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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3회차! 재벌빌런-55화 (55/175)

#055화

-우리가 반갑게 인사할 사이인지는 몰랐군.

“이거 서운한데요? 저는 서로 ‘도움’을 주는 비즈니스 파트너라고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들어 보는 개소리군.

빌더버그의 수장이자 로스차일드가의 당주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한다.

“좋은 제안을 드리기 위해 전화했습니다.”

-좋은 제안이라….

“예,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으실 겁니다.”

-오호라. 꽤 좋은 제안인가 보군. 골드만삭스를 무너뜨린 ‘엘’의 제안이니 말이야.

내 말에 프랭크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가.

-미안하지만, 다른 사람을 찾아보게나.

“잠깐! 얘기만 한번 들어 보….”

뚝.

냉정하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

“시팔, 좀생이 같은 영감탱이.”

저번 손해가 너무 컸나?

돈이라면 환장하는 영감탱이가 얘기도 들어 보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릴 만큼?

‘차선책을 찾아야 하나?’

문제는, 빌더버그만큼 돈과 힘이 있는 집단이 많지 않다는 거다.

‘데이사르? 아니야.’

수백 년 동안이나 유럽을 지배해 온 그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1년 이상 걸릴지도 모른다.’

12가문의 협의체인 그들의 의사 결정 속도는 너무 느리다.

부탁해 봤자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일 터.

무엇보다 이번 계획에서는 빌더버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다시 전화해 봐?’

아쉬움에 다시 전화기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띠리리리.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

-엘의 전화번호가 맞습니까?

처음 듣는 목소리에 처음 보는 전화번호다.

“맞습니다만, 누구십니까?”

-아! 제 소개를 안 했군요. 질리언이라고 합니다.

“질리언 씨군요. 제 번호는 어떻게 알고 전화하셨습니까?”

-프랭크가 여기로 전화하라고 하더군요. 엘의 제안을 들어 보라면서.

순간 음흉하게 웃는 프랭크의 얼굴이 뇌리에 스쳤다.

-자세한 건 만나서 이야기해도 괜찮겠습니까? 마침 태국이라 내일 아침 비행기로 도착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얼마든지요.”

***

다음 날.

홍콩 시내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질리언을 만날 수 있었다.

하얀 피부와 여리여리한 몸매 그리고 작은 키를 가진 그는 나를 만나자 쉴 새 없이 떠들기 시작했다.

“엘이 이렇게나 젊다니! 믿기지 않습니다! 혹시, 첸도 엘만큼 젊습니까?”

“첸이 저보다….”

“아! 맨손으로 시작했다고 들었는데요? 이렇게 빨리….”

당장이라도 그의 입에 주먹을 박아 넣고 싶었지만.

아쉬운 입장이니 억지로 참고 그의 말을 잘랐다.

“일 얘기를 좀 해 보는 게 어떻습니까? 제가 시간이 많지 않군요.”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팬이라서…. 혹시, 괜찮으시면 사인 한 장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나가는 길에 해 드리겠습니다.”

내 단호한 태도에 질리언이 입을 다물었다.

“일전에 벌어진 사태로 골드만삭스의 피해가 큰 거로 알고 있습니다.”

“아니라면 거짓이겠죠.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 손해를 메꿀 투자처를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나오자 질리언이 뭔가를 알고 있는 듯이 말했다.

“엘이 홍콩에 많은 힘을 쏟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혹시, 엘이 말하는 투자처가 홍콩입니까?”

“그것도 맞습니다.”

질리언이 실망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이거 괜히 시간만 낭비한 거 같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홍콩은 중국의 투자 창구 역할을 잃었습니다. 이미 상하이에서 홍콩을 대신할 금융 센터가 지어지기 시작했고요.”

“…….”

“중국 본토와의 관계가 끊긴 홍콩은 투자처로서의 매력이 전혀 없습니다.”

홍콩이 가진 역할과 메커니즘을 제대로 파악한 대답이다.

‘나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이었지.’

첸의 계획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홍콩에 투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요?”

“제게 투자하라는 겁니다. 원금 손실이 우려되신다면 투자가 아닌 대출도 상관없습니다.”

질리언의 입이 오늘 처음으로 닫혔다.

내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조건을 알 수 있습니까? 이를테면 투자 수익금이나 담보 같은.”

“네.”

가지고 온 가방에서 두 가지 서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첫 번째는 투자 약정서고 두 번째는 대출 약정섭니다.”

질리언이 서류들을 꼼꼼히 살피더니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2년간 예상 수익률이 50%군요. 어떤 방식의 투자입니까?”

“비밀입니다. 투자가 이뤄지고 난 후에 가르쳐 드리죠.”

“엘, 무려 5,000억 달럽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투자할 수는 없습니다.”

당연히 투자할 리가 없다.

빌더버그가 병신도 아니고.

나라도 저딴 투자 약정서를 받아 들면 상대 얼굴에 던져 버렸을 것이다.

내가 저따위 약정서를 내민 이유는 투자를 하지 말라는 뜻이다.

질리언이 흥분을 가라앉혔는지 차분한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대출 이율은 연간 10%, 기한은 3년, 담보는 엘이 가진 모든 것. 맞습니까?”

“맞습니다.”

“이것도 힘들 것 같군요. SC 인베스트먼트가 홍콩과 러시아에 투자한 금액이 각각 2,100억과 600억, 그리고 SC 오션의 시가 총액이라고 해 봤자 500억, 총합이 3,200억 달러인데 대출 금액이 담보 가치를 상회하지 않습니까?”

질리언의 지적이 날카롭다.

“정확하군요. 어쩌면 저보다 더 저를 잘 알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저희를 우습게 보면 곤란합니다. 어찌 됐든, 엘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예상대로 협상이 미끄러졌다.

이제 마지막 히든카드를 꺼내야 할 때다.

“그럼 둘을 반반씩 섞는 게 어떻습니까?”

“네?”

준비해 온 마지막 서류를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아까와는 다르게 대략적으로나마 첸의 계획을 풀어낸 서류.

그걸 읽는 질리언이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간단합니다. 절반을 대출해 주시고 나머지는 투자해 주십시오. 이러면 담보는 해결될 테고.”

“투자 수익률이 공란이군요.”

“그건 그쪽에서 제 계획을 얼마나 따라 주느냐에 따라 달라질 겁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질리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주께 보고드리겠습니다. 일단 저는 긍정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좋은 대답을 기다리겠습니다.”

질리언이 한시가 급하다는 듯이 레스토랑을 나섰다.

“휴우….”

그가 떠나자마자 진이 다 빠져 넥타이를 풀어냈다.

그렇게 잠시 휴식을 취하려 할 때.

“저어….”

“질리언, 아까 돌아가신다더니 아직 안 가셨습니까?”

레스토랑을 나간 질리언이 돌아왔다.

“사인을 깜빡해서 돌아왔습니다.”

“아!”

사인을 하기 위해 그가 내민 종이를 받아 들자 그가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사인을 해 주면서 제 아들 이름도 같이 적어 주시면 안 될까요? 이번에 하버드 경제학과를 지원했거든요. 엘과 같이 천재적인 사람이 됐으면 해서요.”

조금 전의 날카로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처음의 순박한 모습으로 돌아간 질리언이 귀엽게 느껴졌다.

“얼마든지요. 아드님의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데니얼, 데니얼 로스차일듭니다.”

***

며칠 뒤.

질리언 로스차일드가 뉴욕 외곽의 본가에 돌아왔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시간이 없는지 빠르게 프랭크 로스차일드의 서재를 찾았다.

똑. 똑.

“들어오거라.”

“돌아왔습니다.”

자신의 가족들 앞에서는 항상 밝은 모습을 보여 주는 질리언이지만.

프랭크 앞에서는 로봇이라 불려도 될 만큼 딱딱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는 잘 보고 왔느냐?”

“네, 대단했습니다.”

“그렇구나.”

“…….”

잠시간의 침묵.

질리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가 제안을 했습니다.”

“무슨 제안이더냐.”

“돈을 빌려달라더군요.”

“뭣?”

프랭크가 어이없는 얼굴을 하더니 이내 끌끌 대며 웃었다.

“뻔뻔한 놈이로군.”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가문의 돈을 도둑질한 놈이 제 발로 찾아와서 돈을 빌려달라지 않느냐.”

“정당한 거래로 번 것이지 도둑질이 아닙니다.”

프랭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질리언과의 대화에서 커다란 세대 차이를 느꼈다.

“뭐가 됐든 우리 가문의 돈을 가져갔으면 전부 도둑질이다.”

“…….”

또다시 이어진 침묵.

이번에는 프랭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게 끝이더냐?”

“아닙니다. 그가 다른 제안도 했습니다.”

질리언이 이신후에게 받은 서류를 건넸다.

“…미쳤군.”

“처음으로 할아버지와 같은 생각입니다.”

“어쩔 생각이냐?”

“저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이대로 이뤄진다면 전쟁이 날 수도 있다.”

“20년 뒤라면 모를까 백문은 우리를 결코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건 장담할 수 없는 일이지. 그들이 같이 죽자고 덤벼들면?”

“그들 혼자 죽을 겁니다. 물론 우리도 상처를 입겠지만요.”

질리언의 대답을 들은 프랭크는 처음으로 자신이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운 마음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프랭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질리언은 강경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그의 말대로만 된다면 우리는 지난번 잃었던 것을 한 번에 되찾을 수 있습니다.”

자신 있는 질리언의 얼굴.

그걸 보던 프랭크는 10년 전에 잃은 아들의 얼굴이 생각났다.

그런 기색을 느꼈는지 질리언도 더는 자신의 주장을 펼치지 않았다.

그렇게 10분이나 지났을까?

프랭크가 사용인을 불렀다.

“조지를 불러오게.”

잠시 후, 프랭크의 서재에 조지 소로스가 찾아왔다.

“조지, 일을 하나 해 줘야겠네. 영국과 태국에서 했던 일과 비슷하게 진행하면 될 거야.”

조지 소로스가 놀란 눈을 떴다.

그가 영국과 태국에서 행한 일은 그에게 과부 제조기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과격한 투자였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은 질리언이 맡을 걸세.”

프랭크의 말에 조지와 질리언이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조지는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고 질리언은 환희에 가득 찬 얼굴을 했다.

이만한 일을 질리언에게 맡긴다는 것은 프랭크가 은퇴를 생각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당주님!”

“지금 당장 물러난다는 뜻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게나.”

프랭크가 질리언을 지긋이 바라봤다.

‘언제 저렇게 컸는지.’

질리언이 어렸을 때, 그러니까 프랭크의 아들이 살아 있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는 애교도 많았는데 말이야.’

언제부터 이렇게 멀어졌을까.

생각하던 프랭크는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 저놈도 내 선택을 이해해 주겠지.’

생각을 마친 그가 질리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해낸다면 정식으로 후계자가 되는 것이다. 해 보겠느냐.”

“해 보는 게 아니라 해내겠습니다.”

질리언의 패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프랭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

며칠 뒤.

질리언의 말대로 정말 5,000억 달러가 입금됐다.

그것도 차근차근 입금된 것도 아닌 한 번에.

그렇다는 얘기는 이 돈이 로스차일드 한 곳에서 나온 자금은 아니라는 뜻이다.

아무리 로스차일드라고 하더라도 이만한 돈을 한 번에 마련할 수는 없기 때문.

그렇다는 얘기는.

‘빌더버그의 대부분이 이번 계획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호재였다.

이번 일은 아군이 많으면 많을수록 수익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은.

적인 빌더버그의 수익도 늘어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의 선택이다.

백문과 빌더버그가 둘 다 내 적이 맞긴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백문에 가진 원한이 더 많았다.

그리고.

두 놈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보다는 한 놈씩 제거하는 게 편하기도 했다.

급한 문제가 해결되어 약간은 가벼운 마음이 들었다.

오랜만에 술 생각이 들어 숙소 근처 편의점에 가서 맥주를 샀다.

치익. 꿀꺽.

돌아오는 길에 있는 바위에 앉아 시원하게 한 모금 들이켰다.

후덥지근한 홍콩 날씨가 잊히는 느낌이다.

그렇게 여유로운 한때를 만끽할 때.

탁.

아무도 없는 길 중턱에 이질적인 소리가 났고.

쎄엑. 푹.

등 뒤에서 칼이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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