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살고 싶어
그도 내가 그랬던 것만큼 절박하구나. 아쉬움과는 별개로 끝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고 울렁이던 마음도 서서히 차분해졌다. 어쩌면 심장이 뛰는 속도가 점차 느려지는 중이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끝을, 콜록,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막연하게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바랐거든요.”
“끝이라고 말하지 마.”
“지금 행복해요.”
“왜, 왜 그런 말을 해….”
“마지막에 듣는 게 형의 목소리고, 마지막에 느끼는 게 형의 체온이어서… 그래서 좋아요.”
그러니까 형도 행복하게, 내 몫까지 앞으로 나아가 주세요.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 얼굴에 물방울이 톡 떨어지는 느낌이 났다.
“…울어요?”
“눈 감지 말고, 형 봐. 형이 어떻게든… 뭐든 할 테니까.”
어떻게든, 뭐든 하겠다는 말은 사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말이었다.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내가 그랬으니까. 마음은 간절하지만 방법은 모르겠을 때 그런 말이 튀어나오는 거였다.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서 그를 바라봤으나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가 이렇게 모든 걸 내려놓고 우는 것도, 날것의 제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처음 봤다.
‘자기 목숨을 버릴 때도 담담하던 사람이 이제 와서.’
내가 뭐라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나를 위해서 울어 주는 게 싫지는 않았지만 그가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건 바라지 않았다.
“울지 마요. …죄책감도 가지지 말아요.”
박율은 한참을 말이 없더니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네가 나를 바라볼 때 이런 마음이었구나.”
그걸 이제야 알아주다니. 그도 나와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다면, 박율에게 나도 그만큼 소중한 존재였다는 뜻일까. 그렇게 생각하자 이기적이게도 조금 기뻐져서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박율의 눈물 젖은 뺨을 손으로 살살 쓸다가 그가 결국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그의 눈을 마주하고는 순간 숨을 멈췄다. 부드러운 봄을 닮은 연둣빛의 눈동자가 그 안에 나를 담은 채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세상을 다 구한다고 해도 네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
“…형.”
“이것이 너의 운명이라도 형이 너를 죽게 내버려 둘 리가 없잖아.”
희망을 좇을 때 사람은 이런 눈빛을 하는구나. 내가 그를 살리고자 할 때도, 박율은 내게서 이런 눈빛을 읽었을까.
“아니, 사실 운명 같은 건 없어. 네가 나를 살린 것처럼. 그러니까 너도 이곳에서 죽지 않아, 이한아.”
<퀘스트> ‘박율-순응하지 말아요’ 성공!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퀘스트 창이 눈앞에 생겼다. 믿을 수 없어서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마지막에 그의 퀘스트가 성공하는 걸 꼭 보고 싶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생각할 만한 건 아니었지만 기뻤다.
퀘스트 창이 사라지고 난 후에는 텅 빈 상태 창이 눈앞에 있었다. 파란 상태 창 안에는 글을 입력하라는 것처럼 빈칸이 깜빡이고 있었다.
【마지막 말을 전하렴. 아이야, 운명을 비튼 너를 위한 마지막 보상인 듯하구나.】
나는 박율이 나아갔으면 좋겠다. 박율이 내게 말했던 것처럼.
“형, 나아가 주세요.”
말을 뱉고 나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구 마음대로 마지막 말이지? 시스템은 신의 힘이기는 하나 신의 통제하에 놓인 힘은 아니라고 했다. 신조차도 시스템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까 저 빈칸에 어떤 문장을 넣을지는 내가 정하는 거였다.
“나랑 앞으로도 같이… 계속 나아가 주세요.”
“…그래. 그러자.”
눈앞이 흐려지고 호흡이 뚝뚝 끊어졌다. 삶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지는 와중에도 나는 내 삶을 이대로 끝낼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살고 싶어. 나는 그와 함께 살아가고 싶었다. 순간 상태 창이 지직거렸다.
「‘살고 싶어.’」
「이대로 결정하시겠습니까?」
시스템에 어떤 정신으로 대답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말을 직접 뱉었는지 마음속으로만 읊조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곧 새로운 상태 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보상은 시스템을 종료한 후 수령 할 수 있습니다.」
「ㄲㅡㅌㄴㅐㄱㅣ?」
‘…….’
「수락 완료! 시스템을 종료합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대답조차 하지 않았지만 시스템은 멋대로 상태 창을 띄웠다. 시작할 때처럼 끝나는 것도 이렇게나 갑작스러웠다.
옆에서 박율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어 가슴께를 내려다보니 상처가 아물어 가고 있었다. 시스템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이어서인지 여전히 고통은 없었다.
【이런 마지막을 만들 수도 있었구나.】
상태 창이 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신의 목소리가 섞여 들렸다. 불안정해 보이던 상태 창은 곧이어 팡 터지더니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신의 목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주변에 갑작스러운 정적이 깔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상처도 다 아물었네.’
마기도 다 정화되어 주변이 온통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균열이 사라지면서 공간 자체가 무너지는지 위쪽에서부터 서서히 금이 가는 것이 보였다.
“이한아.”
그리고 박율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물이 채 마르지 않은 얼굴이 보였고, 내 가슴께에 가져다 댄 떨리는 손도 느껴졌다. 그가 손끝으로 더듬거리는 자리에 커다랗게 흉이 져 있었다. 어쩐지 현실감이 없어서 어설프게 웃다가 그의 축축한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형 덕분이에요.”
“…이한아, 선이한.”
박율은 내 이름만 부를 줄 아는 사람처럼 몇 번이고 나를 불렀다. 다섯 번쯤 대답하고 나서는 언제까지 그러려나 싶어서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는 불퉁한 내 얼굴이 웃겼는지 그제야 표정을 풀고 웃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그런 것 같긴 했다. 아까 몇 번이나 말을 하려다 말더니.
“듣고 있어요.”
“사랑해.”
울어서인지 잠긴 목소리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게 들렸다.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가 들렸다. 눈이 크게 뜨였지만 정작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빙글 돌리다가 다시 그를 살짝 바라봤다. 그는 아까부터 줄곧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현실감이 느껴졌다.
그가 내게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내게 허락을 구하는 듯한 눈빛에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숨이 맞닿았다.
“흐… 하아.”
지금까지 박율은 나를 봐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그것조차 자극적이긴 했지만 그는 나름대로 선을 지켜 왔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흐읏… 혀엉.”
나도 모르게 그의 옷자락을 말아쥐었다. 박율은 그동안 대체 어떻게 참았나 싶을 정도로 집요하고 농밀하게 내 입 안으로 파고들어 와 혀를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움직임 하나하나가 부드럽고 다정해서,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숨이 가빠서, 그렇게 몇 번이나 입을 떼었다 붙였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파직, 하는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어느새 균열이 완전히 깨어졌고, 우리는 현실로 나와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작은 눈송이가 코끝에 내려앉아 차가웠다. 밤을 몰아내고 멀리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박율의 얼굴에 그 빛이 비쳐서인지 얼핏 붉은 기가 보였다.
공기가 찼으나 몸에는 열이 올랐다. 주체할 수 없는 기분이 들어 가슴을 그러쥐었다. 여전히 숨이 찼다. 숨이 찼고, 그리고….
“형, 아파요.”
뜨거운 눈물이 방울져서 떨어졌다. 박율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터질 것 같아.”
긴장하듯 몸을 굳혔던 박율은 그제야 몸에 힘을 풀고는 나를 껴안아 등을 다독였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데에서 오는 안도감과는 달랐다. 더 격렬하고 뜨거운 감정이었다.
“정말이에요. 봐요.”
박율의 손을 잡고 내 가슴 위로 겹쳐 올렸다. 가쁜 숨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과 두근두근하는 울림이 그에게도, 나에게도 전해졌다. 그의 체온이 뜨거워서 더는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응, 정말 그렇네.”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그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자마자 깨달았다. 아프도록 세차게 뛰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알아요. 이게 뭔지 알 것 같아.”
박율의 목에 팔을 감았다. 떠오르고 있는 붉은 태양 빛이 박율의 얼굴에 아른거렸다. 그 안에서도 그의 연한 녹빛 눈은 선명하게 빛났고, 내 얼굴이 비칠 만큼 맑았다.
“사랑해요.”
그에게 조심히 입을 맞췄다. 나는 아까의 박율처럼 할 자신이 없어 괜한 욕심을 내지 않았기에 입술을 살짝만 붙였다가 떼어 냈다. 박율은 아까의 자연스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는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멍한 표정을 했다.
앞으로 당신과 함께할 수 있게 되어서 기뻤다. 당신과의 미래를 그리게 되어서 행복했다. 키득 웃는 내게 박율이 고개를 숙여 이마를 맞댔다.
“사랑해, 이한아.”
환한 웃음이 태양 같은 사람이었다. 아직도 심장은 진정될 줄을 모르고 아프게 뛰었다. 시스템이 사라지고 오랜만에 느끼는 아픔이 생경했다. 그래도 이런 아픔이 행복이라면, 이런 벅참이 사랑이라면. 나는 평생 벅찰 만큼 아파해도 좋을 것 같았다.
“이제 다 끝난 건가요?”
“아니.”
그가 말갛게 웃었다.
“이제야 비로소 시작이지.”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태양이 높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와 함께 나아갈 시간이 앞으로도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
박율은 축 늘어진 선이한을 품에 안고 절벽 위로 텔레포트했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던 선이한은 스위치가 나가듯이 갑자기 의식을 잃었다. 어딘가 잘못되기라도 한 건가 싶어서 급하게 호흡과 맥박을 확인했으나 모두 정상이었다. 균열 안에서 검에 찔렸던 상처도 흉으로만 남아 있었다.
라엔과 송하견과 민주혁이 있던 절벽 위쪽의 상황도 모두 정리되어 있었다. 마물은 재가 되어 사라진 상태였고, 균열은 모두 흔적도 없이 닫혀 있었다. 박율은 독단적으로 행동한 것에 대한 애정 어린 원망을 한참 동안 들으며 다 같이 레데오로 돌아왔다.
아무 이상도 없었기에 단순히 지쳐 잠든 것인 줄 알았던 선이한은 몇 개월이 지나도록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정확히 일 년이 지났을 때, 선이한은 드디어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