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화
첸은 뛰어난 금융 전문가다. 어렸을 때부터 금융 전문가인 부모님에게 조기 교육을 받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하버드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그것도 수석으로 말이다.
그곳에서 첸은 4년에 걸쳐 경제학을 배웠고 돈의 흐름에 대한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되었다.
졸업 후 골드만삭스에 인턴으로 취업해 정확히 1년 뒤 정직원으로 전환된 첸의 앞길은 탄탄대로처럼 보였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1년 뒤 부모님의 부고가 날아왔고 첸은 복수를 위해서 골드만삭스에 사표를 쓴 뒤 홍콩으로 돌아와 자신만의 투자 회사를 차렸다.
그런 첸은 현재 10페이지짜리 보고서를 읽고 있었는데 수십 번이나 읽었는지 보고서의 끝부분이 바스러질 정도로 구겨져 있었다.
“…대체 이건?”
첸이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보고서의 내용은 그 얇은 두께만큼이나 간단했다.
바로 미국에서 판매되고 있고 엄청난 투자금이 몰려 있는 CDO(부채 담보부 채권) 시장이 붕괴된다는 내용이다.
첸은 CDO 시장에 대해서 생각했다.
2001년, 연준위원장 그린스펀은 기자 회견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연방 공개 시장 위원회는 충분한 경제적 성장을 촉진할 필요가 있는 이상, 매우 협조적이고 조절적인 정책을 고수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 IT 버블 붕괴와 911테러 때문에 경기가 안 좋으니 국채 금리를 낮춰 시중에 돈을 풀겠다는 뜻이다.
졸지에 갈 곳 없어진 돈은 그나마 안정적인 투자처인 담보부 채권 시장 CDO를 주목했다.
CDO는 사람들이 주택을 사기 위해 이용한 담보 대출인 모기지 론 채권인 MBS를 파생 상품으로 바꾼 것인데 채무자가 돈을 갚지 않으면 노숙자가 신세가 되기 때문에 연체율이 낮은 편이었다.
그리고 이는 안정적인 투자처를 원하는 투자자들의 돈을 끌어 모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2003년이 되자 상황은 또 다른 국면을 맞이했다. 바로 미국 전역의 부동산 가격이 엄청나게 상승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은행에서 돈을 빌려 집을 샀고 은행들은 대출을 해 주고 채무자의 채권을 CDO로 만들어 팔아먹으며 수익을 올렸다.
부동산 가격의 가파른 상승 덕분에 CDO는 더욱 안정적이게 되었고 돈을 빌리려는 수요가 높다 보니까 수익률 또한 좋아졌다.
자, 이제 CDO는 세상에 없는 고수익 저위험의 투자처가 되었다.
안정적인 투자처를 원하는 투자자들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투자자들이 너도나도 CDO에 열광하기 시작하자 탐욕스러운 월가의 은행들은 욕심을 부렸다.
그들은 이제 자산이 없고 직업도 일정치 않은 서브프라임 등급의 사람들에게까지 돈을 빌려주었고 그 채권을 팔아먹으면서 엄청난 수수료를 챙겼다.
여기까지였으면 어쩌면 최악의 상황은 면했을 수도 있다.
그들은 신용 평가사와 짜고 프라임 등급의 채권 여러 개에 서브프라임 등급의 채권을 섞어 AAA 등급이라고 고객들에게 속여 팔기 시작했다. 고객들이 여기에 속는 것은 당연했고 말이다.
이런 식으로 운영된 지 3년.
이제 월가의 사람들은 더 이상 캐달락을 타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스포츠카를 타고 골프장에 갔으며 높은 위치에 있는 임원들은 전용기를 타고 스위스로 휴가를 떠났다.
보고서를 수십 번이나 정독한 첸은 이제 미국의 부동산 시장의 붕괴가 머지않았음을 직감했다. 당연히 CDO의 붕괴 역시 머지않았고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첸은 골드만삭스에서 고객들에게 CDO 관련 상품을 파는 데 열심히였던 자신의 멘트를 떠올리고는 소름이 돋았다.
-채무자들이 돈을 갚지 않으면 어떡하냐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주택을 담보로 잡아 놨으니 최악의 상황이 벌어져도 원금 회수는 걱정 없습니다.
라는 멘트와.
-집값이 떨어지면 어쩌냐구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집값은 지난 5년간 두 배가 넘게 올랐고 앞으로도 충분한 상승 여력이 있습니다.
같은 멘트 말이다.
‘나도 미쳤었구나. 명색이 경제학을 전공한 놈이 근거도 없는 말을 지껄이다니.’
부끄러워진 첸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첸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는 신후가 투자한 60억 달러에 대한 포트폴리오를 짜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어. 보고서가 사실이면 앞으로 2~3개월이면 징조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 징조는 곧 핵폭탄으로 바뀌어 월가를 터뜨리겠지.
깜깜한 사무실에서 첸은 홀로 키보드를 두들겼다. 몇 시간이고 말이다.
***
이틀 후.
원래 한국으로 향하려던 나는 최효석과 찢어져 뉴욕에 있는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갑자기 행선지를 바꾼 이유?
그건 바로 첸의 전화 때문이다.
-미스터 리, 당신의 보고서가 제 눈을 뜨게 해 주었습니다. 내일 투자를 실행하기 위해 월가에 갈 예정인데 같이 가 주실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싫다고 했다. 한국에서의 일이 워낙 쌓여 있기도 했고 몸매 좋은 여자도 아니고 칙칙한 남자와 함께 여행을 간다니 그게 웬 말인가.
당연히 거절의 의사를 밝혔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투자 근거가… 어디 보험사에… 뱅크오브 아메리카의 CEO….
TMT를 시전하는 그와의 통화가 너무나도 지겨워서 그냥 수락했다.
그냥 끊어 버렸으면 되지 않냐고?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이제 막 깐부를 맺은 첸과의 파트너십이 시작부터 금이 가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뉴욕행 비행기에 탑승했고 나는 안대를 쓴 채, 10시간 동안 첸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그나마 퍼스트클래스라서 다행이지 이코노미였다면 지금쯤 귀에서 피가 흐르고 있을 것이다.
다음부터는 좌석을 떨어뜨려서 가야겠어.
“일단 호텔로 가시죠?”
첸이 예약해 둔 호텔로 가는 것을 권했지만.
“죄송합니다만 먼저 가십시오. 저는 만나 볼 사람이 있어서….”
잠시라도 귀를 쉬게 해 주고 싶었기에 그와의 동행을 거절했다.
“알겠습니다. 뉴욕의 치안이 좋지 않으니 조심하십시오.”
아쉬운 눈빛의 그를 뒤로하고 나는 공항을 나섰다.
이제 어디로 가냐?
일단 여기저기를 구경이나 하며 시간을 때울 생각에 택시를 잡아탔다.
“월스트리트로 갑시다.”
***
두 시간 후.
월스트리트에 도착한 나는 엄청나게 후회하고 있다.
악명 높은 뉴욕의 러시아워를 깜빡해서 도로 위에서 시간을 다 보냈기 때문이다. 저녁때를 놓친 건 당연했고 말이다.
일단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핫도그와 뜨거운 커피를 사서 거리를 돌아다녔는데 월가를 바라보니 나름 감회가 새로웠다.
내 2회차의 피날레를 이곳에서 장식했기 때문인데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이너서클인 빌더버그에 한 방 먹여 주기 위해 이곳을 불태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뭐….
그 장면을 보며 머리에 총을 쏴서 자살했지만 말이다.
한 가지 아쉬운건 월스트리트를 불바다로 만들었을 때 빌더버그 클럽 놈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쿵.
너무 상념에 빠져 있었나?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쳤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부딪친 여성은 새까만 흑발을 가지고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동양계 미녀였다.
“어머? 커피가 코트에 쏟아졌어요. 이를 어쩌죠?”
“아? 그러네요. 괜찮습니다. 빨면 되죠.”
“그래도 세탁소 가면 비쌀 텐데….”
“정말 괜찮습니다. 정 그러시면 쏟아진 커피나 보충해 주세요.”
나는 바로 옆에 있는 스타벅스를 가리켰다.
“좋아요. 저도 한잔 마시고 싶었는데 마침 잘됐네요.”
미안했는지 나와 부딪친 여성이 흔쾌히 커피를 사 와 자신의 명함과 함께 건넸다.
한국계인지 중국계인지 알 수 없는 이름이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오? 아직 대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JP모건의 투자 매니저라니 대단하시군요?”
능력이 있는 커리어우먼이라는 점이었다.
“어머?!”
어려 보인다는 칭찬이 마음에 들었는지 제니가 자신의 양 볼에 손을 얹고 부끄러워했다.
“그럼 커피도 얻어 마셨으니 가 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뵐 일이 있으면 좋겠네요.”
“저도 그렇네요. 그런데 저는 명함을 드렸는데 그쪽은 안 주시나요?”
“이런, 깜빡했습니다.”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줬다. SC 그룹이 아닌 SC 인베스트먼트의 명함이었는데 회사명과 이름, 그리고 유선 전화번호가 영어로 적혀 있는 간단한 명함이었다.
“그쪽이야말로 젊어 보이시는데 투자 회사의 대표라니 놀랍네요.”
“이거 쑥스러운데요?”
“그럼 다음에 뵙는 날을 기대하죠.”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이제 호텔로 돌아가야겠다.
사실, 숙소를 월스트리트 바로 옆에 잡아 놨기 때문에 첸과 함께 택시를 타고 올 수도 있었다.
물론 그랬다면 내 귀에서 피가 났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숙소에 도착해 간단히 씻고 나니 벨이 울렸다.
아무래도 내일 일정을 상의하기 위해 첸이 방문한 모양이다.
“포트폴리오를 검토해 주십시오.”
“…비행기에서 다섯 번이나 검토하지 않았나요?”
“한 번 더 부탁드립니다. 대규모 투자인 만큼 투자자의 의견을 적극 반영 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휴…, 가지고 오세요.”
첸이 가지고 온 리포트를 건네받았다.
사실, 첸의 리포트를 처음 봤을 때 의외라고 생각했다.
풋옵션을 중심으로 몇몇 투자 회사와 은행에 공매도를 진행하며 엑시트와 동시에 환차익을 노리는 투자 방식.
월스트리트에 있는 기관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최대한의 수익을 얻으려는 의도가 보였다.
과감함이 보이지 않은 투자 방식이랄까? 내가 아는 그는 과감한 투자와 다른 기관들을 짓밟는 투자로 유명했었는데 말이다.
의문이 일었지만, 딱히 묻지는 않았다.
아쉽긴 하지만 첸의 방식대로 투자해도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었고 남다른 안정성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수익률은 높이고 리스크는 줄인다. 게다가 다른 기관들의 원한도 사지 않는다.
투자의 기본기가 꽉 차 있는 포트폴리오가 꽤 마음에 들기도 했고 말이다.
“이번 건 내용이 다르네요?”
“네, 리포트가 두 개였습니다. 하나는 비행기에서 설명 드린 거고 다른 하나가 이겁니다.”
“비슷한 내용도 아니구요.”
“네….”
자신이 없는지 첸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그런데 이걸 지금 주시는 이유가 뭔가요? 둘 중에 하나를 골라 달라는 뜻이라고 생각하면 됩니까?”
“그런 게 아닙니다! 사실 지금 가져온 리포트가 진짜 제가 원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짜다 보니까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게 뭔가요?”
“월스트리트에 너무 많은 원한이 쌓인다는 겁니다.”
“원한이요?”
“네, 거기 써 있는 방식대로 투자해서 성공한다면 계약을 체결한 월스트리트의 기관들은 최소한 구조 조정을 피할 수 없을 거고 최악의 경우에 파산할 위험도 있습니다.”
“그런데요?”
“네?”
안 되겠다. 내가 알던 첸으로 돌려놔야겠다.
“걔네들이 직원들 자르고 파산하는 게 우리와 무슨 상관입니까?”
“이 사장님, 그들은 세계의 주류입니다. 그들의 눈 밖에 난다면 앞으로의….”
“그만.”
“…….”
“첸.”
“네.”
“첸은 중신그룹이 무섭습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왜 저보고는 두려워하라고 하는 겁니까?”
“이 사장님께서는 두렵지 않으십니까?”
“전혀요. 앞으로 그들이 우리를 두려워해야 될 겁니다.”
“그럼…?”
“이대로 진행하죠. 아주 마음에 드는데요? 특히 예상 수익률이요.”
“악명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좋은데요? 월가의 빌런. 첸에게 딱 어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