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화
잠시 후, 지점장실에서 머리가 반짝이는 지점장과 마주 앉아 커피를 마셨다.
“공매도 투자를 하고 싶으시다고요?”
지점장이 기분이 좋은지 입가에 호선을 띄었다. 그래, 아주 좋겠지. 호구가 엄청난 판돈을 들고 왔는데.
“네.”
“어떤 종목에 투자하고 싶으신지…….”
“신영 은행에서 ST 그룹의 주식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저희 본사인 신영 은행은 ST 그룹의 주거래 은행이자 대주주이기도 합니다.”
ST란 이름이 나오자 지점장이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ST가 어디인가. 재계에서 떠오르는 신성이자 대기업 집단이다. 게다가 주력으로 삼는 조선업은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지점장은 그런 ST에 공매도를 진행한다는 신후가 호구로 보이기 시작했다.
“제가 잘 찾아왔네요. ST 그룹의 지주 회사를 포함해서 모든 계열사에 공매도를 진행하고 싶습니다.”
“아시는지 모르시겠지만, 저희와 ST 그룹의 관계는 단순히 지분 관계가 아닙니다. 밀접한 비즈니스 파트너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저희가 ST 그룹 공매도를 도와준다는 게 영….”
“그럼 어쩔 수 없죠. 다음에 찾아뵙겠습니다.”
부정적인 의견에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지점장이 다급하게 내 팔을 잡았다. 판에 앉은 호구가 떠나갈까 두려워 다급한 얼굴로 말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서로의 계약 조건만 맞으면 못 할 거래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습니까?”
“여기서 잠시 기다리고 계시면 전화를 하고 오겠습니다. 저도 월급쟁이 처지라 본사에 보고는 올려야 해서요.”
“그러죠, 뭐.”
지점장이 본사에 전화하기 위해 나갔다.
원래 ST 그룹에 대한 공매도는 내 마스터플랜에 없었다.
하지만.
-VIP께서 ST 그룹의 채권 회수를 명령하셨습니다. 인수 대금은 거기서 나옵니다.
이지석 장관이 이렇게나 대단한 힌트를 주고 갔는데 써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돈이야 많을수록 좋으니 말이다.
기본적으로 공매도는 주식을 매각하고 나중에 주식을 매수하여 상환하는 행위다.
즉, 주가가 10,000원일 때 팔고 상환 기일에 주가가 5,000원이 되면 한 주당 5,000원의 수익이 나는 것이다.
이지석 장관의 말대로 산업은행에서 ST 그룹의 채권 2조 원을 회수한다면 10대 그룹을 제외하고는 버티기 힘들 게 분명하다.
하물며 사세를 확장하느라고 유보금이 거의 없다시피 한 ST 그룹이라면?
주가 폭락 혹은 부도를 피할 수 없을 거다.
나는 이 점을 이용해 시드 머니를 마련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주식을 빌려주는 기관은 그만큼의 돈을 잃겠지만 말이다.
잠시 후, 협의가 끝났는지 지점장이 쪽지를 들고 돌아왔다.
“본사에서 주문한 내용입니다.”
쪽지에는 신영 은행에서 ST 그룹의 주식을 빌려주는 대차 거래. 즉, 공매도에 관한 몇 가지 조건이 적혀 있었다.
1. 공매도 상환 일자는 최장 6개월 최단 3개월.
2. 이자는 연이율이 아닌 선 이율로 9%.
3. 증거금 20%.
4. 신영증권 계좌에서만 거래 가능.
조건을 보고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런 호구 취급도 정말 오랜만이다.
일단 상환 일자가 최단 3개월이라고 못 박은 걸 보니 주식을 빌려주고 나서 다시 매입하여 주가를 끌어올리려는 게 뻔히 보였다.
또한, 선 이율 9%라는 정신 나간 조건은 내게 여기가 사채업자 사무실이라는 착각을 들게 했다.
게다가 신영증권에서만 거래하라는 조건에서는 수수료 한 푼까지 뽑아 먹겠다는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
내가 아무 말을 하고 있지 않자 지점장이 내 눈치를 슬쩍 보며 운을 띄웠다.
“혹시 마음에 들지 않으신 부분이 있으시면 말씀 주십쇼. 본사와 조정해 보겠습니다.”
“대략적인 조건은 마음에 듭니다.”
긍정적인 대답에 지점장이 환하게 웃었다. 그래, 호구 하나 대차게 잡았다 싶겠지.
“하지만, 몇 가지 협의를 하고 싶은 조건은 있습니다.”
“무리가 되지 않으면 무조건 들어드리겠습니다.”
“이율을 조정하고 싶습니다. 선 이율 9%라니 너무 과하게 느껴집니다만….”
“혹시 어느 정도를 생각하시는지…. 제가 본사에 말해서 7.5%까지 내려 보겠습니다.”
“아뇨, 이율은 상관없습니다. 대신 선 이율이 아닌 상환 일자의 주식 종가 기준으로 이자를 계산했으면 합니다. 이자 납입도 그때 하구요.”
지점장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말은 해 보겠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대신, 이율은 15%로 해 드리겠습니다.”
15%라는 말에 지점장의 눈이 커지며 본사에 연락을 하겠다며 황급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주식이 휴지 조각이 되면 15% 이자를 받아 봤자 휴지 쪼가리인 걸 모르고 말이다.
잠시 후, 돌아온 지점장의 손에는 계약서가 들려있었다.
“본사에서 이신후 씨의 조건을 수용한다고 합니다. 계약서를 들고 왔으니 검토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예.”
계약서에는 기존의 조건과 바뀐 이자 계산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었고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샤샥.
사인을 하고 계약서를 내밀자 지점장이 함박웃음을 띄며 증권 계좌를 직접 개설해 줬다.
“증거금을 입금하시면 바로 거래가 되도록 해 놨습니다. 저희가 보유하고 있는 주식이 총 1조 9,000억어치니 3,800억을 입금하시면 전부 거래가 가능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계약을 마치고 신영증권 여의도 지점에서 나가니 최효석이 차를 몰고 다가왔다. 굳이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도 할 일 없이 월급만 받는다고 운전기사를 자청하는 그였다.
“여~ 사장님, 일은 마쳤어?”
“아직 좀 남았습니다.”
“그래, 이번에는 어디로 갈까?”
“여의도에 있는 증권 회사 전부요.”
“전부?”
“전부 해서 여덟 군데인데 오늘 내로 전부 돌려면 빡빡하게 다녀야겠어요.”
***
여의도에서 일을 모두 마치고 오피스텔로 돌아오자 저녁 시간이 되었다.
점심도 건너뛴 탓에 배가 등가죽에 들러붙을 정도로 배고 고팠던 우리는 가까운 중국집에 전화를 걸어 짜장면 세트를 시켰다.
후루룩.
“일전에 받은 대금으로 투자하려고?”
“예.”
“나야 그런 건 잘 모르니까 상관하지 않겠다만 신중하게 결정한 거지?”
“흐흐, 이지석 장관이 정확한 소스를 주고 갔는데 틀릴 일이 있겠습니까?”
“먼 소스?”
“백신 인수 대금 말입니다. ST 그룹에서 채권을 회수해서 마련한다고 했잖습니까. 그래서 오늘 증권 회사 돌면서 공매도 칠 주식 빌려 왔습니다.”
내 말에 최효석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랐다.
“그, 그렇게 투자해도 되는 거야? 내부자 거래로 쇠고랑 차는 거 아니야?”
최효석이 왼손과 오른손의 팔목을 붙이며 제스처를 취했다.
“무슨 증거로요?”
“…….”
“제가 이지석 장관에게 뇌물을 준 것도 아닌데 무슨 증거가 있어서 쇠고랑을 채워요?”
“…맞네, 증거가 없구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 투자로 인해 누군가 손해를 입는다면 그건 개미들이 아니라 기관들일 테니까요.”
“그럼 뭐 상관은 없지.”
“그나저나 빨리 드세요. 짜장면 불겠습니다.”
“아! 맞다.”
“탕수육도 꽤 남았는데 간만에 소주 한잔?”
“좋치.”
그렇게 우리는 소주를 진탕 마시고 잠이 들었다.
***
다음 날 오전 8시 30분.
전날 거나하게 술을 마셔 소파에서 곤히 자고 있는 최효석을 뒤로하고 모니터 앞에 앉았다.
내가 어제 대차 거래의 계약까지 체결한 증권 회사는 총 네 군데.
모두 ST 그룹의 대주주라고 불리는 시중 은행들의 증권 회사들이었다.
평균 증거금률은 25%였고 백신 대금으로 받은 2조 원 중 1조 원을 증거금으로 입금했다.
덕분에 한꺼번에 예금이 빠져나가 깜짝 놀란 산업은행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 확인까지 했다.
어찌 됐든, 증거금까지 모두 입금했기에 내가 거래할 수 있는 주식의 총가치는 4조 원가량이 되었다.
ST 그룹의 지주 회사인 ㈜ST의 주식이 가장 많았고 중공업, 상선, 엔진, 조선, 제철, 건설까지 다양하게 있었다.
재계 순위 10위권의 대기업답게 계열사와 지주 회사를 모두 포함한 시가 총액은 12조 원. 내가 빌려 온 주식은 30%에 달하는 4조 원어치다.
주식을 매도하기 위해 HTS를 켜서 장전 시간 외 거래를 확인했다.
역시나, 내게 주식을 빌려준 증권 회사들이 자금을 잔뜩 끌어와 ST 그룹의 주식 매수 주문을 잔뜩 넣어 놨다.
“하하하.”
예상은 했지만, 하이에나나 다름없는 행태였다.
주식을 빌려주는 계약을 체결해 놓고는 주가를 끌어올리기 위해 매수를 하다니.
뭐, 의리와 신의보다는 돈에 가치를 더 무겁게 두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저들의 목표는 뻔하다. 내가 내는 매도 주문에 맞서 매수 주문을 넣어 주가를 지키겠다는 거다.
주가를 제자리걸음만 시켜도 4조 원의 15%, 6천억을 먹는 거고 혹은 주가가 상승하면 상승분의 15%에 달하는 수익을 추가로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야 고맙지.”
저들이 주가를 지켜 준다면 나는 주식을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다.
비싸게 팔고 싸게 사서 상환하는 게 공매도의 핵심인데 증권 회사들이 이렇게 나와 준다면 나야 땡큐다.
몇 번의 클릭으로 4개 증권 회사의 HTS를 모두 확인했다.
뚜두둑.
조금 있으면 장이 열리기에 손을 풀었다.
9시.
증권 거래소가 열렸다.
4개 증권 회사가 일제히 ST 그룹의 주식을 매수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에 맞춰 매도 주문을 넣었다.
최대한 주가를 떨어뜨리지 않고 매도하는 게 일차적인 목표였다.
탁. 탁. 탁. 탁.
키보드를 계속 두드리다 시계를 보니 12시였다.
점심시간이 되자 증권 회사들의 매수세가 꺾였다. 주가는 오르지도 내려가지도 않은 횡보 상태.
“으하함, 일찍 일어났네?”
최효석이 일어났다. 뒤를 돌아보니 숙취의 영향인지 얼굴이 가관이었다.
“해장해야지?”
“먼저 드시고 오세요. 제가 좀 할 게 많아서요.”
“에이, 어떻게 혼자 먹을 수 있나. 라면 하나 끓어 먹을 테니까 다 하면 얘기해 줘.”
말은 저렇게 해도 걱정되는지 얼마 전 하석원이 데리고 온 해결사들이 쳐들어왔을 때부터 한순간도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최효석이다.
“네.”
탁. 탁. 탁. 탁.
라면을 먹는 최효석을 뒤로하고 나는 계속해서 매도 주문을 넣었다.
그러자 증권 회사들이 매수를 시작했다.
호가창에서 쉼 없이 매도와 매수 주문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장이 열린 지 4시간도 채 되지 않았지만, ST 그룹 주식 거래량이 하늘을 뚫을 기세로 올라갔다.
거래 대금만 2천억이다. 평소 거래량과 비교하면 10배 이상이었다.
주가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이번에는 개미들이 따라붙은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해서 매도 주문을 넣었고 3시 30분이 되자 손을 놓았다.
주가 그래프가 순식간에 하늘로 상승했다.
곧이어 장이 마감하는 4시가 되었고 마감 종가는 +5.2%였다. 거래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개인 투자자들이 호재를 기대하며 잔뜩 매수 주문을 넣은 탓이었다.
심지어 증권 관련 기사를 올려 주는 시스템 하단에는 이런 기사까지 떴다.
-ST 그룹 해외 수주 기대감에 오늘 하루 거래량 폭발적으로 증가.
미래나 지금이나 기레기들의 추측성 거짓 기사들은 항상 넘쳐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