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화
촤악.
차가운 바다를 뚫고 방파제에 도달했다.
거대한 석탄 적하기가 마치 거인의 팔처럼 웅장하게 솟아 있었다.
근처에 있던 요원들과 눈을 마주쳤다.
끄덕.
4개 조로 나뉜 그들이 각자의 작전 위치를 찾아 흩어지기 시작했다.
리우와 함께 항구의 중앙 관제 센터로 움직였다.
조용히, 그리고 은밀하게.
이번 작전의 핵심이다.
발걸음을 조심하며 움직인 지 20여 분.
눈앞에 관제 센터가 보였다.
철컥.
문 안으로 진입해 긴 복도를 살폈고 사람이 없는 걸 확인했다.
재빨리 발걸음을 옮겨 복도 끝 계단으로 다가갔다.
그때, 계단 앞 사무실의 문이 열리며 사람이 나타났다.
“누구…?”
콰직.
앞서 가던 리우가 주먹에 무게를 실어 턱을 후려쳐 넘어뜨렸다.
딱 봐도 정신을 잃은 모양새다.
‘Go!’
리우가 손가락으로 계단을 가리켰다.
뒤따라갈 테니 먼저 올라가라는 뜻이다.
재빨리 발을 움직여 계단을 올랐다.
2층, 3층, 그리고 마지막 4층.
새벽 시간대라서 그런지 올라가는 동안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4층 관제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뉴캐슬항이 한눈에 보였다.
남쪽의 석탄 구역이 깜깜한 거로 보아 아직 요원들이 도달하지 못한 모양이다.
“누구십니까?”
관제실 옆 작은 사무실에서 항만 직원 하나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옆에 있던 리우가 권총 라이터를 꺼내 들고 항만 직원의 머리를 겨눴다.
“히이익!”
항만 직원이 양손을 번쩍 들고 바닥에 고개를 처박는다.
“사, 살려 주십시오.”
리우가 나를 향해 윙크했다.
그가 부산에서 권총 모양 라이터를 구해 왔을 때 안 통한다며 비웃었던 게 생각났다.
‘저게 진짜 먹히다니.’
어이가 없지만, 작전에 도움이 된 건 사실.
항만 직원의 뒷덜미를 잡아끌어 올렸다.
“지금 당장 경보 울리고 관제 센터에 테러리스트가 침입했다고 전해.”
“네, 네?”
“귓구멍 막혔어? 총알로 뚫어 줄까? 경보 울리고 여기로 경비들 부르란 말이야.”
“네, 넵!”
항만 직원이 관제 기판 어딘가를 누르고 관제 센터에 침입자가 발생했다고 알렸다.
그가 시켰던 일을 완수하고 나와 리우를 두려운 눈으로 돌아봤다.
콰직.
리우가 권총 라이터로 그의 목덜미를 쳐서 기절시켰다.
“…이제 그냥 손부터 나가는구나.”
“귀찮은 거보단 낫잖아. 안 그래?”
너스레를 떠는 리우를 무시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이제 곧 이곳으로 뉴캐슬항의 해양 경찰과 경비들이 몽땅 몰려올 터.
최대한 오랜 시간을 끌어야 한다.
위이잉. 위이잉.
잠시 후, 사이렌 소리가 들리더니 해경과 경비들이 관제 센터를 둘러쌌다.
그들 중 가장 선임자로 보이는 이가 확성기를 잡았다.
“너희는 포위됐다.”
전형적인 대사.
포위됐다는 소리를 무시하고 1층에 쓰러져 있던 직원을 깨워 일으켜 세웠다.
아무 대답 없이 시간이 지체되자 그들의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몇몇이 1층의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들이 플래시로 나와 리우를 비추며 총을 겨눴다.
우리는 두 명.
저들은 수십 명이 넘는 상황.
당연히 X랄이 덜덜 떨리는 상황이 맞지만.
우리에겐 비장의 무기가 존재했다.
“손들어!”
“싫은데?”
항만 직원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관제 센터에 들어온 이들이 적잖이 당황한 게 보였다.
비열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악당이 정의의 사도를 이기는 유일한 프로세스가 인질극 아니겠는가.
손에 힘을 줘 항만 직원의 목에 상처를 냈다.
“한 발짝만 움직이면 이놈 모가지에 바람구멍 난다.”
“으히힉!”
상처가 난 항만 직원이 몸을 덜덜 떨었다.
‘이거 스릴 있는데?’
오랜만에 해 보는 인질극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들고 있는 총 바닥에 내려놓고 문 닫고 나가. 인질의 목숨은 보장할 테니까.”
“개소리하지 말고 당장 칼 내려놔!”
“어라? 이 친구가 죽어도 상관없어?”
꾸욱.
주르륵.
칼에 더욱 힘을 줬다.
피가 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 알았다! 총을 내려놓을 테니 그만해라!”
그들이 천천히 바닥에 총을 내려놓더니 문밖으로 나갔다.
리우가 얼른 움직여 그들이 내려놓은 총을 회수해 왔다.
“휴우….”
일차적인 위기는 넘겼다.
이제 요원들이 임무를 시작하기만 기다리면 된다.
작전 상황을 확인해 보기 위해 인질을 데리고 다시 4층으로 올라갔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해경들이 관제 센터를 철저히 둘러싸고 있었다.
그렇게 약간의 대치 시간이 지나자.
퍼엉!
펑! 쾅!
뉴캐슬항 남쪽, 석탄 구역에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요원들이 임무를 시작한 듯했다.
‘이제 조금만 더 시간을 끌면 된다.’
리우와 눈을 마주치니 그가 의자를 던져 4층 관제실의 창문을 깨부쉈다.
쨍그랑.
깨어진 유리 조각이 밖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아래에서 포위하고 있던 해경들이 우리를 올려다봤다.
리우가 인질의 멱살을 잡고 창밖으로 잡아 올렸다.
“으, 으악!”
인질이 4층에서 떨어질까 무서워 비명을 질렀다.
해경들이 우리 쪽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는 게 보였다.
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당장 폭발지로 움직여야 했지만.
눈앞에서 사람이 떨어질 게 뻔히 보이는데 놔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일 테니까.
펑! 펑!
화르륵.
석탄 구역에 화염이 치솟았다.
마치 화산이 폭발한 것처럼 연기와 재가 치솟아 올랐다.
결국, 그들은 인원을 반으로 나눠 폭발지로 움직였다.
‘이제 됐다.’
그렇게 포위가 약해진 걸 확인한 뒤, 리우와 함께 인질을 붙잡고 관제 센터를 나갔다.
사방에서 총을 겨눈 해경들이 보였다.
보통의 조무래기 빌런 같았으면 무서워 벌벌 떨겠지만.
뭐든 극에 이르면 평온을 찾는 법.
나는 태연하게 인질의 머리에 총을 겨눈 채로 조금씩 걸어 나갔다.
“따라오면 인질은 죽는다.”
내 말에도 그들이 조금씩 따라오자 옆에 있던 리우가 총을 쐈다.
탕!
“으악!”
맞추진 않았지만, 귀 바로 옆에서 총을 쐈기에 인질이 귀를 잡고 비명을 질렀다.
대치하는 이들이 흠칫 놀라는 게 보였다.
그리고 더는 따라오지 않았다.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인질들을 기절시키고 뛰었다.
“리우, 가자.”
“Okay.”
그렇게 10여 분, 바다가 보였다.
첨벙.
혹시라도 발각될까 숨쉬기를 최소화하고 잠영으로 화물선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흐읍.’
그러기를 10여 분.
화물선 밑부분이 보였다.
측면에 밧줄 하나가 내려와 있었다.
“리우! 올라가서 전부 도착했는지 확인해서 알려 줘!”
리우가 밧줄을 붙잡고 화물선에 올랐다.
그리고 그가 내게 소리쳤다.
“최하고 민이 도착하지 않았어!”
최준현이 속한 조가 도착하지 못했다는 소리다.
‘뭐가 잘못됐나?’
조금 있으면 항구의 전력들이 우리를 쫓을 게 분명한 상황.
요원들이 죽는 건 상관없지만 만일 붙잡히기라도 한다면 큰 문제다.
마음이 급해졌다.
에이 시팔.
속에서 욕지거리가 올라왔다.
그리고 다시 발을 움직여 항구 쪽으로 헤엄쳤다.
촤악. 촤악.
약간 떨어진 곳에서 물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빨리 그곳으로 몸을 옮겼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끌고 화물선으로 헤엄치는 게 보였다.
아마 작전 중 상처를 입은 모양.
다가가서 확인해 보니 부상자는 바로 최준현.
그를 잡아끌고 화물선 쪽으로 헤엄쳤다.
잠시 후, 우리는 화물선에 도착해 밧줄을 최준현의 허리띠에 묶었다.
“리우! 끌어올려!”
요원들과 리우가 밧줄을 끌어 올렸다.
최준현의 몸이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멀리서 빨간색과 파란색이 교차하는 불빛이 보였다.
아마 우리를 추격하기 위해 배를 띄운 모양.
리우에게 다시 소리쳤다.
“리우! 빨리!”
그러자 최준현이 올라가는 속도가 조금 더 빨라졌다.
잠시 후, 갑판에서 밧줄이 다시 내려왔고 우리는 그 줄을 잡고 배에 올라탈 수 있었다.
선장이 발을 동동 구르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요!”
선장이 재촉했다.
요원들과 함께 화물선의 맨바닥으로 내려갔다.
선장이 맨 구석의 내저판(화물선의 바닥)을 들어 올렸다.
“여기로 들어가십시오!”
요원들과 함께 그곳으로 들어갔다.
안을 보니 산소통과 식량을 포함한 갖가지 생존 물품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우리가 모두 들어간 걸 확인한 선장이 내저판을 다시 닫고는 용접을 시작했다.
치직, 치직.
불꽃이 튀며 내저판이 완전히 닫혔고.
쿵.
무언가 짐을 올린 듯 큰 소리가 들렸다.
작전이 완전히 끝난다고 생각됐는지 옆에 있던 리우가 혼자 중얼거렸다.
“휴…. 재밌었다.”
재밌었다고?
***
송동익 선장은 뱃사람 경력이 30년이 넘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동안 험한 뱃일을 하며 안 겪어 본 경험이 없었다.
그런 송동익 선장의 혼란은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전 신종민 회장의 연락을 받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예, 회장님! 송동익입니다.”
-신종민입니다. 전에 얼굴 한번 봤죠?
“네! 전에 뵌 적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송 선장님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신종민 회장의 부탁은 이러했다.
몇 명을 태워 호주 뉴캐슬항 근처까지 데려다주는 것.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다시 태워서 한국으로 돌아올 것.
내용만 들으면 단순했지만.
30년을 배에서 일한 송동익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출국 심사를 거치지 않은 인원들을 타국에 내려줬다가 다시 돌아온다?
이건 범죄에 연루된 부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송동익은 신종민의 부탁을 거절하려 했지만.
-그렇게만 해 주시면 가족들이 있는 미국 지사장으로 발령 내 드리겠습니다. 이제 나이도 차셨는데 언제까지 바다를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아! 미국 지사장이면 이사 직함인 거 아시죠?
미국 지사장이란 말에 수락했다.
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는 편한 일자리가 탐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시 후, 자세한 내용이 적힌 종이 한 장을 받았고 맨 밑줄을 보고 식겁했다.
[입.]
단 한 글자.
송동익은 보자마자 일을 수락한 게 후회되었다.
보통 일이 아니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거절할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기에 송동익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선원들의 동선을 조정해 손님들과 마주치지 않게 했다.
또한, 손님들이 있을 곳을 선원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 혼자 만들었다.
돌아올 때를 대비해 화물선 내저판을 뜯어내기까지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의 눈앞에 완전무장을 한 수십 명의 경찰이 나타났다.
“SRG(호주 대테러 경찰특공대)입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가장 선임자로 보이는 자가 송동익의 눈앞에 자신의 신분증을 보여 줬다.
선장의 권한으로 이들의 수색을 거절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되면 의심만 키우게 된다.
결국, 송동익은 이들이 배를 수색하는 것을 허락했다.
우당탕. 쾅.
SRG의 요원들이 배의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식당, 화장실, 지휘실 같은 중앙 시설부터 화물칸을 모두 확인하며 지나갔다.
그리고 어느덧 화물선의 가장 밑바닥까지 도달해 수색을 이어 나갔다.
“여기 용접된 자국이 있군요. 이건 뭡니까?”
“배 밑바닥을 수리한 적이 있습니다. 자국은 그때 생긴 거고요.”
SRG 요원이 의심의 눈초리로 그곳을 주시했다.
쾅! 쾅!
그가 발로 밟고 두들겨 확인하기 시작했다.
송동익의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아래에서 소리가 난다면 단박에 걸리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눈치챘는지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상 없군요. 협조 감사드립니다.”
송동익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수색을 마친 SRG 요원들이 화물선에서 내렸다.
그런 그들을 배웅한 송동익의 눈에 불타오르는 뉴캐슬항이 보였다.
그도 알고 있다.
오늘 내려 준 이들과 저 사건이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대체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른 거야.’
주위에 누가 없다면 절규하고 싶은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