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화
“코드명 바릿샤, GUR(국방정보총국) 대내 정보국 1팀장입니다. 이름은 밝힐 수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역시, 이렇게 강인한 기세를 내뿜는 남자가 보통의 보좌관일 리가 없었다.
“제 예상이 맞았군요. 이곳에는 저 때문에 오신 겁니까?”
“아닙니다. 원래 차관급 이상이 동부에 출장을 가면 국방정보총국에서 호위 명목으로 요원을 하나씩 붙입니다.”
“이바노프 때문입니까?”
“예.”
이바노프가 대단하긴 한가 보다.
KGB 출신인 대통령이 눈을 부릅뜨고 독재 통치를 펼치는 나라에서 이렇게까지 조심하다니.
“제 일행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총에 맞아 경찰서에 끌려간 것까지는 확인됐습니다.”
살아 있다는 소리다.
명색이 사법 기관인데 총상 환자를 죽게 내버려 둘 리가 없다.
최효석의 생사가 확인되자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빠졌다.
“비고르, 제가 몇 가지 부탁을 드려야 될 것 같습니다.”
“저희는 이바노프 패밀리를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비고르가 내 말을 지레짐작하고 먼저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공격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비고르에게 드릴 부탁은 무장과 우리 요원들이 안전하게 입국할 수 있는 조치입니다.”
“…….”
비고르가 어안이 벙벙한지 입만 뻐끔거리다 말을 이었다.
“엘, 엘이 특수 부대 부사관 출신이라는 건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바노프를 공격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참고로 러시아가 자랑하는 스페츠나츠도 3번이나 시도했지만 모두 몰살당하고 실패했습니다.”
“그건 비고르가 걱정할 게 아닙니다. 비고르는 미하엘 사후에 어떻게 할지만 생각해 주세요.”
“엘!”
“그럼 비고르는 제가 미하엘에게 굴복하길 바라는 겁니까?”
“잡혀간 일행을 포기하면….”
“그런 선택지는 제게 없습니다.”
단호한 내 말에 비고르가 고개를 저었다.
“어쩌시겠습니까? 도와주실 겁니까? 아니면 모르는 척하시겠습니까? 비고르가 모른 척해도 저는 자력으로라도 이바노프를 공격할 겁니다.”
“휴…, 엘의 의견은 알겠습니다. 국방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니 잠시만 기다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잠시 후, 통화를 마친 비고르가 돌아왔다.
“도우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무장과 비행기 편을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쉴 수 있는 안가와 전화기도 부탁드립니다.”
“예.”
***
최효석에 대한 걱정스러운 마음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컨디션이 별로였다.
찌뿌둥한 몸을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 침대 위에 정좌를 했다.
“흐읍.”
숨을 들이쉬고,
“휴우….”
내쉰다.
두근. 두근. 쪼르륵.
심장이 뛰는 소리를 자각하자 곧 혈관에서 피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까?
“휴우우.”
컨디션이 되돌아오는 게 느껴지자 호흡을 종료했다.
이건 백문에서 암살자로 있을 때 배운 기술이다.
자신들만의 비기라고 호들갑을 떨며 알려 줬지만, 무협지처럼 내공을 쌓아 준다거나 하진 않고 단순히 집중력을 끌어올려 주고 몸의 활력을 주는 정도다.
똑. 똑.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문밖에서 비고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 들어오세요.”
“엘의 요원들이 도착했습니다.”
“바로 나가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비고르가 머뭇거리는 게 보였다.
“무슨 할 말 있으십니까?”
“엘, 대체 정체가 뭡니까?”
“정체요?”
“사업가 맞습니까?”
“그럼 사업가죠. 제가 뭐 다른 신분이 있는 것 같습니까?”
“네, 총기 소지가 불법인 한국에서 저만한 사람들을 거느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되는데요. 혹시, 미국이나 중국의 정보국과 관련이 있습니까?”
비고르가 이러는 이유가 이해되었다.
나도 시큐리티 요원들의 살벌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여기가 서울인지 중동 분쟁 지역인지 헷갈릴 정돈데.
아마 모르는 사람이 보면 더욱 괴리감이 느껴질 거다.
“저에 대한 조사는 이미 마치지 않았습니까?”
비고르가 정곡을 찔려서 그런지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맞습니다.”
비고르를 지나쳐 시큐리티 직원들이 모여 있는 작전실로 향했다.
“…….”
침묵을 지키고 있는 30명의 직원.
한국인이 20명, 나머지 10명은 러시아인이었다.
그들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쳤다.
최효석이 전적으로 모은 사람들이기에 나와 함께한 시간은 없다시피 하지만 최효석 구출이라는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모여 있어 마음이 통하는 게 느껴졌다.
“상황은 들으셔서 알 거고 혹시 지금이라도 빠지고 싶은 사람 있습니까?”
의사를 묻자 직원 중 대장 격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왔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최효석 전무가 잡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새벽 비행기를 타고 이곳에 모였습니다. 빠지라고 말씀하시는 건 저희에겐 모욕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제가 경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럼 작전을 설명하겠습니다.”
회의가 시작되자 비고르가 어디선가 커다란 지도를 가져와 테이블 위에 펼쳤다.
이바노프의 본거지이자 미하엘의 저택.
경비하기 좋은 구조를 가진 건물.
해안 절벽을 끼고 있는 탓에 딱 보기에도 잠입이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방법은 있다.
“보다시피 정면으로는 기습이 어려운 구조입니다. 해서 보트를 타고 해안에서 이동합니다.”
해안으로 침투한다는 말에 비고르가 끼어들었다.
“절벽을 타시는 거라면 말리고 싶습니다. 곳곳에 CCTV와 기관총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절벽을 탈 일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침투로가 하나 있습니다.”
미하엘의 아들이 꼰질러 준 침투로가.
***
그날 새벽.
시큐리티 인원들과 무장을 마친 후 우리는 안가 바로 뒤에 있는 해안가에 모였다.
그리고 우리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여기에 왜?”
저 멀리 잠수함 두 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놀라고 있는 내게 비고르가 설명을 해 줬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바노프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따라서 지상을 통해서 가시면 십중팔구 도착하기 전에 벌집이 됩니다.”
비고르가 러시아에서 미하엘 이바노프를 가장 증오한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나 보다.
“타고 가십시오. 안전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엘이 하려는 일은 러시아가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이 정도의 도움밖에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충분합니다.”
비고르에게 인사를 건네고 뒤를 돌아보니 무장한 30명의 남자가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서 있었다.
“갑시다. 러시아 마피아 두목의 모가지를 따러.”
***
목적지까지의 예상 시간은 5분.
최효석이 걸린 한판이다. 결코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최후까지 기억을 짜내고 또 짜냈다.
빅터와 이야기했던 침투로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데 저택의 경비가 그 정도로 삼엄한데 하수도로 탈출할 생각은 어떻게 한 거야?’
‘저택 창고를 제 작업실로 사용했어요.’
‘그런데?’
‘창문을 열어 놓고 나왔는데 비가 엄청 들이치는 거예요. 당연히 깜짝 놀라서 내려갔죠. 작업실에 비싼 장비들이 엄청 많았거든요.’
‘그래서?’
‘창문을 닫고 보니까 물이 한쪽으로 빠지는 거예요. 그곳을 들춰 보니까 웬 철망으로 막힌 통로가 있었고요.’
‘하수구군.’
‘맞아요, 하수구. 왠지 그곳으로 탈출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톱을 가져와서 매일 조금씩 짬 날 때마다 잘라 냈죠. 다 자르니까 밑으로 내려가는 사다리가 나오더라고요?’
‘내려갔겠네?’
‘그렇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려갔죠. 그렇게 20분쯤 내려갔나? 그러니까 해안에 붙어 있는 동굴에 도착한 거예요.’
‘그대로 헤엄쳐서 도망치면 되잖아?’
‘수영을 할 줄 알아야 도망치죠. 그래서 아무것도 못 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가 쫓아온 놈들에게 끌려가서 뒤지게 맞았어요. 아마 그놈들도 작업실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이 있는지는 몰랐을걸요?’
***
잠수함이 어느덧 해안 절벽 근처에 도착했다.
요원들이 속속 잠수함 위로 올라왔고 나는 해안 동굴이 있을 만한 곳을 주시했다.
솔직히, 몇십 년 전에 들은 얘기 하나만 가지고 침투로를 정한 일은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극한의 추위를 자랑하는 러시아의 바다에서.
아무리 방한 잠수복을 입었다고 해도 오랜 시간 바닷속에 몸을 담그기에는 무리다.
하지만, 반드시 해내야 하는 상황.
“제가 팀장님이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예, SC 시큐리티 1팀장, 윤현수 차장입니다.”
“제가 먼저 가 확인할 테니 신호를 주면 쫓아오시는 거로 하죠.”
첨벙.
대답도 듣지 않고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첨벙. 첨벙.
최선을 다해 헤엄쳤고 15분이 지나자 절벽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시작된 수색.
혹여 들킬까 플래시는 켜지 못하고 육안으로 확인했다.
‘없다.’
동굴이 보이지 않았다.
시팔, 안 되는데.
급한 마음이 든다.
당장은 발각되지 않겠지만 시간은 결코 우리 편이 아니다.
조금만 있으면 해가 뜨기 때문이다.
왼쪽, 오른쪽을 왔다 갔다 하며 계속 탐색해 봤지만,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해안가를 통해 정면으로 돌파해야 하나? 아니야. 그러기엔 희생이 너무 커.’
시큐리티 전 직원 30명 중 절반이 죽고 최효석을 구해 낸다면 과연 그가 기뻐할까?
절대 아니라고 본다.
나는 조금 더 찾아보기로 마음먹고 다시 수색을 시작했다.
장시간 추위에 노출된 팔다리에 감각이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이제는 찾아야만 한다.
최후의 발악으로 더욱 절실하게 동굴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잠시 후.
‘찾았다!’
동굴은 수면에 맞닿아 있지 않고 수면 약간 위에 존재했다.
혹시나 바다 밑에 있나 해서 잠수했다가 숨을 돌리기 위해 물 밖으로 나왔다가 우연히 발견할 수 있었다.
절벽을 올라 동굴에 들어갔다.
플래시로 시큐리티 직원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깜빡. 깜빡.
***
1팀장 윤현수 차장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자신이 소속된 SC의 총수가 침투로를 찾겠다며 바다에 뛰어든 게 벌써 30분이 넘어가기 때문이다.
아무리 훈련된 사람이라도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라는 결론을 내린 윤현수는 바다에 뛰어들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그가 준비하고 있을 때.
저 멀리 해안 절벽에서 플래시가 깜빡이는 게 보였다.
윤현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뒤에 있는 직원들을 돌아봤다.
“다행히 우리 첫 실전은 아니지?”
최효석이 전무에서 SC 시큐리티 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 이들은 아프리카에서 훈련을 가장한 실전을 겪었다.
그것도 반군들을 상대로 침투 및 경비 그리고 교전까지 풀세트로 말이다.
원래 신체 조건과 뇌지컬이 되는 사람들이 실전으로 손발까지 완벽히 맞췄다.
그렇게 이들은 그 어떤 특수 부대에 비견해도 떨어지지 않는 최정예로 재탄생되었다.
“아프리카에서 죽을 뻔한 게 어제 같은데요?”
“최효석 사장님이 없는 게 아쉽습니다. 오늘 같은 날이면 좋아서 날뛰었을 텐데….”
“초외 싸장 뽀꼬 싶따.”
각 팀의 팀장들이 대표로 대답했고 1팀장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6팀장 한국말 많이 늘었네.”
“고마월.”
“반말은 하지 말고.”
분위기를 풀기 위한 윤현수 차장의 가벼운 농담에 시큐리티 직원들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럼 가자. 회장님이 앞장서서 침투로를 뚫어 주셨다. 지금이야 우리가 길을 몰라서 그런다지만 적들 앞에서도 회장님이 앞장설 수는 없지 않겠어?”
그 말을 끝으로 윤현수 차장을 필두로 직원들이 하나둘 물속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