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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48화 (148/150)

148화.

좋아하고 있으니까

박율은 내가 그의 앞에 설 때까지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숨을 고르고 허공에 떠 있는 검부터 잡아채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간절한 마음으로 그의 어깨를 양손으로 조심히 붙들었지만 치료하겠느냐는 상태 창은 나타나지 않았고 뜨거운 피만 내 손에 진득하게 묻을 뿐이었다. 그의 눈가로 흘러내리는 피를 소매로 조심히 닦았지만 크게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계속 흐르는 탓에 소용이 없었다.

입술을 짓씹으며 초점이 조금 어긋나 있는 듯한 그의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그는 그제야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이한이 맞아?”

“맞아요. …아예 안 보여요?”

“음, 흐릿하게 보이네.”

“…….”

태연한 말투가 오히려 더 마음이 아팠다.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 울고 있을 수는 없으니 그건 다행이었지만 눈물이 가슴에 고이는 것처럼 뜨거웠고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박율은 항상 똑같았다. 항상 이런 식으로 전부 다 자신의 짐이라는 양 태연하게 혼자 짊어졌다. 나는 이제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박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뭔가 고민하다가 답을 찾았는지 곧 살포시 웃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었어. 균열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건 분명히 선택받은 용사뿐이거든. 그런데 너에게는 가능했고, 심지어 네게서만 운명이 보이지 않았지.”

내가 바닥에 내려놓았던 검을 박율이 흘끗 봤다가 다시 나를 바라봤다.

“이번 대의 선택받은 용사는 두 명이었을지도 모르겠네. 이게 너의 역할이었구나.”

박율이 이렇게 금방 알아챈 걸 보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미안해요.”

박율에게 한 번도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제대로 알리지 않은 것이 못내 미안했다. 당신이 홀로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박율은 내게 더 기대도 됐다. 내가 그에게 기댄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이.

‘좋아하고 있으니까.’

그 말을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마지막에 그런 말을 남기고 떠난다면 그가 너무 아파할 테니까. 그래서 나는 꿇어앉은 그를 가만히 껴안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처음부터 알고 있지는 않았어요. 올해 초 신전에 갔을 때 알게 됐어요. 그래도 나는 형이 살았으면 했어요. 형이 이 공간에 들어오는 걸 막고 싶었고… 차라리 나를 데려가라고 말했던 것도 형에게 검을 겨누기 위한 게 아니었어요.”

끝까지 숨길 생각이었는데 마지막에 나도 모르게 본심이 튀어나와서 입을 막았다. 나를 바라보는 박율의 초점 잃은 붉은 눈동자가 야살스럽게 휘어졌다. 눈동자 색이 바뀌었을 뿐인데, 이전과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았다.

“무서워하지 마.”

그는 내 손에 검 손잡이를 쥐여 줬다. 잠깐 손이 스쳤을 때 역시나 치료하겠느냐고 묻는 상태 창은 뜨지 않았다. 짐작했듯 이 공간에서 신력을 원활하게 쓸 수 없는 듯했다.

“네게 잔인한 일이라는 걸 알아.”

“형한테는 모든 게 잔인했겠죠.”

“형은 괜찮아.”

“내가 안 괜찮다면요?”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는데 자꾸 말이 날카롭게 나갔다. 손에 들린 검이 너무 무거웠다.

“정말 그냥 받아들이는 거예요? 어떻게 그래요?”

“…….”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형도 괜찮지 않잖아요, 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해요? …적어도 나는 형을 그렇게 놓을 수 없어요. 형이 그렇게 희생하고 나면 내가 살아갈 수 있을 리가….”

“…내가 괜찮지 않으면! 그러면, 달라지는 게 있어?”

내 말을 끊고 소리친 박율이 자기가 더 놀랐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격해진 감정을 진정시키려는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그의 손 틈새로 눈물처럼 방울져 떨어지더니 바닥에 고였다.

“이한아, 너는 나를 잊을 거야. 그러니까….”

등이 오르락내리락하며 거칠게 심호흡하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살아갈 수 있어. …그렇지?”

내게서 확답을 듣기를 원하는 듯한 어투였다.

“내가 잊지 않겠다고 하면요? 신력이든 뭐든 써서 어떻게든 형을 잊지 않을 거라면요?”

“그러지 마.”

“반대 상황이었더라면 형도 그랬을 거잖아요.”

가만히 생각하던 박율이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는지 그제야 굳은 얼굴을 풀고 어쩔 수 없다는 듯 희미한 웃음을 그렸다.

“사실 처음부터 끝은 정해져 있었어, 이한아. 형은 그걸 각오하고 있었고. 그러니까 네가 마무리를 짓든 형이 마무리를 짓든 크게 다르지 않아.”

“…….”

“만약 네가 어떻게든 이 순간을 기억하더라도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그게 가능하겠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반대로 가능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들었다. 박율도 이 순간을 기억할 때 그렇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해서였다. 나 역시 박율처럼 각오하고 있던 일이었다. 당신이 없는 내일 같은 건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러니까….

‘끝내야 할 때가 됐어.’

밖에 있는 용사들의 상황도 심각했고, 박율의 문제 역시 오늘이 가기 전에 해결하지 않으면 그가 마기에 잠식될 터였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지 박율의 얼굴이 이전보다 더 창백해 보였다.

“힘들 거라는 거 알아. 손만 얹어. 형이 마법으로 띄울게.”

“아니, 마법 풀어요.”

손에서 둥실 떠오르던 검이 다시 바닥으로 내려앉자 무게감이 여실히 느껴졌다.

“여기야.”

박율은 친절하게도 검 끝을 손으로 쥐어서 자기 가슴에 겨눠 줬다. 이 와중에 그의 손이 검날에 베이기라도 할까 걱정이 됐다.

“손 떼요.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괜히 말이 뾰족하게 나갔다. 박율은 손을 물리고 부드럽게 웃었다.

“사실 우리는 용사 서약을 맺지 않았으니까 너는 형을 곧바로 잊을 거야. 기억을 유지할 방법을 찾을 새도 없겠지. 그러니까 네가 많이 괴롭지는 않을 거야. …다행이다.”

그는 이번에도 뭔가를 이어서 말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말해 줘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잖아요.”

“아니야. 이제 끝낼까. 시간이 더 지체되면 안 돼.”

“…눈 감아요.”

“그래, 울지 말고.”

다정한 그의 말이 너무 아팠다. 그와 영영 헤어지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그를 살리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박율이 눈을 제대로 감은 걸 확인하고 그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천천히 검의 방향을 바꿨다.

신력도 마기처럼 심장에 모이는 거라면 내가 박율 대신에 내 심장을 검으로 찌르면 됐다. 신이 직접 내게 넣은 힘이니 그 힘이 폭발적으로 터진다면 박율의 안에 있는 마기도 정화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번에 심장을 관통하기 위해서 한 손으로는 검날을, 다른 한 손은 앞으로 쭉 뻗어 검 손잡이를 쥐었다. 검날이 잘 벼려 있었는지 금세 베여서 피가 맺히는 바람에 손바닥이 미끈거렸다.

“율이 형. 왜 나한테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안 물어봐 줘요?”

“응, 뭔데?”

좋아해요, 라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속으로만 이 말을 몇 번이나 생각했는지 모른다. 끝끝내 입 안에서 맴도는 말을 다시 삼켜 내니 묵직하게 마음에 고이는 느낌이 났다.

박율은 아직도 착실하게 눈을 감은 채였다. 내가 죄책감 때문에 자신의 눈을 마주한 채 찌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마지막까지 나를 생각해 주는 박율 때문에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고마웠어요.”

그대로 검을 내 안으로 깊숙이 박아 넣었다. 푹, 하는 소리와 함께 박율이 눈을 크게 떴다.

“…이한아.”

박율은 상황 파악이 곧바로 되지 않는지 그 자리에서 굳은 채였다. 그러나 내 몸이 무너지며 앞으로 쓰러지자 나를 재빨리 받쳐 안았다.

입에서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검을 박아 넣은 가슴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공간에서 신력은 사용할 수 없지만 시스템이 부여한 기본 스킬은 유지되는 것인지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정신도 멀쩡했다.

“안 돼, 이한아. 아니야, 이럴 수는 없어.”

박율의 목소리가 온몸으로 부정하듯이 흔들렸다.

‘그런데 왜 아무런 변화가 안 나타나지?’

내가 희생해서 상황이 해결될 거라는 건 가설일 뿐이었다. 틀린 가설이라면 안 되는데. 마기가 뭉쳐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이 공간도, 박율의 붉은 눈동자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신력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려면 검을 다시 빼내야 한다는 데까지 생각이 닿았다.

“선이한, 건드리지 마.”

박율이 내 손을 낚아채는 것보다 내가 검날을 쥐고 뽑아내는 게 더 빨랐다. 뚫린 상처에서 피가 울컥 쏟아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가슴께와 머리가 지끈 울리는 감각이 들었다. 아파서라거나 피가 많이 빠져나가서는 아니었다. 뭔가 힘이 쭉 빠지는 듯한….

「<경고!> 신력이 응집되지 않아 시스템이 제대로 유지되지 못합니다.

생명 반응이 떨어집니다. 자가 치유가 불가능합니다.」

빨간 상태 창이 눈앞에 깜빡이며 요란하게 펼쳐졌다. 그건 괜찮았다. 박율의 목숨과 내 목숨을 바꾸는 건 아깝지 않았으니까.

‘됐다.’

내 주위에서 시작된 빛으로 검붉고 어둡던 주변이 찬찬히 하얗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눈꽃이 퍼지듯이, 혹은 탈색되듯이 천천히 색이 빠져나가면서 공간이 온통 하얗게 변했다. 순식간이었다. 이제 이 공간에서 검붉은 건 내가 흘리는 피뿐이었다.

피가 많이 빠져나가서인지 시야가 벌써 흐려지기 시작했다. 눈앞에 뜬 상태 창이 거슬려서 사라지게 하고 나서야 정신이 조금 들었다. 박율이 내 상처를 지혈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잘 될 리가 없었다.

여기서 끝나리라는 건 각오한 바였으니까 괜찮았다. 침착함을 다 잃은 듯한 박율은 괜찮지 않아 보였지만.

“형, …커헉, 욱.”

고통은 없었지만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피에 호흡도 가빠 와서 말 한 마디도 뱉기가 쉽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니 그전부터 계속 말하고 싶었는데. 용사들이 세상을 구한다면 나는 그런 용사들을 구하고 싶다고.

“말하지 마. 피가, 피가 안 멈추는데. 왜….”

“…괜찮, 흐윽, 컥, 콜록….”

“눈 뜨고 있어. 의식 놓으면 안 돼.”

그를 더 오래 눈에 담고 싶었지만 시야가 점점 흐려지고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그래도 나름 성공적이었다. 박율은 세상을 구해 냈고, 나도 내 세상을 구한 거니까. 상황에 맞지 않게 조금 웃음이 나왔다. 박율이 걱정하는 것만큼 심각하지는 않았다. 아프지도 않았고. 이런 게 끝이라면 나쁘지 않았다.

눈을 완전히 감은 순간 이질적인 목소리가 파고들어 왔다.

【아이야, 이것이 너의 선택이구나.】

신의 음성이었다. 아마 당신이 생각했던 결말과는 다르겠지.

【너는 만족했느냐?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신은 내 대답도 듣지 않고 결론을 지었다. 물론 내가 대답할 만한 정신이 없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이후로 신의 음성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솔직히 이 상황에 조금의 아쉬움은 있었다. 아주 조금. 끝내 그에게 내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그의 마음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 그렇지만 이제 와 그 감정을 마주하는 건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제 세상은 완전히 평화로워졌을 것이다. 시스템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니까 나는….

“안 돼, 이한아…, 너는 죽지 않아. 여기서 죽을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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