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화
도망치라는 리우를 무시했다.
이놈과 정이 들어서가 아니다.
또한, 내가 용기가 넘쳐나서 목숨을 도외시하고 싸우려는 것도 아니다.
‘각이 안 보여.’
빠져나간다고 하더라도 밖에 있는 저격수의 눈에 뜨인다.
그리고 100%에 가까운 확률로 머리통에 구멍이 뚫릴 게 분명하다.
‘차라리 함께 싸우는 게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쿵. 쿵.
머리 위에서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2층에 침투한 적들이 계단을 내려오는 모양.
치이익.
곧이어 계단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며 적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탕. 탕.
리우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흐흐, 어디 한번 죽여 봐. 이 개새끼들아.”
광기에 찬 리우가 중얼거리며 투지를 불태웠다.
쾅!
문이 열리며 밖에 있던 적들 또한 진입했다.
총을 갈겨 그들 중 몇을 처리하는 데 성공했지만.
철컥. 철컥.
총알이 떨어졌다.
이제 남은 건 연막탄 하나와 권총 한 자루.
놈들이 문을 돌파하고 1층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시팔.’
욕이 절로 나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죽는다.
엄폐물에서 일어나 권총으로 놈 중 하나의 다리를 노렸다.
탕.
허벅지가 꿰뚫린 놈이 고꾸라졌다.
옆에 있는 놈을 노리고 한 번 더 사격했다.
탕. 탕. 탕.
놈이 비켜 맞았는지 잠시 주춤했지만,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철컥.
권총의 총알 역시 떨어졌다.
총알이 떨어진 걸 확인한 반대편 놈이 나를 겨누고 있는 게 보였다.
재빨리 몸을 틀었지만.
탕.
총알이 오른팔 어깨를 뚫고 지나갔다.
순간적으로 몸을 틀지 않았다면 심장이 꿰뚫릴 뻔했다.
총알이 관통한 충격에 뒤로 넘어졌다.
쓰러진 시야로 리우의 몸 여기저기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게 보였다.
치명상은 아닌 것 같지만 조금만 있으면 과다 출혈로 인해 전투 불능에 빠질 게 분명했다.
‘이대로는 죽는다.’
마지막 하나 남은 연막탄을 던졌다.
치이익.
1층에 연기가 가득 찼다.
피아 식별이 힘들어진 적들의 총성이 멈췄다.
“리우!”
그의 어깨를 잡고 좌측에 있는 복도를 가리켰다.
리우가 기다시피 뛰었고.
나 역시 허리에 찬 나이프를 빼 들고 뛰었다.
그쪽을 지키고 있던 적이 리우가 나타나자 총을 겨눴다.
퍽!
리우의 뒤에서 나이프를 던져 얼굴 어딘가를 꿰뚫었다.
그대로 달려 방문을 걷어참과 동시에 리우를 끌고 들어갔다.
문을 닫고 방을 살펴보니 무기가 될 만한 건 장우산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리우를 살펴보니 권총을 들어 올릴 힘도 떨어졌는지 팔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이 문을 열고 적들이 몰려들 터.
상처도 입었고 무기도 없다.
하지만, 절대로 살아남는다.
누구든 문을 열고 들어오면 목을 뚫어 버릴 요량으로 방 안에 있던 우산 하나를 반으로 쪼갰다.
절대로 살아남아 주마.
그렇게 투지를 불태우고 있을 때.
탕. 탕. 쾅!
밖이 총성으로 시끄러워지더니.
“끄악!”
비명이 들리며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10분이나 지났을까?
철컥.
문이 열렸다.
“잘 있었어?”
그리고 이 순간 가장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
“어이구, 어이구. 잘하는 짓이다. 그깟 놈들한테 총이나 맞고.”
최효석이 어깨에 붕대를 감고 있는 나를 타박했다.
“우리 떠나고 경호원들 한 명도 안 뽑았어?”
“형님이 시베리아에 이렇게 오래 계실 줄은 몰랐죠.”
내 말에 그의 입가에 조소가 지어졌다.
“유리를 잡았다면서요?”
툭. 데구루루.
최효석이 대답 대신 내 앞으로 보자기로 싼 무언가를 던졌다.
“…유리의 머리네요?”
“그래, 죽여서 모가지 잘라 왔다.”
머리를 내려다보는 최효석의 눈에 후련함과 아련함이 깃들었다.
“한국으로 같이 가실 거죠?”
“이곳에 있는 애들 무덤 들렀다가 가자.”
“그러시죠.”
최효석의 거취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 문이 열리며 비고르가 들어왔다.
“다 잡아 놨습니다. 나오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비고르.”
“그나저나 병원은 안 가 봐도 되겠습니까? 어깨가 뚫렸는데.”
“괜찮습니다. 저는 나중에 알아서 갈 테니 저기 저 사람이나 챙겨 주세요.”
비고르가 리우를 착잡한 눈으로 바라봤다.
리우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총알이 옆구리를 스치고 간 것은 물론 허벅지와 종아리가 총알에 꿰뚫렸다.
“크크크, 그래도 재밌었지 않냐?”
주둥아리만 멀쩡해 나불대는 것만 빼고 말이다.
잠시 후, 비고르 휘하의 요원들이 리우를 데리고 나가고 나는 1층 로비로 이동했다.
“저들뿐입니까?”
“저항이 심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사살되었는지 3명만이 내 앞에 묶여 있었다.
나는 한 명을 골라 그의 앞으로 가 쪼그려 앉았다.
“어디서 왔냐?”
“…….”
영어를 못 알아듣는 것인지 못 알아듣는 척을 하는 것인지 그가 모른 척을 했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들의 정체는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전투가 끝나고 알게 된 거지만.
“데이사르?”
“……!”
잡혀 있는 놈들이 깜짝 놀랐는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게 보였다.
그들의 반응에 확신이 들었다.
“우린 데이사르가 뭔지 모른다.”
“그래?”
한 명이 발뺌했다.
나는 복도에 널브러진 총알 하나를 주워 그의 눈앞에 내밀었다.
“그럼 십자가 문양이 그려진 총알은 어디서 났는데?”
“원래….”
“원래 이렇게 나오는 제품이라는 개소리는 하지 마. 이거, 개개인이 수작업으로 하나하나 새기는 거잖아.”
정곡을 찔렀는지 가장 구석에 잡혀 있는 놈이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맞다. 우린 데이사르에서 나왔다.”
안 그래도 데이사르와의 접촉을 바랐던 내게는 고대하던 대답이었다.
이제, 문제는 어떻게 윗선을 만나느냐인데….
“비고르. 요원들을 물려 주십시오.”
내 말에 비고르가 요원들을 데리고 나갔다.
“이제 말해 봐. 왜 나를 잡으러 왔는지.”
“그걸 몰라서 묻나? 아니면, 여태 저지른 악행이 너무 많아서 왜 우리가 온지 짐작하지 못하겠나?”
“악행이라…. 너희가 나를 죽이러 온 건 선행이고?”
“흥, 인류의 암세포를 차단하는데 상처가 없을 수 있나.”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도 당당한 태도.
놈의 눈빛에 신념이 가득 찬 게 보였다.
“데이사르 놈들은 다 똑같군.”
“우리 형제들을 만나 본 적이 있나 보군.”
있지. 아주 많이.
나를 쫓다 죽은 데이사르 놈들의 숫자가 2개 중대는 넘을 테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지. 너희의 대표를 만나고 싶다. 아니면 책임자라도.”
퉤.
내 말에 놈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입을 열지 않겠다는 뜻.
사실, 저럴 줄 알고 있었다.
2회차에서도 이놈들은 전부 저런 태도였다.
“너희가 나를 죽이러 온 이유가 석탄 때문이지?”
“알고 있군.”
“그럼 내가 제안 하나를 하지.”
“…….”
“너희를 보낸 책임자를 만나게 해 줘. 그러면 너와 네 동료를 풀어 주마. 매우 안전하게.”
“개소리하지 마라!”
예상한 반응이다.
그렇다면 조건의 허들을 낮출 수밖에.
“오케이. 만남은 포기하마. 대신 전화만 한 통 하게 해 줘. 그 정도는 괜찮지 않아?”
내 말에 그가 자신의 동료들을 바라보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핀란드의 어느 고즈넉한 저택.
마치 궁궐과 같은 이곳 회의실에서 저택의 주인인 살네만 백작이 회의를 주도하고 있었다.
“아직도 연락이 없단 말이오?!”
“조금만 기다려 보시지요. 우리 요원들이 곧 놈을 사살하고 돌아올 것입니다.”
“작전이 실행된 지 벌써 반나절이 흘렀소. 지금쯤이면 진작 끝났어야 하는 게 아니오?”
“…….”
회의실에 앉아 있는 이들이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사실, 모두가 작전의 실패를 짐작했다.
다만, 그걸 입 밖으로 내뱉는 게 괴로워 긍정적인 말만 되풀이했을 뿐이다.
반면, 살네만의 마음이 무거웠다.
이번에 보낸 요원들은 단순히 군인들이 아니다.
그의 가문을 지키는 구성원이자 그의 봉신들이며.
지휘관은 살네만과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친우였다.
이대로 죽게 놔둘 수는 없었기에 살네만은 그들을 구출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당장 그들을 구할 방도를 찾으시오.”
“예!”
회의실 모두가 대답과 함께 우르르 빠져나갔다.
“휴….”
그가 한숨과 함께 데이사르의 정기 회의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데이사르.
유럽 각국 귀족들의 모임이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하는 단체다.
그동안 인류를 위협하는 자들을 앞장서서 제거해 온 데이사르에서 이신후의 이름이 나온 것은 당연했다.
자신의 부를 쌓기 위해 석탄을 불태운 악당.
단순히 가격만 올라간 것이 아니다.
1억 톤이 넘는 석탄을 불태워 일시적인 석탄 부족 현상을 일으켰다.
그 때문에 제3 세계라 불리는 많은 개발도상국의 화력 발전소는 멈췄고 심각한 전력난에 국민은 고통받았다.
이대로 놔둘 수는 없는 일.
데이사르에서는 결국 이신후를 제거하기로 결의했다.
그 임무를 맡은 게 바로 데이사르 12 가문 중 하나인 살네만의 가문이었다.
살네만이 심란한 마음을 풀기 위해 뒤에 있는 술을 한 잔 따랐을 때.
지이잉. 지이잉.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무언가 불안감을 느낀 살네만이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헬로.
저음의 목소리.
누군지 짐작이 된다.
“이신후?”
-맞다.
“지금 우리 요원들을 데리고 있나?”
-그쪽이 나를 죽이려 보낸 이들을 말하는 건가?
“…그래.”
-대부분 죽었다고 봐야지? 3명을 제외하곤 전부 사살했으니까.
살네만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의 분노가 회의실을 꽉 채웠다.
“하나만 묻지. 생존자 중에 다미르가 있나?”
살네만의 물음에 전화기 너머로 사람을 찾는 소리가 들리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백작님.
그의 둘도 없는 친우의 목소리였다.
“…다미르.”
-죄송합니다.
“아니다. 놈들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내 잘못이다. 몸은 괜찮은가.”
살네만이 다미르의 안부를 묻자, 다시 처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확인했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그가 죽으면 너도 죽는다.”
-안 그래도 나를 죽이기 위해 사람을 보내지 않았나?
“인정하지.”
-이들을 풀어 주마.
살네만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기껏 잡은 이들을 풀어 주다니.
그것도 자신을 죽이러 온 이들을.
그가 곧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진짜냐?”
-대신 조건이 있다.
“뭐냐?”
-이들을 데리러 네가 직접 와라. 물론, 낡게 혼자만 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몇 명을 데려와도 상관없다.
“알았다.”
***
다음 날.
간단히 아침을 먹고 정원으로 나서니 최효석과 시큐리티 요원들이 인질들을 데리고 정원 곳곳에 서 있었다.
간단히 인사하고 정원 구석에 담배를 물고 앉으니 다미르가 나를 바라봤다.
“왜? 너도 한 대 줄까?”
끄덕. 끄덕.
그의 손을 묶은 줄을 풀어 주고 담배와 라이터를 건넸다.
“휴우…. 살 것 같네.”
죽을 고비를 빡쎄게 넘겨서 그런지 담배가 달았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저 멀리 헬기 한 대가 날아오는 게 보였다.
두두두두.
잠시 후, 커다란 키를 가진 금발의 중년인이 헬기에서 내렸다.
“살네만이다.”
“이신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