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화
로비로 내려가자 커다란 덩치의 중년의 남성이 험악한 인상을 자랑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SC의 ‘엘’입니다.”
“바실 드라노구프입니다. 러시아 산업통상부 장관직을 맡고 있습니다.”
러시아 서열 10위 이내의 거물.
예감이 좋다.
바실과 인사를 하고 마주 앉자 호텔 직원이 쟁반에 홍차를 담아 가져왔다.
“잠깐.”
곁에 있던 보좌관이 몸수색을 하기 위해 호텔 직원을 멈춰 세웠다.
“괜찮아.”
“하지만, 이곳은 이바노프의….”
이바노프란 소리가 나오자 바실이 눈살을 찌푸린다.
“손님이 계시는데 괜히 불길한 이름을 꺼내지 말게.”
이바노프?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인데?
“죄송하지만 이바노프가 누굽니까?”
“엘이 신경 쓰실 인물은 아닙니다. 그저 러시아 내부의 인물일 뿐입니다.”
단순히 러시아 내부의 인물인데 이렇게나 신경 쓴다고?
그것도 러시아 서열 10위 안에 드는 장관이?
뭔가 기시감이 들었지만 파고들어 봤자 협상에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 같지 않아 넘어가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일 얘기를 시작해 볼까요?”
“좋습니다.”
“조선소 건립을 추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조건이 맞는다면’ 추진할 생각입니다.”
사실, 이번 투자는 러시아의 호의를 얻기 위한 첫걸음이다.
그렇기에 웬만하면 시행하려 했지만, 부지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어 잡았는데 이따위 짓을 한다?
이건 분명,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해결책은 두 가지.
첫째로 그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투자를 보류하는 것과.
혹은, 그 문제를 내가 직접 해결하고 대신 러시아와의 관계를 단숨에 진전시키는 방법이다.
그리고 나는 후자를 택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조건이라는 게 혹시 뭔지 알 수 있습니까? 혹시 면세권이나 토지의 무상 임대 같은 것을 바랍니까? 아니면 보조금 같은 재정적인 지원?”
“그것도 좋지만 저는 장기적으로 함께 갈 파트너를 찾고 있습니다.”
“……???”
바실이 갑자기 뭔 개소리를 지껄이냐는 표정을 짓더니 곧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하하, 그러니까 엘이 우리 러시아를 파트너로 정했다? 제가 이해한 게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덧붙이자면 저는 프렌드십을 원하는 게 아니고 패밀리십을 원합니다.”
“패밀리십?”
“네,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를 지켜 주는 관계를 원합니다.”
바실 장관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자신이 가져온 서류 가방을 테이블에 올렸다.
“엘, 제가 여기 이 가방에 무슨 서류를 가져왔는지 짐작하십니까?”
“전혀 모르겠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토지 무상 임대권과 면세권 그리고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계약서를 가져왔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도 러시아와의 친분을 원합니까? 이런 파격적인 조건을 포기할 만큼?”
“다른 건 탐나지만 도로도 없는 황무지에 대한 무상 임대라면 전혀 필요 없습니다.”
내 말에 바실 드라구노프가 의뭉스러운 제스처를 취하며 옆에 있는 보좌관을 호출해 귓속말로 몇 가지를 지시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보좌관을 보내서 알아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잠시 후, 오늘 일을 알아본 보좌관이 돌아왔다.
바실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보좌관과 대화를 했다.
곧 바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고 악귀처럼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소리를 지르더니 돌아와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정부와 블라디보스토크시 간에 협의상의 문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내 말에 바실이 입을 다물었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산업통상부 장관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니.
이건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안 됩니까?”
내가 다시 재촉하자 바실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해결할 수 있습니다. 다만 시간이 필요합니다.”
“얼마나요?”
“…1년 정도면 얼추 해결될 것 같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그 시간을 아끼기 위해 택한 곳이 러시아였습니다. 아니면 중국을 택했을 겁니다.”
“…….”
다른 곳을 택한다는 협박에도 바실 장관은 유구무언이었다.
아무래도 그를 설득하려면 더 강한 채찍을 휘두르는 수밖에 없는 듯싶다.
“장관님, 사실대로 말씀해 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한국에 돌아가서 이 계획의 전면 철회를 지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건 엘의 선택입니다. 저희가 강요할 수 없는 문제지요.”
“장관님, 제조업 기반 시설이 없다시피 한 러시아 동부를 발전시킬 기회입니다.”
내 얘기에 바실이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조선소가 세워지면 하청 및 협력 기업들이 줄줄이 세워지고 대규모 고용 창출 효과도 있을 겁니다. 게다가 투자 금액 전액이 달러로 들어올 테니 미국발 금융 위기를 헤쳐 나가기 한결 수월해지는 건 덤일 거구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알면서도 왜 못 했는지 아십니까?”
조선 기술이 없을 리 없다.
잠수함과 항공 모함까지 만들 수 있는 국가 아니던가.
돈?
유럽 최대의 천연가스 수출국이 러시아다.
지금이야 미국발 금융 위기 때문에 힘들지만 원래 조선소를 지을 돈은 충분히 있는 국가다.
말 그대로 러시아의 미스터리.
“글쎄요. 자세한 건 모르겠습니다. 다만 약간은 부정부패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했습니다.”
“어느 정도는 맞습니다만 그게 다는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사실, 이걸 외부인에게 밝히는 게 맞는지 지금도 고민됩니다.”
여기까지 말해 놓고 내뺀다고?
“장관님, 저는 러시아에 조선소만 세우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닙니다. 겨우 조선소 하나 짓고 러시아의 친구가 되려고 마음먹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70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해서 러시아의 제조업을 다시 살리려고 합니다. 조선소는 그 계획의 첫걸음일 뿐이고요.”
“그, 그게 진짭니까?”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러시아의 친구가 될 수 있겠습니까?”
바실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망해 버린 러시아의 제조업을 살려 주기만 하면 대통령 후보로 나서도 당선된다.
그런 대단한 일을 남쪽에서 온 사업가, 그것도 상현 그룹 같은 글로벌 기업이 아닌 로컬 기업의 오너가 무려 700억 달러를 투자해서 러시아 제조업을 살리겠단다.
당연히 쌍수를 들어 환영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제가 직접 푸틴 대통령을 모셔 와 엘의 가슴에 오르진 드루쥐비를 달아 드리겠습니다.”
“그럼 아까 하던 얘기를 마저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건 저 대신 제 보좌관이 설명해 줄 겁니다. 그 문제에 대해선 저보다 더 전문가거든요.”
바실이 멀리 있던 보좌관을 불렀다.
커다란 덩치와 탄탄한 근육질의 남자였다.
“비고르.”
“예.”
“너는 엘에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업할 때 주의할 점을 알려 줘.”
“전부 다 말입니까?”
“알려 줘, 전부.”
“예.”
“저는 일어나겠습니다. 아까 하던 얘기는 여기 비고르와 마저 하시면 됩니다.”
“살펴 가십시오.”
“비고르와 대화 후 엘이 무슨 선택을 할지는 모르지만, 부디 좋은 선택을 해 주길 바랍니다. 우리 러시아는 얼마든지 엘을 친구로 받아들일 용의가 있습니다.”
***
바실이 떠난 뒤, 나는 비고르와 밤새 토론을 했다.
비고르의 이야기는 단순하면서도 어려웠다.
아무도 믿지 말 것.
심지어 지금 내 앞에 있는 자신 역시 믿지 말라고 했다.
사방이 사기꾼이며 직원을 고용하더라도 도덕심과 성실함을 기대하면 안 되며 오히려 삥땅이나 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했다.
심지어, 조선소를 지을 건설 회사도 믿으면 안 된단다.
아니, 노동자와 기업을 믿지 말라고 하면 대체 어떻게 사업을 하라는 건지.
씁쓸한 마음이 든다.
“그렇지만 이 모든 건 미하엘 이바노프만 잡으면 해결됩니다.”
“그게 누굽니까?”
“마피아입니다.”
“겨우?”
“겨우 마피아라고 보시면 안 됩니다. 동쪽의 대통령이라고 불릴 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미하엘 이바노프입니다. 엘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업을 하려면 둘 중에 하납니다.”
비고르가 숨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이바노프 패밀리에게 세금을 바치거나 혹은 미하엘 이바노프를 죽이거나. 하지만 그를 죽이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그에게 세금을 내죠.”
“그러면 해결이 됩니까?”
“네, 엘이 겪을 모든 문제가 일시에 해결될 겁니다. 노동자와 기업들이 알아서 길 겁니다. 그만큼 이바노프를 무서워하거든요.”
“세금이 대체 얼맙니까?”
“사업군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10% 내외로 알고 있습니다.”
미쳤다. 10%면 대한민국 기업들이 내는 법인세율에 근접한다.
이러니 동부의 제조업이 씨가 말랐지.
“그래서 러시아 동쪽이 상대적으로 낙후되었군요.”
“맞습니다. 그동안 정부에서 동부를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바노프 패밀리의 수법은 나날이 발전해 갔습니다. 보조금을 내려 주면 그들이 꿀꺽하고 어쩌다 사업체가 발전해 돈이 된다 싶으면 힘으로 강탈해 갑니다.”
말문이 막혔다.
빌런이라고 불리던 나보다 더한 놈이 있을 줄이야.
이건 숫제 도적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러시아 정부에서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왜 미하엘 이바노프를 죽이려고 시도하지 않았습니까?”
“…했습니다.”
했다고? 천하의 러시아 정보부가 암살을 시도했는데 미하엘이란 놈이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있다고?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그가 살아 있을 수가 있죠?”
“그게…. 실패했습니다.”
러시아 정보부의 암살을 막을 수 있는 집단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의 암살이 실패했다면 이유는 하나다.
“그는 자기편이 많은 마피아군요.”
“맞습니다.”
자기편이 많다.
돌려 말했지만, 이 말은 러시아 정부 내의 정보가 흘러간다는 말이다.
정보가 누설되었는데 첩보가 생명인 암살이 성공할 리가.
비고르가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스페츠나츠, SVR(러시아 대외 정보국), GRU(러시아 국방부 정보총국)가 총력을 다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투입된 요원들만 목숨을 잃었죠.”
“그냥 힘으로 쓸어버리면….”
“블라디보스토크는 이바노프의 땅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군대를 투입하면 그들은 민간인 사이에 숨을 겁니다.”
“…만만치 않은 인물이군요.”
“그나마 다행인 건 그가 80세의 노령이란 사실입니다. 아들이 하나 있지만, 컴퓨터에 빠져 살아 후계자 자리에 관심이 없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그가 죽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총력을 쏟아부어 그의 조직을 와해시킬 겁니다. 그에 대한 준비 역시 착실하게 이뤄지고 있고요.”
“그렇군요.”
“그럼 제가 아는 정보는 말씀드렸으니 저는 이만 바실 장관님께 돌아가 보겠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방을 나가는 비고르의 뒷모습을 보니 갑자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다.
“혹시 컴퓨터에 빠져 산다는 미하엘 이바노프의 아들 이름을 알 수 있겠습니까?”
“빅터, 빅터 이바노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