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화
“이신후!”
“호랑인가?”
호랑이는 제 말을 해야 오지만 최효석은 생각만 했는데도 눈앞에 소환됐다.
“뭐 하러 여기까지 나왔습니까?”
“에이, 싸장님이 미국에서 돌아오는데 당연히 나와야지. 12시간이나 비행기 타서 피곤할 게 뻔한데 내가 집까지 모셔다드려야 하지 않겠어?”
“퍼스트 클래스여서 누워서 왔습니다. 12시간이나 잤더니 오히려 개운한데요?”
“젠장, 헛발질했네. 점수 좀 따서 연봉 좀 높여 보려고 했더니.”
“흐흐, 안타깝지만 내년 연봉은 동결입니다.”
최효석이 모는 벤츠를 타고 강남에 있는 SC 사옥으로 향했다.
원래 조수석에 타려고 했지만, 최효석이 대기업 오너씩이나 되는 놈이 그러면 안 된다고 한사코 나를 뒷좌석으로 보냈다.
“종민이가 오매불망 기다리더라.”
“그래요?”
내가 미국에 있는 동안 신종민과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된 최효석이 편하게 말을 했다.
“나야 잘은 모르지만 높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것 같더라고. 아! 그 사람도 봤다.”
“누구요?”
“서울시장, 행사장에서 끈덕지게 달라붙더라고.”
서울시장이면 다음 대통령인데···.
“혹시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들으셨습니까?”
“종민이한테 물어보려고 했는데 피곤해 보여서 말았어. 괜히 나까지 나서기가 좀 그래서.”
“잘하셨어요.”
***
신종민이 피골이 상접한 얼굴로 우리를 맞아 줬다.
“커피 괜찮습니까?”
“믹스 있으면 3봉 타서 종이컵에 주세요. 달달한 게 먹고 싶네요.”
“명색이 회장님인데 믹스커피로 되겠습니까? 체통이 있는데요.”
말은 저렇게 하면서 그는 정수기 앞에서 커피를 탔다. 내 것뿐만 아니라 자기 것도.
후루룩.
혈당이 뛰어오르는 맛이다.
졸음이 싹 달아난다고나 할까?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많이 힘드셨죠?”
인사치레에 신종민이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종민의 고충이 뭔지는 정확하게 알고 있다.
어느 정도 정상화했다고 하더라도 한 번 망한 회사를 경영하는 일이 쉬울 리 없다.
전 인원의 5분지 1을 잘라 버린 지금? 업무 지옥이라고 보면 된다.
게다가 각종 모임은 물론이고 면담을 요청하는 정치인까지 만나야 한다면 이건 과로사 특급 티켓을 끊는 거나 다름없다.
사실, 나 역시도 1회차에서 수도 없이 정치인들을 만났고 그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다.
뭐, 나중에는 전혀 쓸데없는 만남이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말이다.
“정해 드리겠습니다.”
“네? 뭘···.”
“앞으로 퇴근하면 바로 집으로 직행하십시오. 그리고 퇴근하고 누구를 만나는 일 따위는 없을 겁니다. 혹시라도 전화 오면 받지 말아 버리세요.”
내 말에 신종민이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럼 앞으로 회장님이 만나시려고 하는 겁니까?”
“아뇨, 우린 아무도 만나지 않습니다. 만나 봤자 돈이나 요구할 게 뻔한데 뭐 하러 만납니까?”
“그렇게 하면 정치권의 표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국가에 빚을 진 게 있나요? 표적이 돼서 공격당하는 걸 두려워할 만큼?”
“···아뇨, 없습니다.”
“그런데 뭘 두려워하시죠?”
“회장님, 한국에서 사업을 한다는 게···.”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 압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마침 우리는 내수 시장과 상관없는 업종 아닙니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사실입니다.”
“정 걱정된다면 대비책을 세워야겠죠?”
“대비책이요?”
신종민의 물음에 옆에 있는 지도를 펴서 한 곳을 집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이곳에 조선소를 지을 겁니다. 울산에 있는 조선소보다 크게요.”
이게 바로 내가 생각한 대비책이다.
대대적인 러시아 투자.
나와 적대적인 정치인들이 국가 권력을 등에 업고 SC를 공격한다? 막을 도리가 없다.
세무 조사? 10원짜리 하나까지 세세하게 따져 물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탈세범이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노무, 행정, 각종 허가까지. 공격당할 거리는 많다.
당장 얼마 전에 강행한 정리 해고조차도 문제가 될 소지가 엄청나게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만의 무기를 만들 필요가 있다.
조선업과 플랜트 사업은 SC의 주력 사업임과 동시에 노동 집약적 이차 산업이다.
이 얘기를 다시 말하면 그만큼 고용 효과가 엄청나다는 뜻이다.
심지어 고용된 노동자 역시 저임금 계약직이 아닌 고임금의 기술직 정직원이고 말이다.
실제로 중공업 계열 기업이 많이 모여 있는 울산 같은 경우 전국에서 1인당 GDP가 가장 높은 지역이기도 하다.
1회차에서 정치권에 배신당해 국가가 자국의 기업을 공격하는 모습을 본 나는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노동자는 유권자이며 정치권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유권자의 민심이라는 걸 말이다.
즉, 언제든지 기술과 자산을 이동시킬 준비를 완료해 놓고 공격을 당하면 소리치는 거다.
사업장을 폐쇄하고 해외로 공장과 본사를 이전하겠습니다, 라고 말이다.
실제로 성공 사례도 있었다.
2019년에 한국에 진출한 한 외국의 자동차 회사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인질로 혈세 8천억을 지원받고도 2020년에 공장을 매각해 버렸다.
사기나 다름없는 일이지만, 노동자를 인질로 삼아 국가를 협박해 원하는 것을 얻어 낸 정석적이고 우수한 사례였다.
2회차에서 이 사실을 보도한 뉴스를 보던 나는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다.
시팔, 나도 저렇게 할걸.
“괜찮겠습니까? 우리는 러시아에 대해선 모릅니다만···.”
신종민의 우려스러운 대답에 나는 검지와 엄지를 붙이며 답을 줬다.
“괜찮습니다. 우리에겐 이게 있잖습니까.”
“돈이요?”
“네, 모르는 곳이면 어떻습니까? 돈 싸 들고 가면 반겨 주겠죠.”
“···일단, 러시아 당국에 문의를 넣어 보겠습니다.”
대답을 한 신종민이 회장실을 나가던 찰나 몸을 돌렸다.
“회장님.”
“예? 왜요? 아직 더 궁금하신 게 남았습니까?”
“다름 아니라 비서 말입니다.”
비서란 말에 그동안 신종민을 보며 느낀 허전함의 정체가 뭔지 깨달았다.
대기업 부회장씩이나 되는 그가 비서 하나 없이 다녔던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부회장님씩이나 되시는데 아직 비서가 없네요. 일단 급한 대로 근속 연수가 되는 비서들과 함께 움직이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게···. 없습니다.”
“네? 그게 무슨······.”
“기존에 있던 비서직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모조리 정리 해고 했습니다.”
“설마요? 농담이시죠?”
“농담이 아닙니다. 회장님의 말씀대로 횡령에 가담한 인원을 모두 쳐내다 보니 한 명도 남지 않게 됐습니다.”
어떻게 비서들이 횡령에 가담할 수가 있지? 그것도 한 명도 빠짐없이?
내가 의문에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자 신종민이 부연 설명을 했다.
“오수홍 실장 아시죠?”
“네, 지금 감옥에 있는 전 ST의 이인자 아닙니까?”
“예, 그 사람이 주가가 오를 만한 이슈가 있을 때마다 비서실에 흘렸답니다.”
“···그럼 횡령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내부자 거래라서 현재 형사 재판 중입니다. 이미 언론에 알려진 사건이라 해고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고요.”
참 가지가지 한다.
“공고를 올려서 비서직 신규 채용을 하세요. 명색이 부회장인데 혼자 다녀서야 쓰겠습니까?”
“회장님께서는···.”
“저는 필요 없습니다. 최효석 실장이 있지 않습니까. 나중에 필요하면 알아서 뽑겠습니다.”
***
며칠 후.
한동안 SC 그룹 업무에 집중하던 중 임시로 그룹 비서실장직을 맡은 최효석이 회장실의 문을 두들겼다.
“예, 들어오세요.”
“회장님아, 큰일 났다.”
“예?”
“그 내가 저번에 말했던 서울시장 있잖아? 누구였더라?”
“이창우요. 그 사람이 왜요?”
“면담 요청한다고 비서실로 전화 왔어. 그것도 직접 전화했더라.”
현직 서울시장이 사기업 비서실에 전화해서 오너에게 만나자고 한다고?
내 지시 때문에 신종민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건 명백한 무리수다.
“그냥 거절하세요. 신종민 부회장이 연락을 안 받으니까 비서실에 전화한 거 같습니다.”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안 나오면 찾아오겠다고 해서 그렇지!”
머리가 지끈거려온다.
이건 정말 미친놈 아닌가. 현직 정치인이 기업인을 만나는 게 무슨 자랑이라고.
“···어디서 만나자고 합니까?”
“저녁 7시. 요 앞 한정식집으로 자기가 오겠대.”
“미치겠네···.”
“그냥 바빠서 안 된다고 할까? 찾아오면 내가 두들겨 패서 쫓아내면 되지!”
“그러다간 감옥 갑니다. 명색이 현직 서울시장인데요.”
“변호사만 붙여 줘. 명색이 비서실장인데 별 하나쯤은 달고 있어야지.”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허풍일지 몰라도 왠지 최효석은 진짜 저지를 사람이다.
상대가 이 정도로 밀어붙인다면 어쩔 수 없다.
물론 부탁을 들어주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지만.
“만난다고 전해 주세요. 저녁에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가구요.”
“내가 한정식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고. 2인분 먹어도 되나?”
“3인분도 상관없습니다.”
몇 시간 후.
약속 시각에 맞춰 우리는 회사 근처 한정식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현직 서울시장이자 야당의 대선 후보인 이창우를 만날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이창웁니다.”
“이신훕니다. 여긴 저희 회사 최효석 전무입니다.”
이창우가 내 인사말을 과장되게 받았다.
“이렇게 재계의 신성을 뵙는군요. 영광입니다.”
“과찬이십니다. 신성이라뇨. 그냥 장사꾼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이런! 겸손도 하셔라. 일단 앉으시죠. 여기 음식이 아주 괜찮습니다.”
이창우가 자리를 권했고 곧 음식이 들어왔다.
고급 한정식집이니만큼 수십 가지의 가짓수를 자랑하는 큰 상이 통째로 들어왔다.
“어서 드시지요.”
“네, 그럼 먹겠습니다.”
최효석이 서울시장이 눈앞에 있는데도 전혀 눈치 보지 않고 음식들을 집어 먹기 시작했다.
와구. 우물. 우물.
“시장님, 거기 굴비 안 드시면 저 주시면 안 됩니까?”
“···아, 예, 여기요. 여기 전무님께서는 굴비를 좋아하나 봅니다.”
“어휴, 없어서 못 먹죠. 감사합니다. 쩝쩝.”
내가 봐도 진상이다. 이건.
이창우를 슬쩍 보니 최효석의 태도에 당황한 듯 보였다.
하긴, 명색이 서울시장인데 이런 취급은 또 처음이겠지.
“그런데 무슨 일로 이렇게 보자고 하신 겁니까?”
“하하, 딱히 일이 있어서 이렇게 보자고 한 게···.”
정치적인 수사가 들리자 이창우의 말을 가로막았다.
“시장님, 저는 군인 출신이라 말을 돌려 하지 못합니다. 시장님이 용건이 없다고 하시면 이렇게 밥만 먹고 헤어지는 겁니다.”
이창우가 얼굴을 굳히며 말을 다시 했다.
“그럼 직설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내년에 대선이 있습니다. 알고 계시지요?”
“예.”
“제가 선거에 나가는데 돈이 아주 많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선거 자금을 보태 달라는 말씀입니까?”
“염치없지만 도움을 좀 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워낙 거금이 들어가는지라···.”
“죄송합니다. 저희 SC 그룹은 정치 자금은 일절 손대지 않기로 했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식사만 하시고 들어가시지요.”
이창우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