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화
다음 날.
오후 느지막이 서울로 올라가 SC 사옥을 찾은 우리에게 곧 황당한 광경이 펼쳐졌다.
[무차별 해고를 자행하는 이신후는 물러가라.]
이 같은 문구의 현수막이 회사 로비에 붙여져 있었고 같은 문구를 쓴 머리띠를 맨 직원들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사장님아, 왜들 저런대?”
“대충 짐작은 가는데 자세한 건 주동자를 만나 봐야 알 것 같습니다.”
지방 현장에서의 행보가 서울 본사까지 소문이 났고 무언가 찔리는 게 있는 인원들이 이 같은 일을 꾸몄을 것 같은데….
가소롭기만 했다.
“일단 무시하고 올라가시죠?”
“내가 앞에 설게.”
최효석이 앞장서 농성하는 직원들을 무시하고 지나가려 할 때.
“저기 이신후가 올라간다! 다들 못 타게 막아!”
주동자 격으로 보이는 직원이 주위를 선동해 우리의 앞을 막았다.
“뭐죠?”
“이신후 대표님 되십니까?”
“그렇습니다만, 그쪽은 누구십니까?”
“ST의 노조 위원장입니다.”
SC로 사명을 바꾼 지가 언젠데 아직도 ST란다.
노조 위원장이 뭐라도 되는지 아는 이 사람은 아는 사람이다.
1회차에서의 내가 ST를 인수했을 때 시작한 내부 감사에서 하청 업체에서 백마진을 받아 내가 직접 해고한 놈이다.
“그런데요?”
“지방 현장에서 무차별 해고를 지시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한결같은 이 사람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조소가 흘러나왔다.
“제대로 된 설명이 없으면 노조는 오늘부터 무기한 파업에 들어갈 겁니다.”
나는 대답을 하기보다 옆에 있던 최효석이 들고 있는 서류를 빼앗아 펼쳤다.
“…여기 있네요. 노조 위원장이자 영업 2팀 차장 김경철 씨.”
“예.”
“차장인데 노조 위원장? 신기하네요. 보통 중간 관리자는 비노조원 아닙니까?”
“그건 회사의 내규마다 다릅니다만….”
“아니겠죠. 본인이 노조 위원장을 계속 해 먹으려고 노조 내규를 고친 것 아닙니까?”
“뭐라고요?!”
“일우기공에서 매달 삼백만 원씩 받아 드셨네요. 3년이나 받아 처먹었는데 이 돈 다 어디에다 쓰셨습니까?”
“무, 무슨 증거로!”
“증거야 차고 넘치죠.”
김경철의 횡령과 비리가 적힌 문서를 들어 그의 눈앞에 보여 줬다.
“이, 이건 조작이야!”
“그럼 제가 직접 일우기공에 전화해서 확인해 보죠, 뭐.”
휴대전화를 들어 서류에 적힌 일우기공의 번호를 눌렀다.
뚜르르. 딸깍.
“일우기공 맞습니까? 저는 SC 그룹 신임 회장 이신후라고 합니다. 김경철 씨에 대해서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 전화했습니다. 사실 확인을 좀 부탁드립니다.”
처음에는 김경철의 비위 사실을 숨겨 줬다.
하지만, 앞으로의 거래에 절대 지장을 주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나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김경철의 비위 사실을 속사포같이 쏟아 냈다.
전화를 끊은 뒤, 김경철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병신 새끼. 적당히 받거나 아니면 받은 만큼 챙겨 줬어야지. 받을 건 다 받아 놓고 더 주지 않으면 거래처를 바꾼다고 협박해?
생각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양심이 출타한 것인지 모르겠다.
“분기별로 접대도 받으셨네요? 그것도 강남에서 가장 비싸다는 풀살롱에서요. 아, 요즘 2차까지 나가는 곳을 풀살롱이라고 그런다면서요? 좋은 곳 있으면 소개 좀 해 주시죠?”
접대 이야기가 나오자 김경철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긴, 누구라도 이렇게 많은 사람 사이에서 자신의 치부가 이렇게 드러나니 쥐구멍이라도 찾아서 숨고 싶을 거다.
“이 시간부로 해곱니다. 어떻게 해 드릴까요? 집으로 고소장을 보내 드려서 직업여성들과 질펀하게 논 사실을 가족들이 보게 해 줄까요? 아니면 조용히 짐 싸서 나가시겠어요?”
털썩.
김경철이 힘없이 무릎 꿇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로비에서 구경하고 있는 직원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모두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회사는 여러분들의 모든 노동권을 인정합니다.”
“…….”
“요구 사항이 있다면 언제든지 단체 교섭권을 활용하세요.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느낀다면 단체 쟁의에 나서도 됩니다. 아니, 꼭 나서 주세요.”
모두가 숨을 죽였다.
“다만! 회삿돈을 1원짜리 한 장이라도 횡령하는 직원과 협력 업체에서 부당한 뇌물을 받거나 그에 상응하는 향응을 받은 사실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응징할 것입니다. 해고는 물론이고 민사 및 형사 고소도 마다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
“마지막으로 회사는 여러분께 이익을 나눌 것을 약속드립니다.”
나를 바라보는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뒤로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띵- 28층입니다.
회장실이 있던 사옥 맨 위층에 오르자 임원들이 이 열 종대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인사도 하지 마세요. 들을 기분 아닙니다.”
몇몇, 임원들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지만 점령군 앞에서의 토라진 불만을 말해 봤자 명만 재촉하는 걸 아는지 그들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 모두를 무시하고 그대로 지나쳐 회장실로 직행했다.
임원들이 따라 들어왔고 그들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쳤다.
당당한 눈, 어딘가 불안한 눈, 적의와 분노가 가득한 눈 등 다양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이경석 부회장님?”
“예.”
“오늘부로 해임입니다. 이유는 무능입니다.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다만 부회장으로서 회사를 이 지경까지 만들어 직원들에게 죄송할 따름입니다.”
ST의 창업 공신 중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부회장이 해고 통보를 받자 임원들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아마, 자신들이 살 방법 따위는 없는 걸 깨달았겠지.
“나머지는 오늘 새로 취임하게 되는 신종민 부회장이 설명할 겁니다.”
사전에 말을 맞춰 놨던 신종민이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부로 SC 그룹 부회장에 취임한 신종민입니다.”
“…….”
임원들의 표정이 가관이다.
평생을 몸 바쳐 회사에서 일했는데 갑자기 30대의 젊은 사람을 부회장으로 모시라니까 마음에 들 리가 없을 것이다.
“…이상, 여덟 분은 오늘부로 해임입니다.”
신종민이 해고를 통보하자.
“어디서! 어린놈의 자식이!”
“회사 일에 대해서 뭘 안다고!”
임원들이 고성을 지르며 날뛰기 시작했고.
“당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민형사상 고소도 함께 진행할 예정이니 잘못한 게 있으면 이실직고하시고 횡령한 돈이 있으면 그대로 가져다 놓으시길 바랍니다.”
“…아, 아직 임원 계약 기간이!”
“횡령으로 형사 처분을 받게 생겼는데 계약서가 소용 있습니까? 이거 하나만은 약속드리죠. 아까 호명받은 분들이 조용히 나가시지 않으신다면 가까운 시일 내에 고소장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고소 고발이라는 강력한 패가 더해지자 모두 침묵했다.
“그리고 이경석 전 부회장님?”
“예.”
“고문으로 모시겠습니다.”
응? 예상에 없던 일이다.
당황해서 신종민을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뭔가 생각이 있는 모양이다.
그렇게 회의가 종료되고 해고된 임원들은 네모난 종이 상자에 자신들의 개인 물품을 담아 회사 밖으로 나갔고 살아남은 임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각자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고문으로 위촉된 이경석 전 부회장은 굉장히 감격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숙였다.
“제가 회사에 끼친 누를 이렇게라도 갚을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 회사를 정상화하는 데 일조하겠습니다.”
사실, 나는 이경석이란 사람을 모른다. 1회차에서도 ST를 인수하자마자 무능을 이유로 바로 잘라 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신종민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회사를 빠르게 장악하는 데 필요한 인물입니다.”
“이경석 고문이요?”
“네, 비록 정치 감각은 떨어질지 몰라도 회사를 주춧돌부터 쌓아 온 인물이기도 하니 그만큼 회사 구석구석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독단이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신 부회장께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게 정답입니다. 앞으로 회사를 이끌어 가는 건 제가 아니라 신 부회장 아니겠습니까?”
1회차에서는 내가 직접 경영일선에 나섰기에 이경석이 없어도 상관없었지만, 지금은 신종민에게 경영을 위탁했기에 그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모자란 부분이 보이면 언제든지 질책해 주십시오.”
이만하면 된 거 같다.
회사가 가지고 있는 채무도 다 갚았고 회사 곳간을 갉아 먹는 쥐들도 다 잡았다.
전생에서도 능력을 발휘했던 신종민인데 이렇게 깔끔하게 청소해 줬으니 더 잘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두 달 후.
4분기 실적 발표 후, SC의 주가가 높이 뛰었다. 회복된 주가는 ST 시절 전성기 대비 약 40%.
내가 인수할 때보다 주가가 4배나 뛰었다.
이렇게 주가가 뛴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막대한 채무로 인한 금융 비용이 없어지자 재무제표상 영업 이익이 하늘 높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내가 소유한 SC의 지분 가치는 7조 2,800억으로 올랐다.
이제 시기가 된 듯하여 주식 전부를 담보로 여러 은행에서 6조 원을 빌린 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홍콩으로 떠나는 비행기를 탔다.
몇 시간 후, 홍콩에 도착해 한 투자 자문 회사에 방문했다.
직원이 경리 하나뿐인 소규모 회사라서 대표가 직접 우리를 맞았다.
“그러니까 자금의 운용을 맡아 달라는 거죠?”
그가 웃으며 상담을 시작했다.
인덕이 가득 찼다고 해야 하나? 커다란 귓불과 넓은 미간, 아래로 쳐진 길쭉한 눈매가 웃는 상이라는 느낌을 줬다.
“네.”
“그리고 그 자금의 규모가 자그마치 60억 달러에 가깝다고 하신 거고요. 그것도 홍콩 달러가 아니라 미국 달러로요.”
“네.”
“이봐요. 미스터 리, 우리 오늘 처음 만난 사이라는 거 아십니까? 심지어 만난 지 10분도 되지 않았다고요.”
“네.”
“그런데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것도 이제 겨우 투자 사무실을 오픈해서 명성도 없는 머저리한테 그 큰돈을 맡긴다고요?”
“네.”
남자가 답답한 듯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아니 왜요?!”
“첸 씨니까요.”
“휴…. 길 건너 HSBC는 가 보셨습니까? 아니면 여기서 300m만 걸어가면 UBS 홍콩 지점도 있습니다. 가셔서 60억 달러가 든 계좌를 보여 주시면 알아서들 VIP실로 안내해 줄 겁니다.”
“관심 없습니다. 저는 첸 씨와 함께하려고 홍콩까지 날아온 거지 그들에게 맡길 거였으면 그냥 서울에 있는 지점을 찾아갔습니다.”
“미스터 리, 홍콩에 자리 잡은 수많은 투자 회사 중에 저를 선택해 주신 건 매우 감사하고 고맙습니다만 저는 60억 달러는커녕 1억 달러도 운용한 경험이 없습니다. 제 골드만삭스 재직 시절을 포함해서요.”
“그럼 일단 운용해 보시고 결정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아니! 그러니까 대체 뭘 보시고 60억 달러나 되는 돈을 맡긴다는 겁니까? 말마따나 제가 그 돈을 가지고 도망이라도 치면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설마요. 부모님의 복수를 하려면 돈을 가지고 도망치기보다 실적을 내서 회사를 키워야 하는 거 아닙니까?”
첸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