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화
조직 개편이 끝나자 수개월 동안 모두가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우선 신종민은 회장으로 취임함과 동시에 그룹 지배 구조를 완전히 뜯어고쳤다.
자금이 흘러넘치는 조선이 중공업과 상선을 인수 합병 해 ST 오션으로 사명을 변경.
계열사별로 업무가 중복되는 인원을 재배치해 일전에 단행한 정리 해고로 인한 인력 부족 문제를 단숨에 해결했다.
또한, 계열사의 시너지도 극대화되었다.
조선에서 배를 만들면 상선에서 이를 운용하며 중공업에서 플랜트를 수주받으면 조선에서 제작에 참여하는 등 여러모로 좋은 변화를 끌어냈다.
최효석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SC 시큐리티를 구성했다.
그의 출신인 UDT부터 시작해 출신 부대를 가리지 않고 뽑았다.
한 가지 의외인 점은 외국인, 특히 러시아 특수 부대인 스페츠나츠 출신들을 직접 만나 우선하여 영입했다는 점이다.
의문이 들어 퇴근하고 온 최효석에게 직접 물어봤는데 그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국내 출신들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닌데 아무래도 직접 실전을 겪은 사람들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실전하면 미군 아니면 러시아군 출신이 많이 겪었을 테고 아무래도 우리 성향상 미국보다야 러시아 쪽이 편하겠지?”
이 이야기를 듣고 솔직히 놀랐다.
최효석이 이런 정상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다니.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옛말이 틀린 말이 아닌 듯싶다.
결과적으로 최효석은 성공적으로 SC 시큐리티를 구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손발을 맞추기 위해 아프리카로 전지훈련을 떠났다가 거지꼴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묻지 않았지만 다녀온 시큐리티 직원들의 눈빛이 흉흉한 거로 보아 실전 같은 훈련을 찐하게 겪고 온 게 틀림없었다.
아니 최효석의 성격상 제대로 실전을 겪었는지도 모른다.
이현준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냈다.
감사실의 인원들을 최소한으로 구성해 자신에게 가장 많은 업무를 부과했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그에게 인력 보충에 대해 말해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였다.
“감사실 특성상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써야 합니다. 그 때문에 지금 당장은 인원을 보충할 수 없습니다.”
뭐, 본인이 열심히 한다는데 어쩌겠는가.
그냥 뿌듯한 마음으로 바라봐 주는 수밖에.
첸은 홍콩에 가지고 있던 자신의 사무실과 자산을 정리한 후, SC 인베스트먼트에 완전히 정착했다.
그는 실직자가 된 월가의 엘리트들에게 연락해 아주 쉽게 인원을 구성했다.
덕분에 SC 인베스트먼트의 사무실에는 한국인은 한 명도 없고 미국인만 넘쳐났다.
그렇게 SC 인베스트먼트의 구성이 완료되자 나는 시장 예측이란 그럴싸한 이름으로 앞으로의 유가 상승을 첸에게 말해 줬다.
저번 사건으로 나의 광신도가 된 첸은 의심도 하지 않고 선물 옵션 포지션을 잡아 버렸다.
마지막으로 제니는 SC 캐피탈의 업무를 시작했다.
벤처 투자라는 게 인력이 많이 필요한 업무가 아니었기에 그녀는 우선 혼자 움직이기로 했다.
추후, 투자한 곳이 많아지고 인력이 필요할 때 보충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니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엘, 이것 좀 보세요. SC 캐피탈의 첫 투자처를 찾았어요.”
제니가 기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여기요.”
그녀가 책상에 기획서 몇 부를 놓았고 나는 그것들을 천천히 살펴봤다.
‘초콜릿 톡?’
순간 머릿속에 대박이라는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힌트를 준 적도 없는데 스스로 이런 대어를 낚아 오다니.
“요새 스마트폰이 유행이란 건 아시죠?”
“네, 안 그래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이용할 수 있는 메신저를 개발한 스타트업이에요. 이미 기초 단계의 애플리케이션은 완성되어 있고 상용화만 하면 되는 단계예요.”
“신선하군요. 다만,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나는 제니를 시험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던지기로 마음먹었다.
“스마트폰이라도 휴대폰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그 말은 스마트폰에서 메신저와 다름없는 문자 기능을 제공한다는 뜻이죠. 그런데도 이 메신저가 성공할 수 있을까요?”
“확신해요. 첫째로 문자는 불편해요. 파일 전송도 안 되고 상대방이 내 메시지를 읽었는지 확인도 안 돼요.”
제니가 잠시 숨을 골랐다.
“둘째로, 통신사에서 제공하는 문자 서비스는 비싸요. 한 건에 20원 하는 문자를 마음 놓고 쓰는 사람이 대체 몇 명이나 될까요?”
“메신저 역시 데이터 패킷 요금을 내지 않을까요? 제가 알기론 그쪽이 훨씬 비싸다고 알고 있는데요.”
“미국에서는 데이터 패키지 요금제가 나왔어요. 아마 한국도 따라가리라고 봐요.”
훌륭했다. 마치 미래를 살다 온 사람처럼 정확하게 짚어 내는 제니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손뼉을 쳤다.
“마지막으로 비즈니스 모델은 어떻게 됩니까? 건당 사용료를 받을 수는 없을 테고, 월정액입니까?”
“아뇨, 무료예요.”
“무료요?”
“네, 일단 사용자를 충분히 끌어모으기만 하면 돈을 얼마든지 벌 수 있으니까요. 아! 이건 이곳 스타트업의 대표가 해 준 말이에요.”
짝. 짝. 짝.
“훌륭합니다. 당장 투자하시죠.”
***
“오랜만입니다, 회장님.”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신종민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이제 회장님은 종민 씨 아닙니까?”
“지주 회사 대표시니 저에게는 회장님이시죠.”
신종민이 그룹의 지배 구조를 뜯어고치면서 나 역시 ㈜SC라는 지주 회사를 설립했다.
기존의 지배 구조는 내 개인 회사인 인베스트먼트가 조선을 조선이 상선을 상선이 중공업을 중공업이 지배하는 순환 출자 방식이었다면 지금은 ㈜SC가 인베스트먼트와 오션을 지배하는 수직 계열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밥이나 먹죠. 여기 한정식 맛있습니다.”
잠시 후, 얼추 식사를 다 했는지 신종민이 본론을 꺼냈다.
“오늘 오전에 러시아에서 답변이 왔습니다.”
“한동안 연락이 없어서 나가리 된 줄 알았는데 드디어 연락이 왔군요. 뭐랍니까?”
“몸이 달아올랐나 봅니다. 당장 실사단을 보내 주는 게 가능하냐고 연락이 왔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조선소를 건립한다며 의향서를 보낸 게 벌써 반년 전이다.
그동안 전혀 답변이 없다 이제 와서 건립하자는 연락이 온 걸 보면 모기지 론 사태의 여파가 드디어 러시아까지 미친 거라 생각이 되었다.
“아무래도 러시아도 피해 갈 수는 없나 봅니다.”
“뭐, 그럴 수밖에요. 미국이 기침하면 몸살을 앓는 세상이니까요.”
“그럼 일전에 상의한 대로 실사단을 먼저 파견할까요?”
“아뇨, 제가 직접 가죠.”
“직접 말씀입니까? 직원들을 보내도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만….”
“이번 기회에 저도 러시아 구경 좀 하고 싶네요.”
“그럼, 당국에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
블라디보스토크 외곽. 어느 거대한 저택 서재에 노인과 젊은 남성이 마주 보고 있었다.
“미하엘, 여기 오늘 올라온 소식입니다.”
“흠….”
미하엘이라 불린 노인이 서류철을 슬쩍슬쩍 넘기더니 어느 페이지에 시선을 떼지 않고 젊은 남성에게 물었다.
“유리, 지금 여기 조선소 건립이라고 쓰인 거 맞나?”
미하엘이 묻자 유리라고 불린 남성이 무표정으로 짧게 대답했다.
“네.”
“아무 연고도 없는 남쪽의 사업가가 모스크바도 아닌 이곳에 투자를 희망한다니 의외로군.”
미하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그것도 반년이나 기다려서요. 알아보니 당국의 업무 태만으로 답변이 늦어졌다고 합니다.”
“공무원들은 항상 그렇지. 지금도 소비에트 연방 시절처럼 행동해. 그래, 투자 규모는 어떻다고 하나?”
“아직 자세한 건 확인되지 않았지만, SC라고 하면 한국에선 대기업이라고 합니다. 회사의 규모가 큰 만큼 작은 규모의 투자는 아닐 거라 생각됩니다.”
“좋은 소식이구먼.”
“네, 충분히 좋은 소식입니다.”
“언제 한번 그곳의 대표를 만나 보고 싶군.”
“연락해 볼까요?”
“아니, 우리가 연락하면 우습게 보일 것 같군. 그쪽에서 연락하게 만들게나.”
“예, 시장에게 연락하겠습니다.”
그렇게 대화가 끊어지자 미하엘이 손짓을 했고 유리가 서재를 나갔다.
***
며칠 후.
최효석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공항을 빠져나가자 맑은 봄 날씨와 끝없이 펼쳐진 초원의 푸른 벌판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이야! 경치 좋은데?”
“그러네요.”
이국적인 광경에 텐션이 올라간 최효석이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이곳에 온 이유를 스스로 상기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조선소 건립.
이곳이 러시아에 몇 없는 항구지만 겨울에는 바다가 어는 곳이다.
당연히 조선소 건립이 쉬울 리 없다.
하지만, 성공했을 때의 메리트 역시 그만큼이나 커다랗다.
일단, 신종민과 상의한 것처럼 한국 정부를 협박할 만한 수단이 될 수 있고.
러시아 정부의 호의를 사게 되면 이너서클과의 싸움에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그렇게 공항 근처에서 약간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저 멀리 다가오는 차들이 보였다.
“러시아의 극동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바로 블라디보스토크 시장과 그 일행이 우리를 마중 왔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시장인 제가 ‘직접’ 부지를 안내해 드릴 예정입니다.”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지정해 준 차를 타자 최효석이 궁금했는지 몸을 돌려 물었다.
“사장님아, 러시아어는 언제 배웠대?”
방심하고 있어서 순간적으로 전생이라고 답을 할 뻔했다.
“얼마 전부터 공부했습니다. 생각보다 쉬워요.”
“시간 되면 나도 좀 알려 줘. 나중에 러시아 여자들 꼬실 때 써먹게. 흐흐흐.”
“네.”
“점심에 킹크랩 어때? 저녁에는 사슬릭.”
“좋은데요?”
“웬일이래? 맨날 아무거나 먹자고 하던 사장님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왔는데 기념으로 맛있는 것 좀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흐흐, 나와 같이 다니다 보니 드디어 맛에 대해 깨달았구나.”
그렇게 최효석과 잡담을 하던 중 부지에 도착했다.
“황무지네….”
바다에 인접해 있다는 걸 제외하고 풀 한 포기 없는 황무지.
심지어 도로도 인접해 있지 않아 차에서 내려 10분이나 걸어가야 도착할 수 있는 땅이다.
그런 광경을 본 나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자기들이 아쉬워 실사단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으면서 조선소를 지을 규모도, 인프라도 안 되는 부지를 보여 준다고?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내 표정이 안 좋아진 걸 확인한 블라디보스토크 시장이 다가왔다.
“엘, 여기는….”
“설명은 필요 없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우리의 투자를 원치 않는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 그게!”
당황한 시장이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듣기도 싫었다.
저 멀리서 블라디보스토크 시장이 뭐라 뭐라 소리치는 게 들렸지만 무시하고 걸어 내려갔다.
“…….”
“…….”
돌아가는 길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선천적으로 적막한 걸 견디기 힘들어하는 최효석이 입을 열었다.
“사장님아. 이래도 되는 거야?”
“네? 뭐가요?”
“저쪽에서 더럽게 나온 건 알겠는데 이렇게 돌아가도 되냐고?”
“뭐, 아쉬우면 찾아오겠죠.”
“하긴, 목마른 놈이 우물 파는 법이지.”
아니나 다를까, 호텔에 도착해 짐을 풀고 있을 때 카운터에서 목마른 놈이 찾아왔다는 전화가 왔다.
“누구야?”
“목마른 놈이요. 많이 말랐는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