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화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신종민 부회장?’
한국 시간으로 7시도 안 됐을 텐데 웬일이지?
“여보세요?”
-회장님, 아직 미국입니까?
“예, 맞습니다.”
-빨리 오셔서 저 좀 살려 주십시오. 저 오늘 2시간 자고 출근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과로로 쓰러지게 생겼습니다.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말도 마십시오. 회사 업무는 업무대로 다 하고 퇴근하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다 보면 화장실 갈 시간도 없습니다. 아직 결혼을 안 해서 망정이지 만약 유부남이었으면 지금쯤 법정에서 이혼 소송 중이었을 겁니다.
신종민 부회장이 열심히 해 주고 있는 것 같아서 안심된다. 아무래도 빵빵한 상여금으로 보상해 줘야 하지 싶다.
“대신 연봉이 빵빵하잖습니까. 연말에 상여금 넉넉하게 넣어 드릴 테니 조금만 고생해 주세요.”
-흐흐, 사실 그걸 노리고 하소연한 겁니다. 아! 그건 그렇고 최 전무 말로는 투자 때문에 가신 거라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 투자 말입니다. 저희도 껴도 됩니까?
“네?”
-ST 시절 수주한 선박의 대금을 받았습니다. 한화로 4천억가량 되는데 원래대로라면 은행에 상환해야 하는 돈이지만 회장님께서 그룹 채무를 모두 상환해 주신 덕분에 유보금으로 남겨 놨습니다.
“제가 전에 유보금이 생기면 전부 R&D 비용으로 사용하라고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회장님.
신종민이 목소리를 깔았다. 무언가 억울함이 느껴졌다.
-저도 그러려고 했습니다만 회장님이 시키신 대로 정리 해고를 마치고 나니까 일할 사람이 모자라 R&D는커녕 납기 지키는 것도 빠듯합니다. 오죽하면 노조의 최우선 과제가 연봉 인상이 아니라 노동 시간 단축이겠습니까.
하긴, 전 직원의 5분지 1을 해고했는데 회사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도 용하다.
그만큼, 신종민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미처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회장님께서 죄송할 일이 아니죠. 회삿돈 빼먹은 놈들이 이렇게 많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다 자르고 나니 회사가 깨끗한 연못이 된 것 같아 기분은 좋습니다.
“그래요? 그거 하나는 다행이네요.”
-그럼 끼워 주시는 겁니까? 이번 기회에 유보금 좀 왕창 불려 주십시오. 이참에 우리도 해외에 조선소 하나 크게 지으렵니다.
그룹의 자금을 투자하는 건 이번 계획에 없었지만, 이번 기회에 사세를 확장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습니다. 계좌 번호 불러 드릴 테니 그쪽으로 입금하세요.”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보내겠습니다.
“제가 다 날려 먹으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저는 회장님의 천재적인 투자 감각을 믿습니다.
딸칵.
투자 감각은 개뿔.
ST를 먹어 치운 일은 내부 정보를 기반으로 한 거고 이번 투자 건은 미래 지식을 가지고 있어 가능한 일이다.
물론, 투자를 하는 데 있어 미래 지식은 치트키나 다름없지만, 재능이나 감각을 논한다면 나는 평범한 사람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첸을 영입한 거고 말이다.
똑똑.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 문을 여니 첸이 우중충하게 서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죄송합니다.”
첸이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골드만삭스에서 있었던 일이 마음에 걸려 찾아온 것 같다.
“괜찮습니다. 부모님의 원수를 눈앞에 두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이상한 일일 겁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더 좋고요.”
“그럼 저는 돌아가는 비행기를 예약하겠습니다.”
“아! 오후 비행기로 잡아 주세요. 아무래도 내일 하루 더 월가에 방문해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여기서 할 일은 끝나지 않았습니까? 투자금 전액을 소진했는데요.”
“조금 이따가 계좌 확인해 보십시오. 투자금이 추가로 들어와 있을 겁니다.”
***
전날 SC에서 들어온 자금을 가지고 우리는 JP모건으로 향했다.
그리고 우리는 로비에서 담당자를 기다리다가 이틀 전에 만났던 제니를 만날 수 있었다.
“어머?”
“여기서 뵙는군요.”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설마 저를 찾아오신 건가요?”
제니가 새초롬한 얼굴로 물었다.
“차라리 제니에게 전화할 걸 그랬네요. 저희는 투자 상담을 받기 위해 왔습니다.”
“혹시 스티븐 컴퍼니?”
“예, 맞습니다만….”
“제가 담당자예요. 반가워요. 제니 리예요.”
제니가 이틀 전처럼 명함을 건네며 자기소개를 했다. 제니 같은 미인의 미소는 언제 봐도 마음을 풀어 준다.
그 증거로 옆에 있는 첸이 눈을 떼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인사하세요. 이쪽은….”
“알아요. 스티븐 첸, 스티븐 컴퍼니의 대표잖아요?”
제니가 자신의 이름을 안다는 듯이 말하자 첸이 깜짝 놀랐다.
“절 아십니까?”
“벌써 잊어버렸어요? 저 제니예요. 하버드에서 같이 공부한.”
“맙소사! 제니?”
“예, 맞아요. 그 제니요.”
“이럴 수가! 똑같은 후드티만 1년 내내 입고 도서관에서 살던 제니? 여드름 가득했던? 네가 그 제니라고?”
파직.
제니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나는 게 보였다.
“선배야말로 매일 씻지도 않고 도서관에서 살지 않았나요? 그때 별명이 스컹크였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나는 공부하느라고 바빠서 그런 거고.”
“저는 뭐 놀았어요?”
“이야, 정말 믿기지 않네, 그 제니가 이렇게 멋진 커리어 우먼이 될 줄이야.”
“제가 원래 포텐셜은 있었어요. 공부하느라고 숨기고 살아서 그렇지!”
두 사람 케미가 꽤 잘 맞는다.
“아! 맞다. 제니 한국계라고 하지 않았어?”
“네, 맞아요.”
“여기 있는 엘도 한국인이야.”
“어머, 한국분이셨군요. 저는 홍콩분인 줄 알았어요. 한국분이신 줄 알았으면 이틀 전에 한국어로 대화해도 됐을 텐데.”
제니가 한국어로 말을 걸어 왔다.
“저도 몰랐습니다. 이름이 제니여서 동양계 미국인인 줄만 알았습니다.”
“이런 곳에서 동향 사람을 만나니 반갑네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즐거운 분위기를 유지했다. 제니가 동향 사람이 그리웠던지 내게 계속 말을 걸어 왔다.
“그럼, 일 얘기를 시작할까요?”
제니가 운을 띄웠다.
“무슨 상품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요즘 핫한 CDO? 아니면 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에 투자하는 건 어떠세요?”
“제니, 우리는 CDO에 대한 CDS를 매수하고 싶어.”
제니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선배, 지금 CDO의 프리미엄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 거 알아요?”
“알아. 그래서 매수하고 싶은 거야.”
“이럴 수가, 미국 부동산 시장이 거품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나 말고도 더 있었다니.”
이번에는 내가 놀랐다. CDO를 파는 데 환장한 월가에 있으면서도 부동산 시장의 폭락을 예측하다니.
첸도 놀랐는지 감탄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예측했었어?”
“지금 미국 부동산 시장은 미쳤어요. 은행은 더 미쳤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단순해요. 은행이 주택 수요자를 양산하고 있기 때문이죠. 바로 주택 담보 대출이란 이름으로.”
“다른 나라에도 주택 담보 대출은 존재하잖아.”
“대신 미국처럼 소득도, 자산도 없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지는 않죠. 조금만 있어 봐요. 연체율이 천정부지로 솟구치기 시작하면 부동산 가격이 폭락할 테니까.”
‘…대단한데?’
순수하게 감탄했다. 미래에 생길 일을 알고 있는 나와는 달리 혼자서 예측한 거니 말이다.
이런 사람이 진짜 인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됐든 CDS는 원하는 대로 매수할 수 있어요.”
“응? 방금까지 시장의 붕괴를 예측하지 않았어? 만약 제니의 말대로 되면 JP모건에 큰 손해가 나는 거잖아.”
“그건 내 생각이고 여기 임원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오히려 내 판단대로 CDS 판매를 거부하면 날 자르려고 들걸요?”
“그럼 다행이네. 다른 은행 가기 귀찮거든. 비행기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고.”
“얼마를 원해요? 백만 달러? 천만 달러?”
“No, 우린 4억 달러를 원해.”
“…선배 성공하셨구나. 4억 달러라니.”
“무슨 소리야? 월가에서 4억 달러면 껌값인 거 몰라?”
“그거야 전통 있는 투자 기관에서나 하는 얘기고 선배는 문 연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벌써 4억 달러나 되는 투자 금액을 모을 정도면 대단한 거죠.”
“요율은?”
“원래 7%를 표준으로 하는데 선배니까 특별히 6%로 해 드릴게요.”
“5%.”
“5.5%.”
“콜.”
“그럼, 여기 서류에 서명해 주세요. 전용 계좌 터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시고요.”
잠시 후, 우리는 서명을 마치고 공항으로 가기 위해 제니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잘 가세요. 이 대표님은 조만간 한 번 더 봬요.”
“저 말입니까?”
“예, 한국 가면 연락할게요. 그때 명함에 있는 번호로 연락드리면 되죠?”
“네, 만약 안 받으면 사무실로 연락해 주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일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안녕히.”
Goodbye.
이제 12시간 비행만이 남았다. 나는 서울로, 첸은 홍콩으로.
스마트폰이 없어 심심하겠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첸과 다른 비행기를 타기에 귀 건강은 지킬 수 있다는 점과 퍼스트 클래스를 예약해서 편하게 누워서 갈 수 있다는 점이다.
비행기에 누워 머릿속으로 이번 뉴욕행의 성과를 점검했다.
AIG에 20억 달러, 골드만삭스에 40억 달러, 그리고 JP모건에 4억 달러.
이 증권들은 각각 500억 달러와 1,000억 달러 그리고 70억 달러로 돌아올 것이고 이 돈을 바탕으로 나만의 세력을 공고히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야지만 이너서클들과 싸울 준비를 겨우 마쳤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몇 가지 불안함은 존재한다.
가장 먼저 돈의 회수, AIG 같은 경우 정확한 보험금 지급이 필수인 보험 회사이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장담할 수는 없다.
500억 달러면 영혼까지 팔아넘길 사람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문제는 골드만삭스다.
탐욕스러운 월가의 큰 형님 격인 만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급을 미루거나 하지 않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러진 않길 바라야 하겠지만 정말 극단적으로 히트맨을 보낼 가능성도 충분하다.
두 번째로는 미국 정부다.
원 역사대로라면 서브프라임 모기지 론 사태로 인해 월가가 파산 위기에 몰렸을 때, 백악관은 1조 달러를 풀어 파산 위기에 몰린 기관들을 인수하고 부채를 탕감시켜 사태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때의 골드만삭스는 가까스로 살아남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번 골드만삭스는 확실히 파산한다.
아무리 재보험으로 리스크를 줄였다고 하더라도 1,000억 달러라는 돈의 무게는 그만큼 무겁기 때문이다.
만약, 미 정부에서 골드만삭스 파산의 책임을 내게 묻는다면? 말도 안 되지만 의회에서 CDS의 지급을 막는 법이 통과된다면?
이처럼 내 개입으로 인해 상황이 원 역사와는 다르게 흘러갈 것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이 때문에 슬슬 자체적인 무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행보로 인해 적이 만들어질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최효석은 뭐 하고 있을까? 갑자기 보고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