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화
인구 60만의 도시. 블라디보스토크에 전운이 감돌았다.
우두머리를 잃은 이바노프 패밀리는 해가 뜨자마자 범인을 색출하겠다며 무장을 하고 온 도시를 뒤지고 다녔다.
조금이라도 의심되면 몽둥이질을 일삼았고 심한 경우 총을 쏴 댔다.
몇 시간이 지나자 거리에는 부상자가 가득했고 건물 몇 곳에 불이 붙어 연기가 자욱이 올라왔다.
상황이 이쯤 되면 경찰들이 진작 나섰어야 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아무도 나서지 않았고 희생자는 늘어만 갔다.
수십 년 전부터, 그러니까 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가 건국될 때부터 이바노프 패밀리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블라디보스토크의 시민들.
이바노프 패밀리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앞장서서 자신들의 집에 숨겨 주었던 시민들은 이제 그들의 폭력 앞에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극단적인 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러시아군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떨어졌다.
도착했다는 의미로 떨어졌다는 게 아니라 정말로 비행기에서 낙하산을 메고 눈이 오는 것처럼 떨어져 내렸다.
약 2,000명의 군인, 그것도 대부분 스페츠나츠를 필두로 한 특수전 부대였다.
이는 러시아 국방부에서 동부에 동원할 수 있는 가장 빠르면서 강력한 패였다.
그렇게 그들은 머리를 잃은 이바노프 패밀리를 소탕해 나갔다.
아무리 이바노프의 세력이 강력하다고 하더라도 그건 미하엘의 정치적인 영향력과 수십 년간 모아 온 자본,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 시민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하엘이 없어진 지금은 중동 테러 단체보다 못한 단순한 불순 무력 단체일 뿐.
갑작스러운 군의 공격에 이바노프 패밀리는 수수깡처럼 부러져 갔다.
결국, 해가 질 무렵 이바노프 패밀리를 이끄는 유리는 결정했다.
도망치기로 말이다.
그는 자신의 심복 몇을 데리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빠져나갔고.
졸지에 명령권자를 잃은 이바노프 패밀리는 저항의 의지를 빠르게 상실했다.
그렇게 비고르가 이끄는 특수전 사단은 당당하게 이바노프의 본거지에 입성할 수 있었다.
***
“수고하셨습니다.”
“별말씀을…. 엘이 전부 하신 거나 다름없습니다. 저는 그냥…. 한국식 표현으로 숟가락만 얻은 거죠.”
겸양을 떨었지만 이바노프 소탕이라는 큰일을 해낸 비고르의 표정은 아주 평온해 보였다.
주공은 나와 시큐리티 직원들이 세운 건 맞지만 비고르의 지분도 만만치 않다.
잘 알지도 못하는 타국의 사업가가 이바노프를 공격하겠다며 비행편과 무장을 요청한 걸 들어줬고.
잠수함까지 수배해 안전한 침투를 도와줬기 때문이다.
“어제 말씀드린 건….”
“아쉽게도 저택 내부에 진입하자마자 확인을 마쳤지만, 생존자는 없었습니다.”
으득.
기어이 나온 부고에 나 자신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머리를 식히고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작전을 짰다면 분명 희생이 적었을 것이다.
너무도 오랜만인 실전인 까닭에 두뇌와 감각이 헐어 버렸음이 틀림없다.
“잔당들이 도망쳤다고 들었습니다.”
“유리 말입니까?”
“혹시 어디로 도망쳤는지 알고 계십니까?”
“시베리아 평원으로 가는 걸 목격했다고 들었습니다만…. 혹시라도 추격에 나서실 생각을 가지고 계시면 말리고 싶습니다. 그곳의 추위와 험악함은 사전에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견디기 힘듭니다.”
비고르의 말대로 시베리아 벌판으로 도망쳤다면 잡을 길은 없다.
거센 눈바람에 흔적도 남지 않을 거다.
만약 흔적을 찾아낸다고 해도 그들을 잡는 데 한 세월이 걸릴 게 분명하다.
“…어쩔 수 없네요. 포기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일전에 말씀드린 조선소 건립은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저는 물론이고 바실 장관님께서도 최선을 다해 돕겠다는 전언이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바실 장관님께서 오늘 저녁을 함께할 수 있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장관님이 부르시면 없던 시간도 비워야죠.”
“알겠습니다. 전해 드리겠습니다.”
비고르와 간단히 인사를 하고 주위를 돌아봤다.
아이러니하게도 비고르가 있던 곳은 전날 내가 미하엘을 죽인 4층이었다.
당연하게도 주변에 핏자국과 총탄 자국이 어지러이 있었다.
“러시아를 대표해서 감사드립니다.”
내가 주위를 살펴보자 비고르가 다가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공치사를 받자고 한 일은 아닙니다.”
“그래도 큰일을 하신 건 맞습니다.”
하긴, 러시아 동부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던 큰 벽을 외국인 사업가인 내가 앞장서서 무너뜨려 줬으니 저렇게 생각할 법도 하다.
“저녁에 장관님과 함께 오시는 거죠?”
“네.”
“그럼 저녁 시간에 뵙겠습니다. 장소가 정해지면 연락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저택에서 나와 비고르가 마련해 준 차를 타고 최효석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병실에 도착한 나는 최효석으로부터 뜬금없는 소리를 들었다.
“…네?”
“도망간 잔당들, 내가 애들 데리고 잡아 온다고. 생포하지 못할 것 같으면 모가지라도 잘라서 가지고 오고.”
“방금 어디로 도망쳤는지 듣지 않으셨어요?”
“들었어, 시베리아.”
“그런데, 몸도 낫지 않은 형님이 가시겠다고요?”
내 물음에 최효석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안 됩니다. 그곳의 날씨가 어떤지 아십니까? 총 맞아서 골골대는 몸으로 들어갔다가는 동사하기 십상입니다.”
“누가 지금 간다 그랬어? 직원들 먼저 보내서 추적하다가 완치되면 헬기든 비행기든 타고 들어갈 거야.”
“제가 허락하지 않으면요?”
“사표 쓰고 갈 거다. 이미 애들하고 상의도 끝냈어. 시큐리티 직원들 전원하고 얘기 끝냈다.”
“…어차피 도망치는 패잔병일 뿐인데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최효석이 표정을 굳혔다.
“신후야.”
“예.”
“나를 구하겠다고 작전에 나섰다가 11명이나 죽었다.”
“…….”
“너를 탓하는 게 아니야. 다만 이대로 덮으면 나 앞으로 시큐리티 애들 못 본다. 뭐가 됐든 마무리를 지어야 먼저 간 11명이 이해하지 않겠냐.”
참 어렵다.
최효석이 이 정도까지 요구하는데 끝까지 반대할 수만은 없다.
차라리 안전하게 다녀올 수 있도록 조처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러시아 정부에 최대한의 협조를 요청하고 회사에서도 조력하겠습니다. 다만 두 가지만 약속해 주세요.”
“뭔데?”
“첫째로 꼭 완치된 다음에 시베리아로 가세요. 대충 치료하고 가시는 건 용납 못 합니다.”
최효석이 뜨끔했는지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더니 이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완치되면 출발하마.”
“그리고 결과가 어떻든 올해 안으로 끝내셔야 합니다. 혹시라도 위험해질 것 같으면 무리 말고 돌아오시고요.”
“그래, 꼭 올해 안으로 돌아오마.”
“완치될 때까지 시간 나는 대로 찾아오겠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도망치지 좀 마세요. 배때기에 총 맞은 사람이 보드카 사러 병원을 탈출하는 게 말이 됩니까? 그 덕에 시큐리티 직원들이 형님 찾으러 밤새 돌아다니지 않았습니까?”
“…그, 그러냐. 미안하다.”
그렇게 최효석의 병실에서 잡담으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약속 시각이 다가와 비고르가 알려 준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바실 장관이 자리에 앉지 않고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큰일을 하셨습니다.”
“…좀 과장하시는 거 아닙니까?”
태생적으로 유난 떠는 걸 싫어해 바실 장관에게 한마디 했지만.
“러시아의 영웅께서 오시는데 어떻게 앉아서 기다리겠습니까?”
더욱 큰 호들갑으로 돌아왔다.
“일단 앉으시지요.”
“네.”
자리에 앉자 바실 장관과 비고르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러시아를 대신해 감사드립니다.”
“비고르가 많이 도와줬습니다.”
내 말에 앞에 있던 비고르가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마도 군인 출신인 탓에 이런 공치사가 익숙하지 않아 보였다.
“알고 있습니다. 이 친구가 따로 보고하지 않아 제가 비고르의 공을 따로 조사해 국방부로 보내 놨습니다. 아마 곧 있으면 승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습니까? 그것참 잘됐네요.”
나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이런 인재가 빠른 승진을 한다면 앞으로의 일에 도움이 될 게 분명하다.
“비고르, 축하합니다.”
“아닙니다.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비고르가 겸양을 떨자 옆에 있는 바실 장관이 호탕하게 웃었다.
“으하하하! 제가 이래서 이 친구를 좋아합니다. 젊은 군인답지 않게 신중하고 치밀하기까지 합니다. 엘이 보기에는 어떻습니까?”
바실 장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날 작전 때 그의 치밀함에 감탄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입장에서 비고르 같은 인재는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으하하, 맞습니다. 비고르, 들었나? 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 않나. 매번 겸손한 게 꼭 미덕은 아니라니까?”
“예.”
비고르의 대답은 딱딱했지만 그건 그의 성격 탓이고 둘 사이를 보니 꽤 친근하게 느껴졌다.
“두 분은 사적으로 친분이 있으신가 봅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이 친구는 제 친우의 아들입니다. 조카나 다름없는 사이죠.”
“보기 좋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렇게 식사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무르익어 갈 무렵, 바실 장관이 본론을 꺼냈다.
“대통령께서 이번 이바노프 소탕에 굉장히 만족하고 계십니다.”
“다행이네요.”
“그래서 그런데…. 엘, 혹시 대통령을 만날 생각이 있습니까?”
“예?!”
바실 장관이 강한 어투로 요 며칠 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외적으로야 러시아 군대가 이바노프 패밀리를 소탕한 거라고 알렸지만 대통령께 보고할 때는 그럴 수야 없지요.”
“그거야 당연히 그렇겠지요.”
“그래서 있었던 일을 모두 사실대로 보고했습니다.”
“사실대로라고 하면….”
“엘이 방문한 이유부터 이바노프를 공격한 계기, 그리고 어떻게 미하엘의 머리통에 구멍을 냈는지 빠짐없이 전부 말씀드렸습니다.”
바실 장관이 옆에 있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그랬더니 각하께서 엘을 보고 싶어 하시더군요.”
좋은 기회다.
러시아의 황제나 다름없는 푸틴을 만날 기회를 얻다니.
하지만, 필요하다고 해서 애걸복걸하는 모습을 보여 줄 필요는 없는 법.
“그렇습니까?”
나는 조용히 겸양을 떨었다.
그러자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반응 때문인지 바실 장관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각하의 관심만 받는다면 러시아에서 못 하는 일이 없습니다.”
“영광이지만, 일개 사업가가 푸틴 대통령과 독대한다는 게 영 꺼림칙합니다. 구설수라면 질색이거든요.”
“그거라면 좋은 핑곗거리가 있습니다!”
“핑계요?”
“일전에 제가 오르진 드루쥐비를 달아 드리겠다는 말 기억하십니까?”
“그건 제가 러시아 제조업에 투자한 뒤의 일이 아닙니까?”
“이미 엘이 미하엘의 머리통을 부숨으로써 그에 필적한 공적을 쌓았습니다. 그냥 저와 함께 내일 가시죠.”
“내일이요?”
“예, 마침 내일 대통령님의 휴일이기도 하고 전투기를 타면 모스크바까지 넉넉잡고 2시간이면 갑니다.”
바실 장관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전투기라니.
농담도 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