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화
“월가의 빌런이라….”
첸은 신후와의 대화를 떠올리고 입가에 조소를 띄었다. 황당했지만 생각할수록 마음에 들었다.
복수를 위해 홍콩으로 돌아갔지만, 아직 마음 한편에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월가에 피해를 주지 않는 포트폴리오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후와의 대화에서 깨달았다. 악당이 되지 않으면 복수는 어렵다는 것을 말이다.
***
다음 날, 첸과 나는 월가로 향했다. 오늘 방문할 곳이 상당히 많았는데 그중에서 가장 처음은 AIG다.
AIG는 미국 최대의 보험 회사로 금융 보험 판매가 주력인 회사였는데 월가의 주력인 CDO의 붕괴를 대비한 보험 상품인 CDS를 체결해야 하니 이곳부터 방문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순서였다.
“CDO의 헷지 상품을 매수하고 싶으시다고요?”
AIG의 직원이 되물었다.
“예, CDS(신용 부도 스와프)를 체결하고 싶습니다.”
보험 상품인 CDS는 일정 금액의 보험료를 내고 투자한 상품이 부도 또는 그에 가깝게 무너졌을 때 보험금을 지급받는 상품이다. 첸이 어제 가지고 온 포트폴리오도 이 상품을 기반으로 했다.
“그렇다면 잘 찾아오셨습니다. 월가에서 저희 AIG의 조건이 가장 좋을 겁니다. 혹시 투자 금액은 얼마나 생각하시는지….”
“The more the better,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래도 대략적인 금액을 알아야 저희도 맞는 상품을 소개해 드릴 수 있습니다.”
“10억 달러 이상입니다.”
“…자, 잠시만요. 임원분을 모셔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얼마든지요.”
직원이 허둥지둥 뛰어 올라가는 모습을 보며 첸이 여유를 부렸다.
“조짐이 좋은데요? 약속도 잡지 않았는데 임원이 내려올 정도면요.”
“그런가요? 제 눈에는 호구가 다른 곳으로 갈까 봐 서두르는 것 같은데요?”
“하하, 그것도 맞는 말이네요.”
잠시 후.
풍성한 머리숱을 가진 중년의 남자가 내려와 자신의 명함을 건넸고 우리는 인사를 나눴다.
“스티븐 첸입니다. 홍콩에서 작은 투자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쪽은 저희 투자자 중 한 분이신 엘 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지미 헤리슨입니다. 짐이라고 불러 주세요.”
짐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명함을 건넸다.
“올라가시죠. 위층에 VIP 전용 회의실이 있습니다.”
잠시 후, 짐의 안내에 따라 회의실로 올라갔고 곧 입을 다물지 못했다.
회의실엔 월가의 단면을 보여 주듯 명품 브랜드의 의자부터 시작해서 마호가니 테이블이 설치되어 있었고 심지어 수백만 달러를 호가하는 그림을 걸어 놓았다.
“VIP 고객님들이 오셨다고 해서 가장 좋은 회의실로 안내해 드렸습니다.”
“…그러시군요.”
이놈이 우리를 여기로 안내한 이유를 대충은 알 것 같다.
판돈을 들고 온 호구를 압도해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함이겠지. 조금 유치하긴 하더라도 충분히 효과가 있을 만한 방법이다.
당장 그 증거로 내 옆에 있는 첸의 눈이 휘둥그레져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훌륭합니다. 그럼, 일 얘기를 해 볼까요?”
내가 분위기를 깨자 짐이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서류철을 빼 들었다.
“CDO의 헷지 상품을 원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정신을 차렸는지 첸이 차분한 분위기를 내뿜었다.
“그럼 CDS(신용 부도 스와프)를 생각하실 테고요.”
“네, 맞습니다.”
“이해를 할 수 없군요. CDO의 수요가 하늘 높이 치솟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이런 선택을 하시다니요.”
“그건 저희가 판단할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하하, 맞네요. 첸, 실례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CDS의 요율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눠 보죠. 6%, 어떻습니까?”
CDS의 요율이란 받게 되는 배당금의 퍼센티지를 말한다. 즉, 1년간 10억 달러를 보험금으로 내면 166억 달러를 받게 된다는 뜻이다.
“글쎄요…. 10억 달러를 체결하는데도 그 정도입니까?”
“혹시 생각해 두신 요율이 있으십니까?”
“저희는 4%를 원합니다.”
“…어렵군요.”
“아까 말씀하시는 걸 보아 CDO가 안전하다고 보시는 것 같은데 상관없지 않을까요? 짐의 생각대로 된다면 AIG가 보험금을 지급할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맞는데….”
짐이 판돈을 올리는 걸 경계했다. 이해는 된다. 장땡을 잡아도 삼팔광땡을 두려워하는 게 도박판의 생리가 아닌가.
아무래도 내가 그의 결정을 도와줘야 할 것 같다. 판돈을 키워서 말이다.
“짐.”
“네.”
“한 가지 제안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얼마든지요.”
“4%, 대신 20억 달러를 체결하겠습니다. 어떠십니까?”
짐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고민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도박판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법이 바로 탐스러운 판돈 앞에서 냉정한 판단은 없다 아니겠는가.
여기서 탐스러운 판돈은 AIG가 1년 동안 받을 보험금이 20억 달러이고 냉정한 판단은 만약 일이 잘못될 경우 지급해야 할 보험금이 500억 달러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짐의 대답은 YES였다.
“그렇게 하시죠. 계약서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AIG에서의 계약을 마쳤다.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정문을 나서자마자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바로 골드만삭스.
첸의 전 직장이자 월가 은행 중 큰형님 격인 은행이다.
“헤이! 스티브. 이게 얼마 만이야?!”
미리 약속을 해 두어선지 첸의 옛 상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로져스.”
“잘 지냈어? 소식은 들었어. 조의를 표하네.”
“이제 괜찮아졌어요.”
서로의 대화만 들으면 친근한 사이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로져스라고 불린 인물은 시종일관 첸을 깔보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고 반대로 첸은 눈에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여기 이분은 누구신가?”
“아!, 저희 투자자 중 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번 투자를 저와 같이 설계하신 분이기도 하구요.”
“오오! 젊은 나이에 대단하시군요. 반갑습니다. 마크 로져습니다.”
“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서 올라가시죠. 제가 성질이 급하다 보니 빨리 일 얘기를 하고 싶군요.”
“그러시죠.”
잠시 후, 우리는 로져스의 안내로 사무실에 올라가는 길에 한 무리의 동양인들과 마주쳤고 첸은 그들을 보자마자 얼어붙어 버렸다.
“이번에 MOU를 맺은 중국 중신 은행의 임원들입니다. 워낙 거액을 투자해서 이렇게 본사에 초대했습니다. 아! 스티브와는 아는 사인가?”
우연이 아니다. 로져스가 첸의 약점을 건드리기 위해 수를 쓴 게 분명하다. 첸의 부모님 일은 일반인들은 알기 힘든 일이었지만 월가에서는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었으니 말이다.
“회의실이 어딥니까? 시간이 많이 없는데요.”
“아! 이쪽입니다.”
우리를 지나치는 중신 은행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더니 키득거리며 웃었다.
첸의 멘탈이 더욱 터져 버린 건 물론이다.
‘어쩔 수 없이 이번엔 첸 대신 내가 나서야겠군.’
“바로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CDS를 체결하고 싶습니다.”
“죄송하지만 우리 골드만삭스는 CDS를 판매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럴 리가요. 제가 알기로 여태 꽤 많이 판매한 거로 아는데요?”
“아, 더 이상이란 말을 빼먹었군요. 올해부터 판매하지 않는 게 본사 지침입니다.”
“그렇습니까?”
“예.”
“…….”
“…….”
약간의 침묵. 그 끝에서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바로 나였다.
“어떤 조건에도 말입니까?”
“AIG에서 있었던 일을 들었습니다.”
동문서답.
조건을 묻는 내 물음에 로져스가 대뜸 AIG를 언급했다.
결국, 이 새끼는 AIG 이상의 판돈을 원하는 거다.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마. 대신 책임은 혹독하게 져야 할 거다.’
“벌써 로져스에 귀에 들어갔습니까? 불과 1시간도 되지 않은 일인데 엄청나게 빠르군요.”
“월가의 벽은 생각보다 얇습니다.”
“원하시는 조건을 말씀해 주시면 고려해 보겠습니다.”
“20억 달러 이상, 요율은 7%를 원합니다.”
“과합니다. 4% 이상의 계약을 체결할 바에는 다른 은행으로 가겠습니다.”
“글쎄요. 받아 줄 은행이 있을까요?”
로져스가 우리의 약점을 치고 들어왔다.
그의 말이 맞다. 월가에 있는 은행들의 규모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책임질 수 있는 액수가 있다.
AIG나 골드만삭스처럼 거대한 규모가 아닌 이상 500억 달러를 단기적으로 지급할 일이 발생한다면 파산을 면치 못할 게 뻔했다.
그럼 어떻게 되냐고?
돈을 지급할 은행이 망해 버렸으니 당첨된 복권이 휴지 조각이 되는 거다.
“30억, 4%.”
“No.”
“40억, 4%. 이 이상을 원하시면 이대로 일어나서 JP모건으로 가겠습니다. 투자 금액을 줄인다면 충분히 받아 줄 테니까요.”
로져스가 얼굴에 웃음을 만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습니다. 40억, 4%. 계약서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렇게 협상이 종료될 찰나.
정신을 차린 첸이 벌떡 일어났다.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혹시나 첸이 협상에 초를 칠까 두려운 로져스가 날카롭게 받았다.
“무슨 조건인가?”
“골드만삭스가 월가 최고의 은행임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희의 투자가 성공했을 때 1,000억 달러가 넘는 돈을 지급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로져스가 미소를 지우며 답을 줬다.
“골드만삭스의 자산을 생각한다면 그런 말은 나오지 않을 텐데?”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만 더 확실한 지급 보증책이 있었으면 합니다.”
“어떻게?”
“우리의 거래에 재보험을 들어주십시오. 골드만삭스가 파산한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지급될 수 있도록.”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점을 짚어 내는 첸의 말에 감탄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정리한 자료에 따르자면 골드만삭스가 지급할 수 있는 최대치는 500억 달러.
하지만, 40억 달러로 올라 버린 투자액 덕분에 예상 수익금은 1,000억 달러로 올라가 버렸다.
아무리 골드만삭스가 세계 최대의 투자 은행이라도 단기적으로 1,000억 달러를 지급할 수는 없을 게 불 보듯 뻔하다.
‘더욱이, 지금 당장도 아니고 내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게 되면 지급이 불가능하다. 첸의 말이 백번 옳아.’
“…….”
“못 하신다면 저희는 일어나 보겠습니다.”
“하지만, 재보험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로져스의 말을 끊었다.
첸의 의견대로 협상을 밀어붙이기 위함이었다.
“첫 6개월은 골드만삭스, 다음 6개월은 우리가 내도록 하죠. 공평하지 않습니까?”
“계약서에 명시할 수 있습니까? 1,000억 달러의 재보험 비용은 꽤 비쌉니다. 그쪽이 가지고 있는 돈은 60억 달러가 전부인 거로 아는데요?”
“아! 제 명함을 깜빡 잊고 안 드렸군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줬다. 제니에게 준 명함과는 다르게 SC 그룹의 명함이다.
명함을 받은 로져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모를 리가 없다. 아무리 인지도가 떨어지는 극동의 기업이지만 선박 수주량만 보면 세계 5위다. 내가 인수하고 재무가 안정되자 국제 신용도도 크게 올랐고 말이다.
“재보험 비용을 SC에서 대납하는 거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알겠습니다. ‘이신후’ 님의 말대로 계약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시죠.”
그렇게 나는 골드만삭스를 파멸로 몰고 갈 계약서에 사인하는 데 성공했다.
회귀 3회차! 재벌빌런
지은이 : 키나아빠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