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화
2일 후.
자본금을 모으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계획을 실행하기에 앞서 종로에 있는 변호사 사무실이 있는 빌딩을 찾았다.
“어서 오세요. 변호사 이현준입니다.”
“아…, 혼자 하시나 봅니다.”
“하하, 제가 이번에 연수원을 졸업해서요.”
순간 잘못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사람은 능수능란하게 업무를 처리해 주며 장기적으로 거래할 변호사지 초짜 햇병아리가 아니었다.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나가려는 순간.
와락.
“잠시만요!”
초짜 변호사 이현준이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다.
나는 황당함에 이현준을 내려다봤다.
“뭡니까?”
“한 번만 기회를 주십쇼! 저 이래 봬도 연수원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제가 뭘 의뢰할 줄 알고 이러십니까?”
“뭐든 상관없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
이현준 변호사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사무실 개업하고 수임을 한 건도 못 했습니다. 맡겨만 주시면 정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예?”
다급해졌는지 그는 알고 싶지 않은 사실까지 털어놨다.
“…간단한 일이라서 수수료를 많이 못 드릴 텐데 괜찮습니까?”
“괜찮습니다!”
“법인 설립을 의뢰하려고 합니다. 사명은 SC 인베스트먼트, 투자 회사입니다.”
2회차 때 사용한 조직명인 SC의 이름을 따왔다.
Suicide Chaser의 줄임말.
한국말로 자살 추격자란 뜻인데 1회차에서 모든 걸 잃고 빌딩에서 뛰어내린 경험에 이런 이름을 사용했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뭐, 법인 설립 정도에 최선을 다할 필요가….”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필요한 서류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현준의 안내에 따라 사무실에서 있는 소파에 앉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파이팅 넘치는 이현준이 자리에 돌아가 컴퓨터를 만졌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사무실을 둘러봤다.
20평 정도 되는 공간에 여기저기 상장을 걸어 놓은 전형적인 변호사 사무실.
그런데 책장 가운데 있는 그의 연수원 졸업 사진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지석 장관?’
놀랍게도 현 정부의 장관과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내가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 이현준 눈치챘는지 웃으면서 답을 줬다.
“저희 아버지 되십니다. 혹시 아십니까?”
“압니다. 이지석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님 아닙니까?”
“예? 산업통상?”
‘아, 이 시기에는 지식경제부였구나.’
“아! 제가 다른 나라와 행정 부서를 헷갈렸습니다. 춘부장께서 지식경제부 장관님 맞으시죠?”
“하하, 맞습니다. 사실 제가 판사나 검사를 지원하지 않은 거에 아버지의 영향도 어느 정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공직에 있다 보면 별의별 소리가 다 돌아다니거든요.”
이제 이해가 된다.
그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홀로서기를 하고 싶어 판사도 검사도 심지어 로펌도 지원하지 않고 사무실을 차린 거였다.
이렇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우연히 들른 이현준의 사무실은 내게 있어 행운이나 다름없는 일이 되었다.
인맥이란 게 사실 별게 아니다.
이런 식의 간단한 인연으로도 충분히 이어질 수 있다.
오늘의 만남으로 이현준을 통해 이지석 장관과 통할 수 있게 되고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내 머릿속에서 이현준의 지위는 수직으로 상승했다.
“여기 있습니다.”
작성을 마쳤는지 그가 내게 파일 하나를 내밀었다.
“이대로만 준비해 드리면 됩니까?”
“예, 빠르게 준비해 주시면 일 처리도 빨라질 겁니다.”
“알겠습니다.”
파일을 받고 사무실을 나가려고 할 때 이현준이 조용히 내 팔을 잡았다.
“저어…. 착수금이….”
“얼맙니까?”
“200만 원입니다. 일이 마무리되면 100만 원을 추가로 주시면 됩니다.”
법무사로 갔으면 반의반 값도 들지 않을 일이었지만 황금 인맥에 돈이 아까우랴.
가방에서 회사 생활을 하면서 모아 놨던 돈 1,000만 원 중 500만 원을 꺼내어 그에게 건넸다.
“…이건 500만 원인데요?”
“200만 원은 나중에 다시 의뢰할 일이 있어 선금으로 드리는 겁니다.”
이현준의 입가가 찢어졌다.
역시 좋은 집안에 태어나 좋은 직업을 가졌어도 자영업자의 마음은 똑같다.
장사가 안될 때 많이 팔아 주면 그것만으로 은인이다.
그렇게 나는 이현준의 배웅을 받으며 사무실에서 나와 택시를 탔다.
이제 내가 살던 집으로 가 남겨 둔 일을 해야 했다.
“어디로 가십니까?”
“면목동 혜원사거리로 가 주십시오.”
“예.”
택시가 출발했고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두근두근.
심장 박동 소리가 일정한 리듬으로 들려왔다.
휴우.
심호흡을 하며 몸 안을 관조하기 시작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근육부터 장기까지 모든 것을 관조했다.
수십 분이 지났을까.
이제는 심장 소리뿐 아니라 혈관을 따라 피가 흐르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했다.
쪼르륵.
착각인지 사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만큼 내 집중력이 최고조에 달했다는 사실이다.
어느새, 목적지에 도달했는지 택시 기사가 내 집중력을 부쉈다.
“손님, 도착했습니다.”
택시를 타기 전에 미리 꺼내 둔 2만 원을 택시 기사에게 내밀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금방 거슬러 드릴게요.”
“잔돈은 됐습니다.”
말을 마치고 택시에서 내리니 기사가 우렁찬 소리로 배웅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택시 기사의 인사를 뒤로하고 간판에 헤원탕이라고 써 있는 목욕탕 바로 옆 건물에 들어가 계단을 올랐다.
이 건물 5층에 있는 10평이 조금 넘는 옥탑방이 당시에 내가 월세를 살던 자취방이었다.
계단을 오르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전 헤어진 절친한 친구를 만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2층, 3층, 4층을 지나 5층에 있는 옥탑방의 문손잡이를 돌렸다.
철컥.
분명, 집을 나설 때 문을 잠갔을 텐데 지금은 문이 열려 있다?
침입자가 있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도 나를 얼마나 얕봤는지 문을 잠그지 않아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걸 알려 준 멍청한 침입자가 말이다.
끼이익.
오래된 경첩 때문에 문이 비명을 질렀다.
10평 정도 되는 원룸 한편에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를 보자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어라? 웃네?”
생각지 못한 내 반응에 침입자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여유로운 내 반응에 당황한 듯했다.
“그럼 웃지, 우냐?”
“하! 개새끼가 배때기에 구멍 한번 다시 내 줘?”
이놈을 다시 봐서 기뻤다.
침입자는 자신이 관리하던 나이트클럽에서 고주망태로 취해 있던 나를 납치한 놈이었다.
축령산 별장으로 이동하던 중에 묶여 있던 내가 술이 깨어 반항하자 내 옆구리에 칼을 찌른 놈도 이놈이었다.
“왜 왔냐? 별장이 깡그리 불타서 이제 나랑 볼일이 없지 않아?”
“맞아. 이제 너랑은 볼일이 없지. 도련님이 사고 친 거 막내 하나 희생시켜서 자살로 진행했다고 보고했거든.”
“그런데?”
“그래도 내가 명색이 식구들 중간인데 우리 막내 원한은 갚아야 하지 않겠어? 네가 죽였잖아, 우리 막내. 목에 칼 쑤셔서.”
말을 마친 침입자가 자신의 품속에서 회칼을 꺼내며 일어났다.
가소롭기만 했다.
“내가 죽였지. 그런데 이거 하나만 정확히 하자.”
“말해 봐라.”
“따지고 보면 너희 막내 네가 죽인 거 아니냐? 니 새끼가 거기서 경찰 올 때까지 지키고 있으라고 지시했잖아. 안 그래?”
“이 개새끼가!”
내 말이 자극되었는지 침입자가 삽시간에 뛰어와 내 어깨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스윽.
칼이 날아오는 모습을 보고 순간적으로 시각에 신경을 집중했다.
택시에서부터 집중력을 끌어 올렸기에 칼이 날아오는 모습이 마치 슬로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뒤로 한 발자국을 물러섰다.
쉬익.
칼이 어깨 옆을 지나갔고 피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지 놈이 놀란 눈을 했다.
주먹으로 놈의 관자놀이를 짧게 끊어 쳤다.
콱.
당황한 놈의 손목을 낚아챔과 동시에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덥석.
“……!!!”
가까워진 놈의 얼굴.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왜? 내가 저번처럼 맞아 줄지 알았어?”
“큭!”
그가 어떻게든 칼을 회수하려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지만 어림도 없다.
놈의 손목을 잡은 손아귀에 힘을 잔뜩 줬다.
쨍그랑.
놈이 칼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칼을 들지 않은 왼 주먹으로 내 턱을 노렸다.
부웅.
고개를 슬쩍 뒤로 물러 주먹을 피해 냄과 동시에 그의 옆구리에 주먹을 연신 박아 넣었다.
뻐억. 뻐억. 뻐억. 우드득.
주먹에서 침입자의 뼈가 걸리는 느낌이 났다.
최소한 갈비뼈에 금이 갔으리라.
“우욱!”
침입자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보였다.
“새끼, 반항은….”
씨익.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 새끼를 박살 내는 건 2회차에 이어서 두 번째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짜릿하다.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역수로 단단히 쥐고 침입자의 쇄골을 찍었다. 이건 백문의 개로 살아갈 당시에 자주 사용하던 방법이다.
맞으면 어떻게 되냐고?
콰직.
쇄골이 부러진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며 침입자가 비명을 질렀다. 재빨리 그의 입을 막아 소리가 새 나가는 걸 방지했다.
“끄아…. 헙!”
“너무 시끄러우면 아래층에서 올라온다고. 요새 층간 소음이 사회 문제인 거 몰라?”
“끄읍, 끕….”
침입자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 게 보였다.
그래, 존나게 아프겠지 쇄골이 부러졌는데.
“아프냐? 나도 아팠다. 니 새끼가 쑤셔 놓은 배때기가.”
“끕!”
놈이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내가 이제 막 집에 왔거든? 좀 씻고 옷 좀 갈아입자. 그동안 얌전히 있을 수 있지?”
끄덕끄덕.
침입자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뭘 얌전히 있어, 인마. 바로 튀겠지.”
그 말을 끝으로 놈의 턱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쩌억.
놈의 고개가 돌아가며 정신을 잃었는지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
역시, 자고로 사람은 청결을 유지해야 한다.
요 이틀간,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냐고 제대로 씻지 못해 찜찜함이 말로 할 수 없었는데 샤워를 하고 나오니 개운함에 기분이 좋아졌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묶여 있는 침입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어디서 그어졌는지 얼굴 여기저기에 흉터가 가득하다.
누가 깡패 새끼 얼굴 아니랄까 봐 지랄도 이런 지랄이 없다.
“…….”
“야.”
“…….”
“일어난 거 다 알아. 어디 한 군데 잘리고 싶으면 계속 눈 감고 있던지.”
“흐흠.”
침입자가 번쩍 눈을 떴다.
생판 모르는 나를 평생 감옥에 보내려 했으면서 지는 병신 되기 싫은가 보다.
“이름.”
“예?”
“이름!”
“김재춘입니다!”
“하나만 물어보고 대답이 마음에 들면 고이 보내 준다.”
“예, 예!”
“왜 나를 골랐냐?”
2회차 때, 복수에 미친 나는 이놈을 만나자마자 바로 제압해 목을 따 버렸다.
그 때문에 왜 나를 누명의 대상으로 선택했는지 이유를 못 들어 아쉬웠는데 이참에 들어 볼 요량이다.
“그, 그게 저희 나이트에 오셨을 때, 우연히 가족분들이 없는 걸 알아서….”
“그러니까, 내가 고아여서 나한테 누명을 씌웠다? 이거 존나 악독한 놈일세?”
“하, 하지만 감옥에 가지는 않으시지 않았습니까?”
그래, 이번에는 누명을 안 썼지. 전전전생의 내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지. 그것도 20년이나.
“안 되겠다.”
“예?”
“눈깔 하나 파고 손목 하나 발목 하나씩 끊자. 그러면 내가 보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