 몽키.”
나와 제니를 비웃던 무리 중 하나가 다가와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술에 취했는지 혓바닥이 꼬여 있는 발음으로 인종 차별적인 단어를 내뱉었다.
“애인이 아주 미인인데?”
“고맙다.”
여기까지 와서 소란을 일으킬 수 없기에 놈을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지만.
툭.
놈이 내 어깨를 툭 치며 계속해서 시비를 걸었다.
“그런 미인에게 식사를 대접할 돈도 없나 봐? 여기까지 와서 배나 채우게 하고.”
“다했으면 이만 돌아가지 그래? 파티장까지 와서 어디 한 군데 부러지면 억울하잖아?”
내 말을 들은 놈이 화가 났는지 팔을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하긴, 미개한 몽키들이 뭘 알겠냐.”
놈이 어깨를 으스대며 다시 돌아갔다.
갑작스러운 시비에 놀랐는지 제니가 내게 다가왔다.
“괜찮아요?”
“네, 물론이죠.”
“아뇨, 엘 말고 저 사람 괜찮냐고요. 내공을 써서 어디 한 군데 망가뜨린 건 아니죠? 아니면 독을 몰래 풀었다든가….”
“제니, 무슨 상상을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전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내공이라뇨. 요새 대체 무슨 책을 읽고 다니시는 겁니까?”
“아버지 서재에 있던 천룡칠부라는 책에 그런 내용이 나와 있더라고요.”
이강진 회장이 무협지를 읽는 것도 놀라운데 그걸 믿는 사람이 있다니.
“허구에 기반한 소설이잖습니까?”
“그래도… 엘이 하고 다니는 일을 들어 보면 무협지나 다름없는걸요?”
“무슨 얘기를 들으셨는지는 몰라도 그거 다 뻥입니다.”
“그치만, 첸이….”
역시, 첸이 범인이었다.
홍콩인 특유의 과장된 표현이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
“제니, 첸이 말하는 동양의 신비 같은 거 다 거짓이에요. 저는 보통 사람이고 그런 능력은 없습니다.”
그렇게, 제니의 오해를 풀고 있을 때.
아까 시비를 걸던 놈이 제니를 향해 가슴이 어떻고 엉덩이가 어떻다는 음담패설을 쏟아 냈다.
마치,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말이다.
미국에서 자라 왔고 미국 시민권자인 제니가 그 말을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그녀가 놈에게 따지기 위해 몸을 돌리는 걸 막아섰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놈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여태 많이 참았기도 했고.
도착한 지 두 시간이 지나도록 나를 시험하고 있는 집 주인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함이었다.
돈 빌리러 와서 남의 파티를 망칠 수야 없어서 여태 참았지만.
돈이야 다른 곳에 부탁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는가.
“이번에는 안 참네?”
미소를 띤 놈이 와인잔을 입에 가져다 대며 나를 놀렸고.
한달음에 다가가 와인잔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콰직.
잔이 깨지며, 아니 터져 버리며 놈의 입 안과 얼굴 여기저기에 상처를 만들었다.
“까야!”
내 돌발 행동에 놀란 주변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끄헉.”
주르륵.
고통스러운지 놈이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 난간에 부딪혀 걸음을 멈췄고.
나는 놈의 무릎을 향해 앞발을 번개같이 뻗었다.
우두둑.
무릎이 반대 방향으로 꺾였고.
“끄아아악!”
놈이 끔찍한 비명을 질러 댔다.
그리고.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저택의 경호원들이 뛰쳐나왔다.
“집주인은 어디 가고 너희만 기어 나왔냐?”
그 말과 함께 한쪽 구석을 바라봤다.
머리가 새하얀 노인 하나가 눈을 빛내며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노인이 오늘 내가 만나기로 한 비더러 선더랜드다.
당황하지 않는 것을 보아 지금까지의 방치가 의도적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가주님께선 손님을 맞이하시느라고….”
“저기서 놀고 있는데?”
내가 직접적으로 그를 가리키자 모두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HS의 주인이자 명망 높은 영국 귀족에게 손가락질을 하니 놀란 모양이다.
반면에 내 지목을 받은 노인은 더는 참을 수 없는지 박장대소했다.
“으하하, 미안하네. 중국을 움켜쥐고 부숴 버린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 시험해 봤네.”
“기분 더러우니까 처웃지 마. 모가지를 꺾어 버리기 전에.”
내 말을 들은 그의 경호원들이 뛰어와 그의 주위를 감쌌다.
그중 몇몇은 언제든 총을 꺼낼 수 있도록 품에 손을 넣었다.
그러자, 멀찍이서 안쪽 상황을 지켜보던 최효석과 요원들이 저택의 담을 뛰어넘어 난입했다.
양쪽이 언제든 충돌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비더러가 자신의 경호원들을 제지했다.
“괜찮으니 가만히들 있게.”
나 역시 마찬가지.
“형님, 요원들을 물려 주세요.”
잠시 소강상태 끝에 요원들이 멀찍이 물러나자.
“안쪽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떤가?”
“개소리 지껄일 거면 그냥 가고.”
“그럴 리가, 어서 들어오게나.”
***
비더러를 따라 그의 서재로 들어갔다.
그가 어색한 분위기를 풀려 하는지 술을 권했다.
“와인? 위스키?”
“위스키.”
비더러가 투명한 유리컵에 손수 위스키를 따라 주었다.
쪼르륵.
그가 내민 갈색의 투명한 위스키를 받아들고 한입에 털어 넣었다.
비더러가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우리가 한가롭게 술잔 나눌 사이는 아니잖아?”
“그런가.”
“서로 본론이나 꺼내자고. 시간 아까우니까.”
“살네만에게 예의 바른 친구라고 들었는데….”
“시험한답시고 누구처럼 같잖은 짓은 안 했으니까.”
비더러가 헛웃음을 짓더니 목소리를 깔았다.
“알았네, 본론으로 들어가지.”
“그쪽부터.”
“중국 투자에 관한 이야기네.”
“그건 저번에 정산이 끝났을 텐데?”
“사기나 다름없는 거래였지. 나는 끝까지 반대했지만, 다른 가문의 가주들은 환장하고 달려들더군.”
“물려 줄까?”
중국의 상황은 소강상태에 접어든 지 오래다.
백문은 자산을 모두 처분함과 동시에 두 개 군구를 끌어들였고.
이를 갈던 중앙 정부는 인민들을 단속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즉, 내게 있어 데이사르는 더 이상 효용 가치가 없었다.
“나야 좋지만, 다른 가주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걸세.”
“그래서 당신만 특별 대우를 해 달라고?”
“특별 대우를 해 달라는 게 아닐세.”
“그럼?”
“거래를 하고 싶네. 자네 역시 원하는 게 있어 나를 찾아온 게 아닌가?”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보다야 거래하는 게 훨씬 편하니까.’
“700억 달러.”
“응?”
“그냥 줘. 그냥 주기 싫으면 무이자로 기한 없이 빌려줘도 괜찮고.”
“미쳤나?”
“거래라며. 내가 저울에 원하는 걸 올려놨으니 당신도 비슷한 걸 올려놓으면 되는 거 아냐?”
내 말에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원래는, 중신은행이나 상하이 개발을 원했네만.”
“저울에 추가 맞지 않는다?”
“그렇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내가 추를 올려주는 수밖에.”
내 말에 비더러가 의문에 가득 찬 눈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