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화
“인수요?”
“예, ST 그룹이 최종 부도를 피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 결국 그렇게 됐군요.”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쌓아 놓은 채권은 산더미였고 분식 회계로 받은 불법 대출이 5조 원에 가깝다.
2006년 10월인 지금 걸려서 저 정도지 원래 역사인 2013년의 ST 그룹은 수십 조의 손실을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수천억대의 급여 미지급은 덤이었다.
“감사팀과 회계팀에서 살펴본 결과 지금 분식 회계가 밝혀진 게 다행이라고 합니다. ST와의 거래를 5~6년만 더 지속했으면 우리 산업은행에서만 7조 원이 넘는 손실을 떠안았을 거라더군요.”
정확했다. 산업은행 직원들, 생각보다 능력 있는데?
“그렇습니까?”
“그래서 그런데 혹시 이번 기회에 기업을 한번 운영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금 상황이 좋지 않아서 그렇지 ST의 조선과 상선은 세계적으로도 경쟁력이 있다고 봅니다.”
“그런 좋은 기업이라면 다른 기업들이 인수하려 하지 않을까요?”
“지금 시국이 시국인지라 인수할 기업이 없습니다. 모두 몸 사리기 바쁘죠.”
하긴, IMF를 졸업한 게 겨우 5년이다.
그동안 구조 조정이란 이름으로 허리를 졸라매 겨우 살아났는데 망한 기업 인수에 수조 원이나 쓰기에는 부담스럽겠지.
“그런데 저는 사업가 출신도 아닌데요? 아시다시피 제 경력이라고 해 봤자 직업 군인 4년 한 게 전부입니다.”
“이 시국에 출신이 뭐가 중요합니까? 중요한 건 이거 아니겠습니까, 이거.”
신영하 은행장이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맞닿게 하며 무언가를 강조했다.
“돈이요?”
“예, 맞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ST를 인수할 만한 재력을 가진 주체는 신후 씨와 상현 그룹밖에 없습니다. 사실, 상현에 먼저 의사를 타진해 봤지만, 웬일인지 그쪽에서 부정적인 답변을 보내왔고요.”
“그렇습니까?”
중공업 계열사를 가지고 있는 상현으로서는 굳이 수조 원이나 써서 ST를 인수할 이유가 없다.
지금 당장은 시너지를 볼 수 있어도 조선 경기가 하락세에 접어들면 큰 부담으로 돌아올 게 뻔하다.
“ST의 직원들을 위해서라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신영하 은행장이 고개를 숙였다.
“고민을 좀 해 보겠습니다. 인수에 관련된 서류가 있으면 보내 주세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인수하겠다고 결정한 것도 아닌데 너무 성급하십니다.”
“고민만 해 주셔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 인수에 관한 서류는 인편으로 보내겠습니다. 아직 대외비라서….”
그렇게 산업은행을 나서서 최효석이 앉아 있는 차에 올라탔다.
최효석이 우긴 탓에 벤츠를 사긴 샀는데 비싸기만 하고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야, 이게 차가 좋은 게 아니라니까. 내릴 때 기분이 뒤져요.”
“예, 예, 그러시겠지요.”
부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차가 출발한다.
눈을 감고 신영하 은행장이 던져 준 화두를 곱씹었다.
ST 그룹을 인수하는 건 분명 좋은 기회다.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게 바로 대한민국 대기업이고 한국에서 대기업 오너가 가지는 영향력은 대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년이 지나면 미국발 금융 위기로 인한 불황이 시작된다. 그때가 되면 조선업은 돈 먹는 하마가 될 게 분명했다.
사실, 1회차에서는 조선 경기가 살아나기 직전인 2013년에 ST의 조선과 상선, 그리고 중공업을 인수했었다.
장기적인 불황의 늪에 빠진 ST 그룹이 부도가 날 걸 알고 있었던 나는 자금을 총동원해 2012년부터 ST에 공매도를 진행했었다.
이번과 같은 대박을 터뜨리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꽤 많은 수익을 얻었다.
그 돈으로 아무도 인수에 나서지 않은 ST의 회사들을 공짜나 다름없는 가격에 거둬들일 수 있었고 십수 년 동안 엄청나게 승승장구했다.
2008년에 하락한 조선 경기는 2014년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상승했기 때문이다.
ST 조선과 상선은 살아났고 미래 지식을 활용하여 개발한 셰일 가스 플랜트는 중공업을 세계 1위로 도약시켰다.
하지만, 전부 부질없는 일이었다. 한때, 한국의 재계 순위 1위에 올랐지만, 백문과의 싸움에서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백문은 중국 정부를 움직여 자국의 조선 업체에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저가 수주에 나섰다. 당연히 내가 인수한 조선 회사는 적자를 면치 못했고 말이다.
상황이 급해진 나는 정치권에 여러 번 도움을 요청했으나 백문의 돈을 처먹은 정치인들은 오히려 나를 공격했다.
그나마 버틸 만했던 건 셰일 가스 전용 플랜트라는 뛰어난 기술이 있던 중공업이었는데 망해 가는 다른 계열사에 돈을 쏟아부은 탓에 경영권을 지키지 못했다.
그렇게 상념에 빠져 있을 때 최효석이 말을 걸어왔다.
“꼬리가 붙은 거 같은데?”
“꼬리요?”
“뒤를 봐 봐.”
백미러로 뒤를 확인했다. 검은색 승용차가 살짝 거리를 두고 쫓아오고 있었다.
“언제부터 쫓아온 겁니까?”
“아까 신영증권 앞에서도 봤어.”
오전부터 쫓아온 거다. 절대 우연일 리는 없다.
“조금만 더 가 보죠.”
“어디로 갈까?”
“조용한 곳 아무 데나요.”
“오케이.”
최효석이 강북을 향해 가던 방향을 살짝 틀어 동부간선도로에 올라탔다.
그렇게 3분 정도 지났을까?
검은색 승용차가 계속해서 뒤따라오는 게 보였다.
“꼬리가 맞네요.”
“하여간 지랄 같은 예감은 틀리는 일이 없어요.”
피식.
전혀 긴장하지 않은 최효석을 보니 재밌었다.
“어라? 뭐야, 왜 갑자기 쪼개?”
“그냥 형님이 든든하게 느껴져서 웃었습니다.”
“흐흐, 내가 좀 든든하긴 하지.”
40분 정도 차를 몰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수락산 기슭이었다.
조금만 올라가면 계곡을 불법 점거한 식당들이 쭉 나오는 곳이었는데 계절이 겨울철이라 장사하는 곳이 없어 그런지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뒤따라오던 검은색 승용차가 우리 뒤에 섰고 곧 문이 열리며 4명의 남자가 내렸다.
“어라?”
내린 남자 중 한 명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강재춘이던가?”
“김재춘이다, 이 개새끼야.”
일전에 내 자취방에 칼을 들고 숨어 있었던 김재춘이었다.
“어디 산기슭에 숨어 있으라니까, 왜 잡혔어?”
“시팔, 내가 잡히고 싶어서 잡혔겠냐? 빌어먹을….”
“차라리 잘됐다. 언제 한번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렇게 김재춘과 회포를 풀고 있었을 때, 같이 내린 남자 하나가 김재춘의 뒤로 다가가 노끈으로 목을 졸랐다.
“커억, 켁!”
뭐야, 이건?
갑자기 왜 저래?
최효석 역시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쟤네 왜 저래? 말려야 되는 거 아니야?”
“아뇨, 일단 두고 보시죠. 죽이지는 않을 겁니다.”
잠시 후.
내 생각과는 다르게 그들은 김재춘을 죽였다.
“…뭐냐, 너희?”
“만나고 싶어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같이 가시죠.”
앞에서 사람을 죽여 놓고 같이 가자?
이건 협박이다.
따라오지 않으면 김재춘처럼 죽이겠다는 협박 말이다.
“싫은데?”
전생에 내가 직접 죽인 사람이 삼백이 넘는다. 이까짓 협박은 내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않는다.
“순순히 따라오시는 게 좋을 텐데요.”
“니들이 그냥 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셔츠 상의에 달린 주머니에서 펜을 꺼냈다. 그냥 보면 단순한 펜이지만 사실 이거 초소형 카메라다.
“이거 카메라거든? 아까 니들이 저지른 살인 잘 찍혀 있으니까 할 말 더 있으면 해 보시든지.”
“최악의 선택을 하시는군요.”
“그거야 까 봐야 알고.”
3명의 남자가 다가왔고 최효석이 웃고 있었다.
“사장님아.”
“예?”
“나 너무 흥분돼. 사장님 따라오길 잘한 거 같아.”
방금 전에 살인까지 저지른 놈들이 우릴 잡아가겠다고 다가오는데도 이런다.
한동안 회사 물이 빠지지 않아 점잖은 척하더니 이제는 본색을 드러내는 최효석이다.
어느새 지근거리에 다가온 놈의 손가락이 내 눈을 향해 파고들었다.
휙!
몸을 숙여 피하니 이번에는 무릎이 턱을 향해 달려들었다.
뻐억.
교차해서 막은 팔이 뻐근했다.
여기까지만 싸워 보면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이놈들은 프로다.
두 명을 상대하는 최효석이 살짝 걱정되긴 하지만 일단 내 앞의 이놈을 먼저 처리하는 게 우선.
낭심에 짧게 주먹을 날렸다.
턱.
놈이 반대쪽 무릎으로 막아 내며 내 등을 향해 팔꿈치를 내리찍었다.
퍼억.
등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다행히도 놈의 자세가 흐트러진 상태라 힘이 제대로 들어가진 않았다.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격투기에서 말하는 테이크 다운이다.
와락.
놈의 허리를 잡고.
퍼억.
땅에 메쳤다.
“컥!”
충격에 놈의 주의가 흐트러진 게 보였다.
이때를 놓치면 프로가 아니지.
왼손 엄지를 곧게 펴서 놈의 눈을 향해 찔렀다. 프로끼리의 싸움이기에 힘을 빼지 않는다. 놈이 막지 못하면 그냥 눈깔을 후벼 팔 생각이었다.
퍽.
놈이 내 엄지를 쳐 냈다. 그리고 옆에서 날아온 발차기.
뻐억.
“으윽….”
나는 한 바퀴를 구른 후 전면을 바라봤다. 최효석과 싸우는 중에 동료의 위기를 목격한 놈이 내게 발을 날린 모양이다.
콰직.
최효석이 팔꿈치를 세워 나를 발로 찬 놈의 쇄골에 박아 넣었다.
“큭….”
저러면 최소한 쇄골에 금이 간다.
쉬익.
그때, 방금까지 내가 상대하던 놈의 발등이 눈앞으로 날아왔다.
퍽.
꽤 빠른 발차기였지만 재빨리 발목을 잡아챘다.
그대로 잡아당겨 놈의 자세를 무너뜨렸다. 놈의 양다리가 앞뒤로 넓게 벌려져 무게 중심이 흐트러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프로의 싸움은.
“어?”
하는 순간 끝이다.
자세가 무너진 놈의 지근거리로 다가가 주먹을 뾰족하게 세워 울대, 옆구리, 턱을 차례로 가격하고 나서 인중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콰직.
놈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최효석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우두둑.
“끄악!”
최효석이 앞으로 내지른 발차기가 무릎을 정확히 타격했고 맞은 놈의 무릎이 안쪽으로 휘었다.
무릎이 박살 난 듯 보였다.
저러면 못해도 반년은 목발을 짚으며 살아야 한다.
최효석을 상대한 놈들이 눈에 들어왔다.
각자 쇄골과 무릎이 부러져 쓰러져 있다. 놈들과 비교해 보니 내가 상대한 놈은 그나마 행복한 편인 것 같았다. 저놈들처럼 몇 개월씩 요양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휴, 시원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최효석이 목을 돌리면서 개운한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나중에 유행할 말이지만 ‘인자강’이라는 말이 있다.
인간 자체가 강하다는 말의 줄임말이었는데 최효석을 보면 그 말이 딱 들어맞는다.
어떤 동작이든 한번 쓱 보면 따라 할 수 있는 운동 신경과 타고난 체력, 190이 넘는 큰 키와 120kg에 육박하는 커다란 덩치, 게다가 힘은 얼마나 센지 말도 못 한다.
저 형은 군대가 아니라 격투기를 택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UFC 최초로 한국인 챔피언이 탄생했을 텐데….
“오늘은 멀쩡하네요?”
“야, 저번에는 방검복 믿고 일부러 맞아 준 거라니까.”
“흐흐, 믿어 드릴게요.”
“아무래도 경찰에 전화해야겠지?”
“네, 괜히 무시하고 갔다가 나중에 괜히 덤터기 쓸 수도 있습니다.”
잠시 후.
최효석의 전화에 경찰이 현장으로 달려왔고 우리는 황당한 상황에 부닥쳤다.
“당신을 살인 및 상해 혐의로 체포합니다. 묵비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