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화
헤리슨이 노트북을 켬과 동시에 이강진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인가?
“예.”
-알았네.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첸에게 걸었다.
-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시작합니다. 상현에서 줍지 못한 주식들을 매수하세요.”
-예!
헤리슨이 HTS를 켜 페이퍼 컴퍼니의 계좌로 로그인했다.
백문이 경영권을 빼앗기 위해 모은 상현 전자의 지분은 33%.
현 시세로 80조에 달한다.
타탁. 탁. 탁.
그런 주식을 헤리슨이 노트북을 조작해 던지기 시작했다.
한 주당 170만 원이던 주가가 수직으로 내려가기 시작하더니 가격 제한 폭인 15%에 걸려 145만 원에 안착했다.
서킷 브레이커가 걸려 화면이 멈추더니 이내 다시 거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시작된 매수.
상현 그룹 측에서 단단히 준비했는지 31%의 매도 물량 중 10%에 가까운 양을 삼켰다.
남은 21% 중 11%는 첸이 미리 준비한 페이퍼 컴퍼니 계좌로.
나머지는 시장에서 흡수했다.
1시간이 흐르자 헤리슨이 노트북에서 손을 놓고 나를 돌아봤다.
그의 눈에 두려움이 가득 찬 거로 보아 내가 약속을 어기지 않을까에 대해 의심하는 듯 보였다.
“약속은 지킨다. 걱정하지 마.”
“아, 알았소.”
“그 전에 나 좀 도와줘야겠다.”
그렇게 나는 헤리슨과 함께 3구의 시체를 각각 커다란 캐리어에 넣고 인천으로 향했다.
***
진오청을 죽인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헤리슨을 은신처에 숨기고 시체들을 울산 조선소 용광로에 넣어 처리했다.
그리고 오늘.
리우가 헤리슨의 아들을 데리고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공항으로 향했다.
“피터!”
“아버지!”
“어디 다친 곳은 없고?”
“예.”
두 사람은 잠시 감격의 상봉을 나눴고 이내 비행기를 타기 위해 각자의 짐을 챙겼다.
앞으로 백문을 피해 숨어 살아야 하는 헤리슨의 눈빛에 증오가 담겨 있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되돌릴 수 없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나중에라도 그를 써먹을 수 있게 안전하게 지켜 주는 일뿐이다.
“그동안 죄송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시면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돈이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병 주고 약 주는 짓에 헤리슨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고맙소.”
그가 짧게 인사하고는 러시아행 비행기를 탔다.
그렇게 헤리슨을 배웅한 뒤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헤리슨의 아들을 데려온 리우가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내 뒤를 졸졸 쫓아온다는 것이다.
내 일을 도와준 놈이 떠나지 않는 게 뭐가 문제냐면.
놈은 미래에 살인에 미친 사이코패스가 되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안 돌아가?”
내 말에 리우가 동문서답으로 대답했다.
“이봐, 나를 원래부터 알고 있었지?”
알지. 아주 정확히.
2회차를 살던 당시 나를 죽이러 온 히트맨 중에서 유일하게 성공할 뻔한 놈이 바로 이놈이니까.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긴 나는 가장 먼저 놈의 뒷조사를 실행했고 큰 충격을 받았다.
딸과 둘이 사는 리우는 하나뿐인 혈육이 죽고 나자 미쳐 버렸는지 홀린 듯이 블랙마운틴이라는 PMC에 입사해 아프리카의 전쟁터로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리우는 수많은 인명을 살해했다.
전쟁터에서 살인이 뭐가 죄겠냐마는.
저놈은 어린아이를 포함한 민간인을 수십 명이나 죽였으니 문제가 되었다.
당연히 리우는 블랙마운틴에서 해고됐다.
그에게 있어서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일이 커지길 바라지 않았던 블랙마운틴에서 사건을 은폐해 리우는 처벌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후 그는 어둠의 세계에 뛰어들어 새로운 적성을 찾았는데 그게 바로 히트맨이다.
워낙 살인을 즐기는 미친놈인 데다 재능이 있었는지 나를 만나기 전까지의 성공률은 100%에 달했다.
리우의 가치를 알아본 나는 놈에게 마음껏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전쟁터에 데려다준다며 유혹했고.
놈은 내 말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미간 한복판에 구멍이 뚫릴 때까지 조직에서 큰 활약을 했다.
“아니, 그게 중요하냐고. 내가 돈을 떼어먹은 것도 아닌데 왜 안 돌아가는 거야?”
“어떻게 나를 알고 있는지 궁금해서. 말해 주면 돌아갈게.”
전생에서 만났다고 사실대로 얘기해 봤자 믿지도 않을 거라 대충 둘러대기로 마음먹었다.
“다크웹에서 봤어. 실력이 좋은 해결사가 있다고.”
“그래?”
“맞아. 이제 됐지? 빨리 미국으로 가서 나한테 받은 3천만 달러로 인생을 즐겨.”
“알았어. 돌아갈게.”
“그래, 그래. 잘 생각했어.”
“대신 한 달 뒤에 갈게. 그때까지 신세 좀 지자.”
“뭐?”
섬뜩하다.
빌런 조직의 수장으로 살던 2회차에서는 녀석을 영입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당연히 거절했지만, 리우의 고집은 만만치 않았다.
그는 이미 딸을 입원시킬 한국의 대학병원까지 알아봤다며 치료가 끝날 때까지 돌아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결국, 나는 리우를 쫓아내는 걸 포기했고 그를 내 오피스텔에 거주하게끔 했다.
서울 한복판에 이놈을 풀어 뒀다간 무슨 일이 생겨도 단단히 생길 것이고.
그럴 바엔 차라리 내 곁에 둬서 통제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리우의 딸이 아직 죽지 않아 놈이 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
오늘은 SC의 계열사들을 점검하는 날이다.
리우와 함께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오피스텔을 나섰다.
첫 번째 방문지는 SC 인베스트먼트.
내가 도착하자 첸이 버선발로 마중 나왔다.
“엘!”
“좋아 보이네요.”
“좋을 수밖에요. 이번 상현 전자로 얼마를 벌어들였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이번 상현 전자 건으로 벌어들인 돈은 10조 원이 넘는다.
블루스톤이 적대적 인수 합병을 선언함과 동시에.
첸은 상현 전자의 지분을 0.1% 이상 가지고 있는 주주와 기관들에 연락을 돌렸다.
당시 100만 원을 웃돌던 주식을 50만 원의 웃돈을 얹어 150만 원에 사겠다고 알렸고.
주주들은 얼씨구나 하며 주식을 넘겼다.
그렇게 넘겨받은 지분은 총 11%. 이걸 프리미엄을 얹어 백문 쪽에 한 주당 250만 원에 넘겼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내가 진오청을 죽이고 헤리슨을 협박해 31%에 달하는 주식을 풀었을 때, 오전에 받은 대금으로 시장에 쏟아져 나온 매물 11% 다시 매수했다.
즉, 26조 원을 투자해 40조 원에 팔아 14조 원의 수익을 얻고 14조 원의 수익금을 사용해 상현 전자의 대주주가 되었다.
당연히 첸의 기분은 날아갈 수밖에.
무슨 투자든 원금 손실 없이 큰 이익을 얻는 게 최고 아니겠는가.
“이번 수익 역시 저번과 같은 방식으로 배분하겠습니다. 첸이 직원들 기여도를 평가해서 나눠 주세요.”
“예!”
“그럼 앞으로 움직일 방향에 대해서 말해 봅시다.”
첸과 나는 회의를 시작했고 리우는 좀 듣다가 지루했는지 이내 의자에 앉아 잠들어 버렸다.
그렇게 회의를 마친 후, 나는 코를 골며 자는 리우의 곁으로 다가갔다.
“여, 일어나. 이제 다른 곳으로 가야 해.”
깊게 잠들었는지 일어나지 않는다.
“완전히 짐 덩이군.”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 흔들어 깨우려던 찰나.
수웅.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송곳 하나가 내 눈을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공격이라서 완전히 피하지 못해 눈 옆이 약간 찢어졌다.
“엘!”
첸이 놀란 듯 크게 소리쳤다.
“응?”
그 소리에 깬 리우가 그제야 상황 파악을 한 듯 손에 힘을 풀었다.
“미친놈이냐?”
“아…. 미안.”
하마터면 애꾸가 될 뻔했다.
연고와 밴드를 붙여 대충 치료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다음 목적지는 SC 오션.
리우는 오전에 그런 해프닝이 있었음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따라왔다.
솔직히, 그냥 쫓아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가란다고 갈 놈도 아니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운전기사로 쓸 요량으로 운전을 하라고 시켰더니.
“나 면허 없는데?”
이딴 개소리를 지껄였다.
덕분에 운전은 내가 하고 놈은 뒷좌석에 편안히 앉아 갔다.
오늘따라 최효석이 그립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신종민과 임원들이 1층 로비에서 나를 반겨 줬다.
부담스럽긴 하지만 이게 SC 오션의 사풍이라면 뭐, 어쩌겠는가. 그냥 받아들여야지.
그렇게 회의실에서 신종민이 SC 오션의 간단 현황을 발표하고 부문별로 자신들의 실적을 뽐냈다.
조선 부문은 미국발 금융 위기 때문에 발생한 조선 경기 하락을 피해 갈 수는 없었는지 SC로 사명을 변경한 이래 최악의 실적을 보여 줬다.
그만큼 발표 당시 부문장이 쩔쩔맸지만 저건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노릇이라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격려만 해 줬다.
신종민 역시 내 생각과 마찬가지인지 짧게 수고했다는 말로 발표를 종료시켰다.
중공업 부문은 아직 성과가 나질 않았다.
호주의 탐사 업체를 인수했지만, 아직 광구를 찾아내지는 못했고 플랜트 개발도 지지부진했다.
하지만, 이는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기에 이번에도 질책 대신 격려로 마무리했다.
마지막 발표를 맡은 상선 부문의 부문장은 표정이 좋다.
그도 그럴 것이 매출과 영업 이익이 둘 다 준수하고 전망도 밝다.
이번에도 역시 짧게 수고했다고 이야기하고 종료.
신종민에게 눈짓해 준비한 선물 보따리를 풀었다.
“어려운 시기 고생하는 임직원에게 특별 상여금을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짝. 짝. 짝. 짝.
역시 선물 중의 최고는 현찰 아니던가.
사실, SC 오션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인 부문은 없지만 잘나가던 기업도 푹푹 쓰러지는 요즘, 이 정도면 만족이다.
해서 이번 상현 전자 건으로 얻은 이익의 아주 일부분을 풀어서 베풀기로 마음먹었다.
시시각각 푸는 보너스만큼 임직원의 충성도를 높이는 일이 없고.
그래야 앞으로 있을 백문과의 전장에서 핵심 인력이 빠져나가는 일이 없을 테니까.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로 회의를 마무리하려던 때.
쾅. 쾅.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거 놔! 이신후 회장님!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한 번만 만나 주십시오!”
이윽고 내 이름까지 나왔기에 성큼 걸어가 대회의실의 문을 열었다.
“이거 놓으라니까!”
문을 열고 처음 본 광경은 회의실 안으로 들어오려는 직원과 그를 막는 보안팀 직원들.
무언가 사정이 있는지 직원의 얼굴이 많이 절박해 보였다.
“놔주세요.”
“회, 회장님!”
나를 본 직원이 소리쳤고 보안팀 직원들이 어정쩡하게 손을 놨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게….”
찾아온 직원의 눈이 내 뒤쪽의 임원들에게로 향했다.
아마 부담되는 모양.
“이곳에서 말씀하시기 부담스러우시면 조용한 곳으로 가시죠.”
뒤에 있는 신종민에게 눈짓하니 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제 방으로 가시죠.”
신종민의 사무실.
신종민이 나를 상석으로 보내며 직원과 마주 앉았고 리우는 문 앞을 지켰다.
사실, 사옥 안에서 무슨 일이야 있겠냐마는 그냥 귀찮아서 내보냈다.
워낙 험악하게 생기기도 해서 위압감을 조성할 수 있기도 했고.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내 물음에 직원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답을 했다.
“사, 상선 부문 영업 2팀장 김명진입니다.”
“무슨 일로 이렇게 찾아오셨습니까?”
“그, 그게….”
그가 우물쭈물하자 신종민이 따뜻한 커피를 주며 다독였다.
“천천히 드시면서 말하세요. 시간은 많습니다.”
거짓말이다. 저 사람은 지금도 하루 6시간 자고 나머지 시간 전부를 일에 매진하는 사람이다.
시간이 많을 리 없지만, 김명진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저렇게 말한 거다.
“어디 도망 안 가니까 마음 다스리고 얘기해도 됩니다.”
5분쯤 흐르자.
“후우….”
그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회사의 직원들이 마약 밀매에 가담한 정황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