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화
첸과의 통화를 종료하고 곧바로 리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이냐?
내가 전화한 이유를 짐작했는지 바로 대답이 나왔다.
“그래. 근처에 있다가 내가 신호를 주면 실행하면 된다. 전화하면 바꿔 주는 거 잊지 말고.”
-알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백문에게 한 방 먹여 주는 날이 될 것 같다.
***
SC 인베스트먼트 사옥.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그곳 주차장에 몸을 숨겼다.
그렇게 한 시간쯤 기다렸을까?
지이잉.
문자가 들어왔다.
[도착.]
그와 동시에 내려가 있던 주차장의 차단기가 올라갔다.
검은색 승용차 두 대.
각각의 승용차에서 금발의 남자와 동양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경호원들이 열어 주는 뒷문으로 내렸다.
‘진오청.’
아는 놈이다.
0회차에서 백문에 있었을 당시 외부의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대외부장으로 있던 놈이다.
후에 부문주의 자리까지 올랐던 놈이다.
옆에 있는 금발의 남자는 실제로는 처음 보지만 누군지는 잘 알고 있다.
블루스톤의 CEO인 헤리슨이다.
저벅. 저벅.
그렇게 그들은 사옥으로 올라가려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반대편 계단에서는 마중을 나왔는지 첸이 내려왔다.
“안녕하십니까? SC 인베스트먼트 대표 첸입니다.”
“반갑네.”
진오청이 거만하게 인사를 받는 게 보였다.
같잖은 새끼.
그렇게 그들은 협상을 위해 올라갔다.
협상은 얼마 걸리지 않고 끝날 것이다.
어차피, 판매 대금이 정해져 있기도 하고 최대한 빨리 끝내기로 첸과 말을 맞췄기 때문이다.
차에서 내려 헤리슨이 타고 온 차로 다가갔다.
주머니에서 사전에 준비한 만능 키를 꺼내 트렁크 열쇠 구멍에 끼워 넣는다.
드르륵. 드르륵. 찰칵.
소리가 나며 트렁크가 열렸다.
안쪽에 있는 열림 장치의 위치를 확인한 후 들어가 트렁크를 닫았다.
내 예상대로 협상은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고 휴대전화에 첸이 보낸 문자가 들어왔다.
[주식 인도 완료. 대금 확인. 남은 시간 5분.]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이강진 회장에게 문자를 보낸다.
[준비.]
잠시 후, 협상을 마치고 내려왔는지 발소리가 들렸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첸의 배웅 인사 소리.
“다음에 한번 보지.”
여전히 거만한 진오청의 목소리도 들렸다.
부우웅.
차가 출발했는지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1시간쯤 달렸을까?
차가 멈췄다.
바깥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수고했네. 이제 임시 주총만 끝나면 상현 전자는 우리 백문의 것이로군. 자네의 공로는 잊지 않겠네.”
“축하드립니다. 이제 문에서의 지위도 높아지시겠군요.”
“흐흐, 그야 당연하지.”
“올라가서 축배라도 한잔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오! 그것참 좋은 생각이군.”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아까 확인해 둔 열림 장치를 눌러 트렁크에서 나왔다.
‘백제호텔이군.’
장충동에 있는 5성급 호텔이다.
일을 치르기엔 장소가 영 좋지 않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는 없다.
재빨리 진오청 일행의 뒤를 쫓았다.
그들이 몇 층으로 가는지 확인하기 위해 호텔 로비에서 체크인을 하며 지켜봤다.
띵.
멀리서 진오청 일행이 엘리베이터를 타는 게 보였다.
잠시 서서 그들이 탄 라인의 엘리베이터가 몇 층으로 가는지 지켜봤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25층에 멈췄다.
나는 위조된 신분증을 내밀며 호텔리어에게 같은 층의 방을 주문했다.
“25층에 방이 있습니까?”
“현재 25층에 남은 방은 스위트룸밖에 없는데 괜찮으실까요?”
“상관없습니다.”
잠시 후.
나는 배정된 방에 입실했다.
하늘이 도왔는지 놈들의 바로 옆 방이었다.
스위트룸답게 확 트인 창문과 그 건너로 남산이 보였다.
나는 이 작전의 가장 중요한 점을 상기시켰다.
‘흔적을 남기면 안 된다.’
작전이 끝나면 곧바로 백문의 추격이 시작될 게 자명하다.
만약 범인이 나로 특정된다면 나와 내 주변은 수없이 많은 암살 위협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나는 로비에 전화를 걸어 룸서비스를 시켰다.
-어떤 것을 도와드릴까요?
“가장 비싼 와인과 치즈를 가져다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잠시 후, 내가 시킨 것들을 가지고 온 호텔 직원이 벨을 눌렀다.
“테이블에 올려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드르륵.
지나쳐 가는 호텔 직원에게 간단히 묵례를 하고.
퍽.
주먹으로 목 뒤 경추를 빠르고 강하게 끊어쳤다.
털썩.
뇌가 흔들린 직원이 그대로 쓰러졌다.
나는 기절한 그의 옷을 벗겨 갈아입고 그가 가져온 트레이를 끌고 복도로 나갔다.
바로 옆 방.
진오청과 헤리슨이 상주하는 스위트룸의 벨을 눌렀다.
딩동.
경호원 하나가 문을 열었다.
그가 어눌한 한국말로 질문을 한다.
“뭐야, 방금 룸서비스 왔다 갔는데?”
“빠진 게 있어 다시 올라왔습니다.”
“알았다. 창가 테이블에 세팅해.”
“네.”
트레이를 끌고 창가로 다가가자 진오청과 헤리슨이 각각 취향대로 와인과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고 경호원 하나가 테이블 곁을 지켰다.
단순한 호텔 직원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들은 내게 신경 쓰지 않았다.
테이블에 치즈와 와인을 올리고 인사를 하는 척 허리를 숙임과 동시에 양손으로 각 발목에 차고 있던 단검을 쥐었다.
이상함을 느꼈는지 경호원이 중국어로 외쳤다.
“잠깐! 너 손에 그거 뭐야?!”
방에 있는 모두가 나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상황 파악을 할 겨를도 없이 몸을 용수철처럼 튕겼다.
그대로 경호원의 몸에 단검을 찔렀다.
푹. 푹. 푹.
허벅지, 허리, 어깨를 순식간에 찌르자마자 반대 손으로 목젖에 칼날을 밀어 넣는다.
촤락.
“…….”
갑작스러운 살인에 충격을 받았는지 경악을 금치 못하는 이들.
문 옆에 있는 경호원이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려 하는 게 보였다.
‘총이다.’
빠르게 제압해야 한다.
호텔 방에서 총성이 울린다?
그것도 5성급 호텔에?
절대 안 된다.
오른손과 왼손에 있던 단검을 시간차를 두고 던지며 튀어 나갔다.
쎄엑. 푹.
먼저 온 단검은 어찌 피해 냈지만, 뒤에 온 단검이 그의 눈을 관통했다.
“크! 헙.”
그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기 전에 입을 막았다.
혹시나 외부에서 눈치채면 안 되기 때문이다.
“금방 편하게 해 줄게.”
눈에 박혀 있는 단검을 빼내 그의 심장께로 밀어 넣었다.
경호원의 눈빛에서 생기가 꺼졌다.
“허억. 허억.”
온 신경을 집중하며 싸워서 그런지 숨이 찼다.
“진오청?”
“뭐, 뭐야?”
“반갑다.”
놈이 구조 요청을 하려는 듯 스위트룸 거실에 있는 전화기를 향해 뛰었다.
흥, 어딜?
재빨리 놈의 뒷덜미를 잡아 땅에 거꾸로 메쳤다.
“크르륵.”
놈이 입에서 거품을 물며 기절했다.
“사, 사, 살려 주십시오! 돈이라면 얼마든지 주겠습니다!”
헤리슨이 테이블 옆으로 서서 양손을 들고 항복의 의사를 표현했다.
“얼마 줄 수 있는데?”
***
죽은 경호원들의 시체를 화장실에 넣어 놓은 뒤, 커튼을 얇게 찢어 헤리슨과 진오청을 묶었다.
진오청은 여전히 정신을 잃고 있기에 나는 헤리슨의 앞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았다.
“초면에 험한 꼴을 보였군.”
“아, 아닙니다. 오, 오늘 본 것은 비밀로 할 테니….”
눈앞에서 벌어진 살인에 충격을 받았는지 그가 말을 더듬었다.
“살려 달라고?”
“네, 네!”
“안 죽여. 나 원래 나쁜 사람 아니야.”
“…….”
전혀 믿지 않는 헤리슨의 눈알이 마구 돌아갔다.
하긴, 눈앞에서 두 명을 칼로 썰어 버리듯 죽였는데 믿는 게 더 이상하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어.”
“네?”
나는 블루스톤이 파나마에 설립한 페이퍼 컴퍼니의 이름과 그들이 사용하는 계좌번호가 적힌 종이를 그에게 보여 줬다.
그걸 본 헤리슨의 눈이 크게 떠졌다.
“너희가 이번 상현 전자의 지분을 모을 때 사용한 페이퍼 컴퍼니다. 알고 있지?”
“…모르는 이름입니다.”
헤리슨이 필사적으로 부정한다.
하지만 이들의, 정확히는 백문의 수법을 알고 있는 나는 코웃음이 쳐졌다.
이들이 페이퍼 컴퍼니의 이름을 사용한 이유는 하나다.
상현 전자를 인수해 제대로 운영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블루스톤을 앞세워 상현 전자를 공격한 것처럼 백문은 항상 대리인을 내세워 탐나는 기업의 경영권을 탈취했다.
경영권을 빼앗은 백문은 해당 기업의 기술과 자산을 빼돌려 중국에 똑같은 기업을 설립한다.
이 과정에서 기술과 자산이 빼돌려진 기업은 부도, 혹은 그에 가까운상태가 된다.
당연히 백문을 제외한 해당 기업의 나머지 주주들은 반발한다.
자신들이 투자한 기업이 망가져 재산상의 피해를 입었는데 가만히 참고 있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렇게 고소 고발이 줄지어 이뤄지지만.
백문은 책임지지 않는다.
심지어 블루스톤 같은 그들의 대리인도 책임지지 않는다.
그저 그들은 페이퍼 컴퍼니를 폐업하고 준비해 둔 바지 사장에게 돈을 듬뿍 주고 법정에 세울 뿐이었다.
즉, 이들은 책임을 피하기 위해 페이퍼 컴퍼니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를 모를 리가 없는 헤리슨이 시치미를 뗀다.
“진짜 모른단 말이지?”
“저, 정말입니다.”
안주머니에서 일전에 구한 대포폰을 꺼내 리우의 번호를 눌렀다.
-지금?
“그래.”
-알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짐작하지도 못한 헤리슨의 눈동자가 돌아가는 게 보였다.
나는 그런 헤리슨을 향해 방긋 웃어 주며 전화를 끊었다.
띠리리리.
1분도 지나지 않아 전화가 걸려 왔다.
-타깃, 확보했다.
“수고했다. 타깃 바꿔 주고 잠시 대기해라.”
고개를 들어 헤리슨을 바라봤다.
“플로리다 레이크우드가 411번지, 당신 집 맞지?”
내 입에서 자신의 집 주소가 나오자 헤리슨이 안절부절못하는 게 보였다.
“부인은 이혼해서 다른 곳에 살고 대학생 아들하고 같이 살고 있더군.”
헤리슨의 눈이 찢어지듯이 커졌다.
“아들하고 통화 한번 해 봐.”
휴대전화를 들어 헤리슨의 귀에다 가져다 댔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의 헤리슨이 영어로 아들과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몸은 괜찮냐? 어디 다친 덴 없냐 같은 걱정스러운 대화였다.
잠시 후.
통화를 마친 헤리슨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는지 도끼눈을 떴다.
“내게 원하는 게 뭐요?”
“간단해.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상현 전자 주식을 시장가로 전부 던져.”
“…거절하겠소.”
“아들의 목숨이 달렸는데도?”
“당신 말대로 한다면 어차피 나와 가족은 백문에게 죽소. 지금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똑같지 않겠소?”
당연한 걱정이다. 백문은 배신자를 살려 두는 법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당신과 당신 아들의 목숨을 보장한다면?”
헤리슨이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소?”
“못 믿겠으면 지금 죽는 거지. 당신 말대로 나중에 죽나 지금 죽나 아니겠어?”
“끄응….”
“하나 확실한 건 지금 당신 아들을 잡고 있는 건 사이코패스야. 절대 편하게 죽일 거라 생각하지 마.”
헤리슨이 결정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소. 이것 좀 풀어 주시오.”
헤리슨을 풀어 줬다.
그가 방에서 노트북 한 대를 가져왔다.
“바로 시작하면 되겠소?”
“그래.”
그가 노트북을 켜는 사이 나는 기절한 진오청에게 다가갔다.
깨진 정수리에서 피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거 가만둬도 과다 출혈로 죽는 거 아냐?’
잠시 고민됐지만, 확실히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푹.
진오청의 목덜미에 칼을 꽂아 넣으니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털컹.
갑작스러운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의자에서 넘어진 헤리슨이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해? 빨리 끝내야 아들 만나러 가지.”
그가 후다닥 자리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