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8화
불이 꺼진 어두운 사무실.
흑막과 악역들이 있을 만한 전형적인 장소에 진오청과 금발의 남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지분은 얼마나 끌어모았지?”
“22%가 약간 넘습니다. 이번에 인수한 이재현과 그 형제들의 지분 4%를 합친 수치입니다.”
금발의 남자, 블루스톤의 CEO인 헤리슨이 사전에 조사했던 내용을 설명했다.
“이강진이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지분은 총 27%입니다. 본인 소유가 5%이고 계열사 순환 출자에 의한 지분 22%입니다.”
“딱 5%가 모자라는군.”
지분 51%를 모아서 경영권을 가져오는 게 가장 확실하다는 건 진오청도 안다.
하지만, 상현 전자 같은 대기업의 지분을 절반 이상 모으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현재 경영권을 가지고 있는 이강진보다 많은 지분을 소유해 경영권을 빼앗아 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한 달가량 남은 임시 주총 전에 최대한 지분을 긁어모아야 한다.
“지분을 판다고 연락 온 곳은 없나?”
“안 그래도 11%를 가지고 있는 곳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11%라고?”
“예, SC 인베스트먼트라고 SC그룹 산하의 투자 회삽니다. 지분 취득 공시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차명으로 모은 것 같습니다.”
“잘됐군. 인수한다고 하게.”
“그런데 문제가 좀 있습니다.”
“뭔가?”
“가격을 높게 부르고 있습니다.”
“얼마나?”
“50%의 프리미엄을 원한답니다.”
진오청이 생각에 잠겼다.
상현 전자의 시가 총액은 평소보다 3배가 오른 230조 원이다. 11%면 단순하게 계산해도 25조 원가량.
게다가 50%의 프리미엄을 더하면 40조에 육박한다.
그동안 인수 합병을 진행하느라고 가져온 예산이 바닥난 상황.
고민하던 진오청이 지시를 내렸다.
“문(門)에 연락해 예산을 더 가져올 테니 협상하자고 하게나.”
“알겠습니다.”
진오청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무려 상현 전자다.
상현 전자만 먹을 수 있다면.
그 이익은 상현 전자를 빼앗는 데 들어간 투자금을 메우고도 남을 게 분명하다.
진오청이 일어나 커튼을 걷었다.
저 멀리 보이는 밝은 보름달이 마치 자신의 미래처럼 느껴졌다.
***
마스크와 모자를 뒤집어쓰고 청계천 뒷골목을 돌아다녔다.
몇몇 가게 주인들이 내게 눈길을 보냈지만 해당 점포에 내가 찾는 물건은 없었기에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지나다녔다.
그러기를 30여 분.
‘찾았다.’
조그마한 안테나가 그려진 간판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오셨수.”
주인이 퉁명스럽게 말을 걸었다.
“휴대폰 하나 사러 왔습니다.”
내 말에 주인이 진열장 아래서 상현 전자에서 나온 신형 휴대폰의 박스를 꺼냈다.
“아, 새것 말고 ‘중고 폰’이라는 말을 빼먹었군요.”
“…어떻게 알고 오셨수?”
“밖에 있는 간판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알았습니다.”
“누구 소개로 온 건 아니란 말이지?”
“네.”
주인이 꺼내 놓은 휴대전화 박스를 치우며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안 팔으니 이만 나가 보슈.”
예상했던 주인의 반응에 나는 주머니에서 두툼한 봉투 하나를 꺼내 들었다.
1만 원권 200장. 시세는 잘 몰라도 대충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됐다.
탁.
내 손에서 낚아채듯 봉투를 가져간 주인이 금액을 확인했다.
곧, 그가 창고 안에서 낚은 휴대전화 하나를 들고 나왔다.
“010-1234-1234.”
번호를 대충 불러 주는 주인을 뒤로하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방금 구한 건 대포폰이다.
앞으로 내가 벌일 일에 위법적인 부분이 많기에 나 자신을 숨기기 위해 구했다.
전화기를 열어 예전부터 기억하고 있는 번호를 눌렀다.
-헬로?
굵은 목소리의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리우?”
-누구…?
“의뢰를 맡기려 전화했다.”
-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모르는 사람의 의뢰는 안 받아.
“착수금 천만 달러. 의뢰를 완수하면 2천만 달러를 더 주지.”
-…헉!
놀랐는지 전화기 너머에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어때? 이 정도면 대통령도 암살할 만하지 않나?”
-미친놈!
뚝.
장난 전화라고 생각했는지 전화가 끊겼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여유롭게 길을 걸었다.
어차피, 전화가 다시 올 것이다.
리우란 놈은 딸이 난치병에 걸려서 돈이 엄청나게 필요하거든.
그것도 의료비가 살인적인 미국에서.
띠리링. 띠리링.
아니나 다를까, 5분도 되지 않아 전화벨이 울렸다.
휴대전화를 열어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리우의 목소리가 득달같이 들렸다.
-진짜냐?
“의뢰를 받아들이면 10분 안에 지정한 계좌로 돈을 쏴 주지.”
-…알겠다. 의뢰 내용은?
“간단해. 미국으로 가서 한 사람을 감시하다 내가 신호를 주면 바로 납치하는 거야.”
-납치만?
“그래, 죽일 필요는 없어.”
-받아들이지.
무언가 아쉬운 듯한 리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 생각했다. 메일 주소를 보내 주면 타깃 정보를 넘기겠다. 지금 바로 출발해야 하는데 괜찮나?”
-알았다.
전화가 끊겼다.
곧이어 문자로 메일 주소가 들어왔다.
***
한편, 서울시청 앞 프라자 호텔에서는 블루스톤의 CEO인 헤리슨과 SC 인베스트먼트의 우두머리인 첸이 만나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블루스톤의 토미 헤리슨이오.”
“SC인베스트먼트의 대표 스티븐 첸입니다. 월가의 전설을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생각지도 않은 첸의 아부에 헤리슨이 기분이 나쁘지 않은지 너털웃음을 지었다.
“월가의 전설이라니, 옛날얘기지. 지금은 첸과 같은 젊은이들이 새 시대를 이끌어 가는 거 아니겠소?”
“아직 선배님을 따라가려면 멀었습니다. 아! 저도 선배님과 같은 하버드 경제학과 출신입니다.”
“오! 이거 반갑구만! 우리 학교에 뛰어난 후배가 나왔구만.”
인사치레는 여기까지.
서로에 대한 탐색전이 끝난 두 사람은 본론을 꺼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쪽에서 상현 전자 지분 11%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네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니고 저희 투자자들이 위탁한 지분입니다.”
“뭐, 그렇게 알아 두지.”
헤리슨이 꼬투리를 잡지 않고 넘어갔다.
한국에서 불법인 차명 거래를 문제 삼지 않겠다는 표현이었다.
“우리는 후배님이 ‘위탁’받은 지분을 넘겨받고 싶네.”
“저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지금 우리는 협상을 하러 나온 거 아닌가? 50%의 프리미엄은 무리네. 다른 조건을 말해 보게.”
생각보다 단호한 헤리슨.
하지만, 첸은 처음부터 협상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국식으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저흰 50% 아니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이대로 떠나면 협상은 없네. 어차피 우리 아니면 팔 곳도 없지 않나.”
헤리슨의 말에 첸이 입가에 비웃음을 띄웠다.
“이미 이강진 회장 쪽에 의향서를 전달했고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습니다.”
이강진의 이름이 나오자 헤리슨의 마음이 급해졌다.
11%의 지분이 이강진 혹은 그의 그룹으로 넘어간다면 이번 싸움은 해보나 마나 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지분 싸움에서 지기만 하면 상관없다.
세상살이가 어떻게 항상 이기기만 하겠는가.
하지만, 이건 다른 문제였다.
지금은 적대적 인수 합병 이슈로 상현 전자의 주가가 3배로 폭등한 상태지만.
지분 싸움이 끝나는 순간 주가는 빠르게 원위치를 찾게 될 것이고 블루스톤의 이름으로 투자한 막대한 자금은 반으로 쪼그라들게 분명했다.
“잠깐!”
헤리슨이 자리를 박차고 첸의 앞을 막았다.
“뭡니까? 선배님.”
“이틀, 아니 하루만 더 시간을 주게. 우리의 자금 상황을 확인하고 답을 주겠네.”
“그럼 프리미엄 50%를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맞네, 그러니 하루만 기다려 주게.”
첸이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그는 대어를 낚은 낚시꾼이 이런 기분인가 싶었다.
“그럼 내일 24시 정각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일 초라도 늦으면 포기하는 거로 알겠습니다.”
“알았네.”
***
“18,000원 나왔습니다.”
“여깄습니다. 잔돈은 필요 없습니다.”
만 원권 두 장을 내밀고 서둘러 택시에서 내렸다.
도착한 곳은 영등포구에 위치한 빅터의 집이었다.
“엘!”
빅터가 반갑게 맞아 준다.
아마 몇 날 며칠을 혼자 있다가 사람이 나타나 즐거워 보였다.
“잘 있었냐?”
“그럼요. 엘은요? 저번에 다친 거 같던데 괜찮아요?”
“나야 뭐, 워낙 건강 체질이라 멀쩡해.”
빅터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전에 부탁한 거는?”
“여기요.”
빅터가 A4 용지 한 뭉치를 내밀었다.
“고마워.”
블루스톤 본사에 있는 컴퓨터들을 해킹해 모아 온 정보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그것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혹여 방해가 될까 빅터가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 줬다.
그렇게 3시간쯤 지났을까?
드디어 의심되는 정보를 발견할 수 있었다.
‘파나마?’
파나마 제도에 설립된 페이퍼 컴퍼니에 관한 자료.
곧바로 그곳에 들어간 자금의 흐름을 추적했다.
‘백문에서 블루스톤으로 다시 파나마에 설립된 페이퍼 컴퍼니로 돈이 흘러갔다.’
차락, 차락.
빠르게 종이를 넘겼다.
이번에는 이 돈의 목적지를 알아내야 한다.
‘찾았다. 상현 전자.’
옆에 있는 이면지에 페이퍼 컴퍼니의 이름과 그들이 상현 전자 주식을 매수한 계좌번호를 적었다.
“빅터!”
“예.”
“고맙다. 네 덕에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아.”
“뭘요, 그냥 컴퓨터 몇 번 두드린 거밖에 없어요.”
빅터가 내 칭찬에 쑥스러운지 뒤통수를 긁적였다.
“여튼, 정말 고마워. 이 일만 해결하고 다시 들를게.”
“알았어요.”
그렇게 빅터의 집을 나서면서 이강진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 뚜루루. 철컥.
새벽 3시인데도 깨어 있었는지 그가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회장님, 이신훕니다.”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네.
“새벽 시간에 죄송합니다.”
-아닐세, 내 평생을 바친 회사가 넘어가게 생겼는데 잠이 올까? 깨어 있었으니 신경 쓰지 말게.
“몇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혹시 전자의 지분을 얼마나 가지고 계십니까?”
-공식적으로는 27%,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지분이 4%가 있네.
차명으로 보유한 지분까지 합하면 31%. 아슬아슬하다.
“혹시 회장님께선 저를 얼마나 믿으십니까?”
-응? 자다가 웬 봉창 두들기는 소린가? 이 상황에서 내가 자네를 안 믿으면 누굴 믿으라고?
“완벽히 믿는 거로 알고 있겠습니다.”
-…갑자기 왜 그러는가?
“회장님께서 해 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첸의 전화기가 울렸다.
전화기를 열어 발신자를 확인하니 헤리슨이었다.
‘역시.’
첸이 전화를 받아 인사말을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이군.
“오늘입니까?”
첸이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는 듯 직설적으로 본론을 말했다.
-맞네, 저번에 만난 곳에서 서명하는 게 어떻겠나?
전화기 너머의 헤리슨이 예상했다는 듯 담담하게 받았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제가 회사를 비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쪽으로 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알았네. 위치를 좀 보내 주게나.
“그러죠.”
뚝.
통화가 끊긴 후.
첸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첸?
“엘, 물고기가 그물에 들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