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화
살네만을 만나고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마음 같아서야 바로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었지만.
몇 가지 일 처리를 하느라 늦었다.
그동안 병원 신세를 졌던 리우는 완전히는 아니지만, 이제는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회복됐다.
최효석은 저택으로 복귀한 리우를 꽤 잘 챙겨 줬다.
물어보니 나를 지켜 줘서 고마워서 그런다고 했다.
영 꺼림칙했지만.
뭐, 리우가 없었으면 그날 난 죽었을 테니까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긴 하다.
비고르와 요원들은 연락을 담당할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그가 떠나면서 알려 준 바로는 앞으로 비고르 자신이 나를 전담으로 맡아 조력을 해 주기로 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데이사르와의 관계는 일종의 상호적 동맹 관계로 정리됐다.
나를 죽이기 위해 요원까지 보냈던 터라 아무래도 관계 개선이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서로 백문이란 공통의 적을 가지고 있어 쉽게 설득할 수 있었다.
데이사르와 백문의 적대는 2회차에서 알게 된 사실이다.
갈등의 시작은 중국이 유럽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계획인 일대일로부터 시작했다.
아무리 데이사르의 기치가 인류의 평화라고 해도.
자신들의 본거지 쪽으로 영향력을 키우는 중국이 반가울 리가 없는 건 당연했다.
‘이 점을 정확히 짚고 들어가 그들을 설득했지.’
즉, 서로 공동 전선을 펼쳐 함께 백문을 상대하기로 약조했다.
일을 마무리한 나는 모두와 함께 한국으로 떠나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
최효석과 리우, 시큐리티 요원들과 함께 최효석의 복귀 기념 회식 장소로 향했다.
“최 사장님!”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신종민이 들어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는지 버선발로 뛰어왔다.
왠지, 내가 올 때보다 더 반가워하는 느낌인데….
“으하하하! 잘 있었는가. 우리 신 회장!”
이산가족 상봉이 눈앞에서 이루어졌다.
“엘.”
뒤에서 휴가를 마치고 복귀한 제니가 반갑게 인사했다.
“제니, 이제 완전히 복귀한 겁니까?”
“네, 집안 문제도 대충 해결됐고 아버지도 건강하시니 제가 옆에 있을 이유가 없어서요.”
글쎄, 이강진 회장의 생각은 다를 것 같은데….
내 반응이 시원치 않았는지 제니가 뚱한 얼굴로 노려봤다.
“설마? 저 복귀한다니까 월급 아까워지신 거예요?”
“어라? 걸려 버렸네요.”
“뭐예요!”
그렇게 반가운 재회를 마치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치이익.
돼지갈비가 맛있게 익어 가는 소리가 났다.
최효석이 침을 꿀꺽 삼키며 최적의 타이밍을 기다렸다가 한 점을 들어 자신의 입에 털어 넣었다.
그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갈비를 씹어 삼켰다.
“뭐 해? 어서 먹지 않고. 내가 사는 거니까 마음껏들 먹으라고.”
“네!”
그와 같은 테이블에 앉은 요원들이 힘차게 대답하더니 고기와 술을 가져다가 먹기 시작했다.
“우리도 먹죠.”
“네.”
“제가 굽겠습니다.”
신종민이 집게를 들고 고기를 뒤집기 시작했다.
“위하여!”
옆에서 최효석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보통이라면 식당 주인이 제재하겠지만 이곳은 그럴 염려가 없는 곳이다.
많이 팔아 줘서? 아니다.
통째로 전세 내서? 아니다.
이유는 바로.
“이 등신 같은 놈이 애미한테 연락도 없이 시베리아에 일 년이나 박혀 있어?! 넌 처먹을 자격도 없어.”
최효석 어머니의 가게이기 때문이다.
“아 진짜! 쫌. 애들 보고 있는데!”
“뒤지기 싫으면 입 다물고 처먹기나 해!”
먹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앞에 앉아 있는 최효석의 어머니가 연신 고기를 구워 최효석의 앞 접시에 놓아 줬다.
“…갑자기 엄마 보고 싶네.”
제니가 아련하게 중얼거렸다.
“다 익었습니다. 어서 드시죠.”
“그럼 우리 소주 한잔할까요? 어때요. 엘?”
“좋죠.”
제니가 냉장고에서 이슬을 가져와 각자의 잔에 따라 줬다.
“이게에 무야?”
리우가 어색한 한국말로 제니에게 물었고.
“소주요. 보드카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돼요.”
제니가 유창한 영어로 대답했다.
리우가 한 잔 마시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입에 맞지 않는 모양이다.
대신 갈비는 입에 맞았는지 몇 점씩 집어 먹었다.
덕분에 테이블에 있던 갈비가 빠른 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신종민이 갈비를 열심히 구웠지만.
엘리트 집안의 장남 아니랄까 봐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혔는지 고기 굽는 속도가 느렸다.
“이리 주시죠. 제가 구워 드릴게요.”
“아닙니다. 어떻게 회장님께서….”
왈가왈부하기 귀찮아서 그의 손에 있는 집게를 빼앗아 왔다.
“오늘은 그냥 드시죠. 그렇게 느리게 구우면 여기 있는 사람 모두 굶습니다.”
내가 바통을 이어받고 고기 굽는 속도가 빨라졌다.
안주가 생기자 다들 술을 마시며 테이블의 텐션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 재밌는 시간을 보내는 중에 최효석이 의자를 들고 오더니 테이블 끝에 놓고 앉았다.
“신 회장, 잘 지냈지?”
“네, 저야 잘 지냈습니다. 딱 봐도 얼굴이 편 것 같지 않습니까?”
저건 거짓말이다.
신종민은 지금도 하루 4시간만 자며 일에 매진한다.
“흐흐흐, 뭘 얼굴이 펴.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얼굴이구먼.”
“어라?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렇게 악담만 퍼부으실 겁니까?”
두 사람이 서로 농담을 주고받다 술을 나눠 마시며 의기투합했다.
최효석과 친분을 쌓은 리우가 끼고 싶었던지 어색하게 잔을 내밀었다.
즐거운 시간이 지나고 하나둘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았다.
우리 테이블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술이 약한 제니가 가장 먼저 취했고 밖에서 대기 중이던 그녀의 수행원이 데리고 갔다.
저런 걸 보니 제니가 이 회장의 하나뿐인 딸이란 게 새삼스레 느껴졌다.
그나저나 이 회장의 아들들은 어떤 처분을 받았는지 궁금해졌다.
‘이재현은 감옥에 갔고.’
그는 얼마 전에 내게 뒤집어씌우려던 음주 뺑소니 혐의로 재판에서 무기 징역을 선고받고 감옥에 수감됐다.
초범에 과실 치사 혐의로는 거의 법정 최고형이나 다름없는 판결.
그도 그럴 것이 저번 사태가 끝나자마자 이 회장은 이재현의 모든 자산을 빼앗았다.
덕분에 이재현은 변호사도 사지 못했고 심지어 무슨 압력을 넣었는지 국선 변호사도 붙지 않았다.
덕분에 이 회장은 ‘잘못이 있으면 아들이라도 감옥에 보낸다.’라는 대쪽 같은 이미지가 생겨 국민에게 칭송받았다.
이런 걸로 보아 이재현의 형들도 무거운 처벌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된다.
식당 내부를 둘러보자 이제 진짜 주당들만 남았는지 삼삼오오 모여 앉아 서로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게 보였다.
그런 분위기에 신종민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 달 전에 첸에게 연락이 왔었습니다. 회장님이 연락이 안 된다고 하더군요.”
한 달 전이면 데이사르의 습격을 받은 직후다.
정신이 없어 연락 온 것도 몰랐던 모양이다.
“뭐라고 합니까?”
“일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수행원 몇을 보내 줬습니다.”
“혹시 따로 전한 말은 없습니까?”
“흠…. 아! 보고 싶다고 전해 달랍니다.”
실없는 소리에 웃음이 났다.
하긴, 떨어진 지 꽤 오래됐다.
“그리고,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조만간 큰일이 벌어질 것도 같다고 했습니다.”
생각보다 일의 진행 속도가 너무 빠르다.
‘너무 빠르면 위험한데….’
아무래도 조만간 한번 가 봐야 할 것 같다.
“자자, 잔에 소주 한 잔씩 채우셔들.”
요원들과 술을 마시던 최효석이 혀가 꼬부라진 발음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일단, 오늘은 즐기자.’
다음 날.
오랜만에 사옥을 찾았다.
전에 로비에서 나를 막았던 가드가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잘 지내시죠?”
“회장님의 하늘과 같은 은덕에 몸 둘 바를….”
안부를 물었더니 이상한 소리가 나온다.
말이 길어지기 전에 그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출근도 하지 않고 언론에 얼굴을 비치지 않으니 임원들과 직원들이 나를 못 알아보는 눈치다.
특히, 오늘같이 청바지에 후드티를 입고 온 날은 짐작도 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처음 인수했을 때야 회사를 정상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몇 번 찾았지만.
회사가 정상 궤도에 올라가고 신종민이 아주 잘해 주고 있는 모습에 내가 찾아와 봤자 부담이란 생각이 들어 발걸음을 끊었다.
군대에서도 사단장이 방문하는 날이면 산을 깎는다는 농담이 있지 않은가.
100년도 지난 일이지만 그 생각만 하면 온몸이 부르르 떨린다.
엘리베이터를 타자 옆에 있는 나이 지긋한 남성이 힐끗거렸다.
머리가 벗어진 거로 보아 아마도 회사 일이 고단한 듯 보였다.
‘신 회장에게 회사 복지를 좀 챙기라고 해야겠어.’
전생에서부터 보아 온 그의 경영 철학은 바닷물에 비유할 수 있다.
짜다. 너무 아낀다.
탕비실에 놓을 커피 믹스 한 상자를 주문하려고 해도 몇 번이나 결재를 받아야 하는 정도다.
이런 마당에 회사 복지야 말해 뭐하겠는가.
‘존나게 아끼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엘리베이터에 타서 회장실이 있는 29층을 누르자.
“회장님과 아는 사인가 보고만. 동생? 아니면 지인?”
“지인입니다.”
내 정체를 말하기엔 왠지 닭살 돋을 것 같아 그냥 지인이라고 둘러댔다.
사실, 지인도 틀린 말은 아니지 않기도 했고.
띵.
엘리베이터가 중간에 서자 머리가 벗어진 중년의 남성이 내리면서 말했다.
“신 회장님과 가깝게 지내면서 잘 배우게. 내가 이 회사만 30년을 다녔지만 나이를 떠나 존경할 만한 분이라네.”
“예, 명심하겠습니다.”
신종민이 잘하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직원들의 존경까지 받는 걸 보니 마음이 흡족해졌다.
내 머릿속에서 신종민의 성과급 금액이 대폭 상승했다.
회장실에 도착하니 신종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맞아 줬다.
“오늘도 커핍니까?”
“두말하면 잔소리죠.”
그가 커피 믹스 세 봉을 넣은 커피를 타서 내밀었다.
“그나저나 회사 분위기가 아주 좋네요.”
“감사합니다.”
“아! 오면서 생각난 건데 회사 복지를 좀….”
띠리리리.
복지에 대해서 말하려던 찰나,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신종민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받으시죠. 회사 일이 먼저 아니겠습니까.”
발신 번호를 확인한 신종민이 반가운 얼굴을 했다.
“첸?”
-…….
“네?!”
-…….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신종민이 다급하게 외쳤다.
“첸이 쫓기고 있답니다!”
신종민의 외침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경우의 수가 생각났고 결론을 내렸다.
‘걸렸구나.’
첸이 수행하던 일이 백문에게 발각됐다면 당장이라도 첸의 신변이 위험하다는 뜻이다.
“제가 가겠습니다. 신 회장은 빅터를 찾아 첸의 위치를 확인해 주세요.”
“네.”
사옥에서 나오자마자 최효석에게 전화했다.
“형님, 여권 챙겨서 가능한 모든 요원을 데리고 인천공항으로 와 주세요.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
심각한 상황이라고 느꼈는지 그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차로 돌아가자마자 이강진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의 집 귀한 딸에게 술을 이렇게나 많이….
시간이 급해 그의 말을 끊었다.
“전용기를 빌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