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사랑해요
‘으음…?’
이상하게 몸이 개운했다. 가만히 눈을 깜빡여 보니 익숙한 천장이었다. 언제 레데오로 돌아왔지? 기억을 찬찬히 되짚어 봤지만 어느 순간 뚝 끊겨 있었다. 분명히 박율을 살리는 데 성공하고, 마기도 다 정화했고, 그리고 박율과 키스를….
떠오르는 기억에 부끄러움이 몰려와 눈을 꾹 감았다. 조금 진정하고 나니까 그제야 옆에서 나누는 조용한 대화 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마법 식은 성공했어요. 정밀하게 살펴봤지만 이번에도 몸에서 아무런 이상도 찾아낼 수 없었어요.”
“그렇다면 다행인 거지. 너무 초조해하지 마. 곧 깨어날 거야.”
“알아요. 그래도 시간이 꽤 흘렀는데, 언제쯤 의식을 되찾을까요.”
“벌써 일 년째네.”
“뭐가 일 년이에요?”
누운 채로 가만히 되묻자 대화 소리가 우뚝 멈췄다.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니 눈을 크게 뜬 채 그 자리에서 가만히 굳은 박율과 라엔이 보였다.
“이한! 몸은 괜찮아요?”
“…네? 네, 괜찮아요.”
라엔이 뭔가 마법을 썼는지 내 주위로 연한 빛이 터졌다. 그는 그러고 나서 몸을 숙여 내 얼굴을 한 번 더 확인하더니 그제야 안심한 듯이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다 잊었던 게 생각난 듯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하견과 주혁도 불러올게요.”
텔레포트로 순식간에 사라진 라엔의 빈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박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박율은 아까 놀라 휘둥그레졌던 표정을 금방 풀고는 부드럽게 웃으며 내 머리칼을 헝클였다.
“일어났네. 잘 잤어?”
머릿속에서 경보가 울렸다. 아까 얼핏 들었던 대화와 라엔의 반응을 생각해 보면, 혹시, 설마.
“내가 오랫동안 자고 있었나요?”
“음, 그렇게 길지는 않았어. 네가 깨어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일 년쯤이요?”
“응, 맞아.”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정말 일 년이 지났다고요?”
“어어, 그렇게 갑자기 일어나면 안 돼.”
그가 내 상체를 급하게 껴안고는 손으로 눈을 덮어서 가렸다. 내 머리를 자연스럽게 제 가슴에 기대게 한 채였다.
“어지럽지는 않아?”
“괜찮아요.”
“오래 누워 있었으니까 한동안 움직일 때 조심해야 돼.”
그가 걱정하는 것처럼 어지럽지는 않았지만 몸에 힘을 풀고 그에게 기댔다. 물론 정신적인 어지러움은 있었다. 일 년을 재워 놓다니, 말도 안 돼. 신에게 따지기라도 하고 싶었다.
“네가 너무 오랫동안 일어나지 않아서 신전에 갔었는데, 몸에서 신력이 갑자기 대량으로 빠져나가서 회복을 필요로 하는 거라고 했어.”
“…그렇구나. 고마워요.”
“일어나서 다행이다.”
박율이 말을 더 이으려는 순간 방문이 벌컥 열렸다.
“선이한! 너 괜찮아? 어, 왜 그러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아니, 갑자기 일어나서. 멀쩡해.”
박율이 베개를 세워 나를 침대 머리맡에 천천히 기대게 했다. 민주혁은 그제야 장난스럽게 웃고는 ‘뭐야, 놀랐잖아.’라고 말하며 내 뺨을 잡아당겼다. 뒤이어 들어온 송하견은 침대 옆에 걸터앉아서 내 어깨에 머리를 가만히 기댔다.
“기다렸어.”
“이제 괜찮아요.”
“…알아.”
다들 조금 진정되고 나서는 박율이 일반식을 먹으면 탈이 날 수 있다며 미음을 만들어 왔다. 식사한 후에 가볍게 레데오를 둘러보니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달라진 것 없이 그대로였다. 나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민주혁을 따라 들어간 화실에서 그는 하얀 천으로 덮인 캔버스를 내게 건넸다.
“어때, 그동안 다 완성했어.”
“내 얼굴이네. …정말 그려 줬구나. 고마워.”
“응, 지금보다 훨씬 어려 보이지?”
“그런가?”
민주혁이 한번 직접 확인하라며 들려 준 거울을 봤다.
“눈동자 색, 까만색으로 돌아왔구나.”
신력이 사라졌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조금 아쉽긴 했다. 어색해서 인상을 살짝 찡그리자 민주혁이 내 미간을 손끝으로 콕 눌렀다.
“안 이상해. 지금도 똑같이 예뻐.”
“…….”
내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자 민주혁이 자기 눈가를 톡톡 건드렸다.
“눈동자 색 말하는 거야.”
“아, 고마워. 좀 어색했는데 괜찮다니 다행이다.”
“…응.”
민주혁이 묘한 표정을 하고 있기에 나도 똑같이 손을 뻗어 그의 미간을 살짝 눌렀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뭔가 생각하는 듯이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곧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웃었다.
“네가 눈 감고 있는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보니까 좋다.”
그러고선 민주혁은 자기가 독차지하고 있을 수 없다며 나를 2층으로 올려보냈다. 복도에서 마주친 라엔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자기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가 내게 건넨 건 적당한 두께의 책이었다.
“마법서예요. 그리고 이 펜던트도 받아요.”
고급스러운 케이스 안에 들어 있는 건 작은 보석이 달린 목걸이였다.
“이 펜던트에는 내 마나를 담아 뒀어요. 착용한 채로 마법을 외우면 이한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거예요. 한 번에 들어가는 마나의 양이 많지 않아서 이걸로는 세 번 정도만 가능하겠지만요.”
“와… 고마워요. 마법을 쓰는 게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거든요. 목걸이 같은 것에 마나를 담는 것도 가능했나요?”
“이한이 잠들어 있는 동안 연구해서 새로 만들었어요. …좋아해 줘서 기뻐요.”
라엔은 허리를 숙여서 나를 가볍게 안았다. 그를 마주 안자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이런 웃음을 보고 싶었거든요.”
“네?”
“당신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해요.”
라엔에게서 초콜릿이 가득 담긴 유리병까지 받고 나서 방으로 돌아왔다. 어쩐지 하루가 정신없이 지난 것 같았다. 날이 어둑해지고 있었지만 방 안은 송하견이 불을 켜 둔 덕분에 환했다.
“안 자고 있었어요?”
“기다렸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그가 내게 다가와 어깨 위로 망토를 덮어 줬다.
“여기서 약초 향기가 나요.”
“좋아?”
“네, 좋아요. 소중하게 입을게요. 고마워요.”
내가 망토에 코를 박고 숨을 깊게 들이켜는 사이 그는 망토에 앞쪽에 달린 끈을 직접 묶어 줬다. 그러고선 내 머리 위로 손을 가볍게 얹었다.
“나도 고마워. 이렇게 다시 깨어나 줘서.”
송하견이 내게 눈을 맞추며 웃어서 나도 따라 웃었다. 내가 망토를 소중하게 걸어 두고 침대에 눕자 그가 조용히 물었다.
“잘 거야?”
“음, 아니요. 잠은 안 오는데 시간도 늦었으니까 그냥 누워 있으려고요.”
“그러면 지금은 쉬고 내일 아침에 박율 형한테 가 봐.”
“율이 형이 나를 찾았었나요?”
“…말은 안 했지만 그럴 거야. 네가 잠들어 있을 때 형이 네 옆에서 한시도 떨어져 있질 않았으니까.”
“지금 다녀올게요.”
그렇지 않아도 오늘 박율에게 찾아가 볼 생각이었으나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아침을 기약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들으니 그를 만나고 싶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송하견에게서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받고 방문을 나섰다.
‘율이 형은 자고 있나.’
박율의 방문 앞에 섰으나 문틈으로 빛이 새어 나오지 않는 걸 보니 이미 잠든 듯했다. 아까 내가 방을 나설 때 송하견도 바로 잘 거라고 했고, 라엔과 민주혁도 방에서 각자 자고 있을 테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박율을 깨워서 만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대로 다시 방에 돌아가기는 아쉬워서 그가 자주 가던 정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레데오 건물을 나서자 찬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달빛 아래 흐드러지게 핀 꽃이 보였고, 그 앞의 하얀색 벤치에 앉아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밝은 금색의 머리칼이 바람에 연하게 흔들렸다.
‘여기에 있었네.’
소리 내지 않고 박율에게 다가갔으나 그는 금방 내 기척을 눈치채고는 뒤를 돌아봤다.
“이한이구나.”
다가가서 그의 옆에 앉자 그가 나를 바라보며 말갛게 웃었다.
“안 자고 왜 나왔어.”
“형이 보고 싶어서요.”
박율이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지만 맞는 말이긴 했다. 박율은 내 말에 잠깐 침묵하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가 깨어나자마자 바로 전해 주고 싶었어. …더는 못 기다리겠다.”
“뭐를요?”
“눈 감아 볼래?”
내가 눈을 감자 그는 내 손가락에 동그란 걸 끼웠다.
“반지….”
“마음에 들어?”
영롱한 보석이 박혀 있는 반지는 내 손가락에 딱 맞았다. 이것도 지난번에 준 것과 같은, 마나 상태를 전달해 주는 반지인가 싶어 반사적으로 그의 목을 살폈다. 지난번에 그가 내 앞에서 초커를 끊어 버린 게 조금 슬펐었다.
박율이 내 시선이 어디로 가 있는지 눈치채고는 머쓱하게 웃더니 말을 덧붙였다.
“이건 저번에 그거 아니야.”
“그러면요?”
“사랑해.”
박율이 고개를 숙여 반지 위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선 고개를 살짝 올려 나를 바라봤다.
“말했었는데. 설마 오래 잠들어 있었다고 그새 잊은 건 아니지?”
그 순간을 잊을 리가 있을까. 일 년을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건데 심장이 이렇게 빠르게 뛰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박율을 끌어안았다.
“사랑해요.”
그의 목덜미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초커 같은 건 필요 없었다. 박율은 내 목덜미와 허리를 받치고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형도 사랑해.”
맞닿아 오는 숨이 앞으로도 계속되리라는 걸 알았다. 그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행복하리라는 것도 분명했다.
-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