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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47화 (147/150)

147화.

나아가 줘

급하게 상태 창을 불러서 그를 치료했다.

「<힐러가 도울게요!> 치료하기, 성공!」

파란빛이 사그라들고 박율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주한 그의 눈동자가 새빨갛게 빛났다. 조금 창백한 안색과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은 그대로였다. 그는 나와 시선을 마주하고는 입꼬리를 천천히 끌어 올렸다. 평소처럼 흠잡을 데 없는 웃음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곧 모든 것이 끝나. 잊는 건 금방일 거야.”

박율의 시선이 뒤쪽으로 슬쩍 향했다가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그가 제 목에 걸린 초커를 풀어냈다. 보석의 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내 반지와의 연결을 이렇게 한순간에 끊어 버린 것이다. 목이 턱 막힌 듯 아무런 말도 뱉을 수가 없었다.

“…….”

“울지 마.”

“…가지 마요.”

그는 내게 뭔가를 말하려고 입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의 금발이 지고 있는 태양 아래서 흔들렸다. 양손으로 내 뺨을 어루만지듯 눈물을 닦아 내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이한아. 함께했던 모든 기억은 형이 가지고 갈게. 그러니까 너는 좋은 기억만 남기고, 앞으로도 지금처럼, …나아가 줘.”

박율은 내가 붙잡을 새도 없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나도 그의 뒤를 따르려 했다. 그러나 나를 붙잡는 손길이 있었다.

“진정해요.”

언제 온 건지 라엔이 나를 끌어당겨 품에 안은 탓에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리더 형은 그냥 뛰어내린 게 아니에요. 절벽 아래에서 균열과 비슷한 기운이 느껴져요. 분명 다른 공간과 연결되어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저번처럼요. 나도 가야 돼요. 놔줘요, 형.”

“안 돼요. 이번에는 절대.”

단호한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으나 나를 감싼 라엔의 몸은 떨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안은 채로 곧장 텔레포트했다. 허무하게도 눈 깜빡할 새에 나는 아까 그 풀숲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럴 수는 없었다.

“라엔 형!”

라엔은 송하견과 민주혁의 곁으로 합류해 마물을 향해 공격 마법을 쓰면서 내게 말했다.

“미안해요. 나를 미워해요. 내가 붙잡은 탓에 이한은 어쩔 수 없었던 거예요.”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전부 알고 있었나요?”

“아니요, 나도 추측만 했을 뿐이에요. 형에게 직접 물었을 때도 정확한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거든요. 다만 형은 만약의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든 이한을 지키라고 했고, 이한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 했어요.”

어쩌면 라엔이 종종 불안해했던 건 그가 여러 상황을 가정한 끝에 지금 이 상황이 오리라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바꿀 수 없는 운명은 무겁고 두렵게 느껴지는 법이니까.

‘어떻게 하지.’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박율이 균열을 넘어간다 해도 곧바로 스스로의 심장을 찌르지는 않을 터였다. 내가 꿈에서 봤던 것처럼 거대한 마물을 처리하는 게 먼저일 테니까.

그러나 그 균열 속 시간의 흐름이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없었으므로 더는 지체하면 안 됐다. 일단은….

“민주혁, 내 발목에 걸어 둔 포획 마법 풀어.”

“너무 세게 묶었나? 아파?”

“응, 아프니까 빨리 풀어.”

“아플 리가, 내가 힘 조절은 자신 있는데.”

민주혁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포획 마법을 조금 더 느슨하게 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한쪽 발목이 땅에 묶인 채였으므로 한 걸음도 옮길 수가 없었다

“불편하겠지만 조금만 참아 봐. 네가 아까처럼 뛰쳐나갈까 봐 그래.”

민주혁의 태도가 생각보다 강경해서 속으로 혀를 쯧 찼다. 사실 민주혁뿐만이 아니었다. 라엔은 여전히 내 어깨를 감싸 안은 채였고, 송하견도 마물을 상대하면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막막함에 입술을 꾹 깨문 순간 눈앞에 상태 창이 나타났다.

「보상, ‘용기 있는 한 걸음(1회)’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이게 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런 보상을 받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구나. 시스템은 신의 힘이라고 했고, 신은 내가 박율의 심장을 찌르고 굴레를 끊어 내기를 바란다. 그러니 지금 이 상태 창이 나타난 걸 보면 어떻게든 나를 박율에게로 인도하려는 모양인 게 틀림없었다.

‘사용하기.’

「보상, ‘용기 있는 한 걸음(1회)’을 사용합니다.

나아가야 할 곳으로 향하는 당신의 걸음을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시스템의 강제력이 이럴 때는 기꺼웠다. 푸른빛이 내 몸을 감쌌다. 이 빛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보이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잠깐, 선이한. 너 뭐 한 거야?”

푸른빛이 민주혁의 포획 마법을 끊어 놓았고, 그는 다시 마법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는 듯했다. 송하견도 나를 붙잡아 두기 위해 마법을 썼지만 내게 닿지 못했다. 빛은 내 주위로 빙빙 돌며 연한 바람을 일으켰다.

“가지 말아요. 여기에 있어요, 제발….”

라엔이 간절하게 뻗은 손은 내게 닿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돌았다. 시스템의 힘으로 이런 것도 가능하구나. 새삼스럽게 놀랐다.

지금 이 순간이 용사들을 마주할 수 있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얼마 걸리지 않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요.”

박율도 떠나기 전 이런 기분이었을까. 부유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으으, …욱.”

발이 땅에 닿자마자 입을 틀어막고 쪼그려 앉았다. 이 정도로 메스꺼운 거라면 시스템의 보상에 안전성의 문제가 있는 걸지도 몰랐다. 텔레포트와 달리 몸에 무리가 가는 종류인 듯했다.

울렁이는 속을 가라앉히려 몇 번을 심호흡하고 나서 눈을 뜨자 앞쪽으로 아까 박율이 뛰어내렸던 그 절벽이 있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이동시켜 준 게 다행이었다. 이제 나도 저 아래로 뛰어내리기만 하면 됐다.

절벽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시스템의 알림음이 귓가에 울렸다. 동시에 파란 상태 창이 시야를 가렸다.

<퀘스트> ‘라엔-의심하지 말아요’ 성공!

“어…?”

갑자기 왜? 상황을 다 이해하기도 전에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덥석 안았다. 로브 자락이 흘러내리며 달콤한 향기가 스쳤다.

“이한. 그냥 여기에… 내 옆에 있어 주면 안 될까요?”

속삭이는 듯한 물기 어린 목소리가 귓가에 바로 들렸다. 곧장 뒤를 돌아 그의 얼굴을 살폈다. 세게 짓씹어 피가 맺힌 그의 입술을 조심히 눌러 힘을 풀게 하고 눈물이 흘러내리는 그의 눈가를 쓸었다.

“왜 울어요.”

“리더 형이 혼자서 감당하려고 한 이유가 뭔지 몰라요? 알잖아, 다 알고 있잖아요. 당신이 다치지 않기를 바란 거였어요. 그런데 당신은 왜 항상 그렇게….”

“라엔 형.”

“형이 나에게 이한을 지키라고 한 건, 내게 이한을 지킬 힘이 있다고 믿어서예요. 그러니까 나는 당신을 막아야만 해. 그래서… 어떻게든 지킬 거예요.”

“…….”

“아니, 미안해요. 사실은 다 내 욕심이에요. 핑계 대지 않을게요. 이한마저 잃으면 내가 버티지 못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내게서 떠나지 말아요.”

흐느끼듯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깨달음이 스쳤다. 라엔은 나를 위해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었구나.

아무리 그가 종종 신력을 느꼈다고는 해도 시스템의 강제력을 이겨 낼 수는 없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여기까지 와서 나를 붙잡을 수 있었던 건 그가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걷어 내고 자신이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코가 시큰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졌지만 지금 라엔의 앞에서 울 수는 없었다. 그가 괜한 걱정을 하지 않도록 환하게 웃었다.

“그거 알아요? 아무도 나를 붙잡을 수 없도록 신력을 써 뒀었거든요. 그런데 형이 나를 찾아서 여기까지 왔잖아요.”

자신을 극복한다는 건 이런 힘을 가진다는 거구나. 강한 의지는 신력을 비틀 수 있다. 그러니 나의 의지로 박율의 운명 역시 바꿀 수 있을 터였다.

“형 덕분에 확신이 생겼어요. 라엔 형이 지금 불가능한 걸 해낸 것처럼 나도 해낼게요. 할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하지 마. 금방이라도 떠날 것처럼 그러지 말아요….”

“나를 믿어 줘요. 이번에는 형이 나를 믿어 줄 차례예요.”

라엔이 숨을 들이켰다. 그는 빨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봤다. 세차게 흔들리던 금안이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그가 허리를 숙여 내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나도 그를 마주 안았다.

“늘 믿어요. 믿을게요. 그러니까 꼭 돌아와요. 약속이에요.”

내 등을 두어 번 찬찬히 다독인 라엔이 내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여전히 눈물은 흐르는 채였지만 애써 웃는 얼굴을 만들어 낸 라엔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몇 걸음을 옮기자 바로 절벽이었다.

‘이거구나.’

절벽 아래 일렁이는 뭔가가 보였다.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몸을 던졌다.

「균열에 입장할 경우 시스템과의 연결이 끊길 수 있습니다.」

눈을 뜨자 지직거리던 상태 창이 파스스 흩어지며 사라졌다. 공간에는 불쾌하게 끈적이는 검붉은 뭔가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마 이게 마기인 듯했다. 전에 들어왔던 균열 내부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여기도 균열 내부라서 신력이 잘 안 통하는 듯한데.’

그렇다면 박율에게 치료하기나 가져오기를 쓰는 건 어려웠다. 곤란하긴 했지만 그 방법만 생각해 둔 건 아니었으므로 일단은 걸음을 뗐다.

박율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온통 어둡고 기분 나쁜 공간 속에서 박율만이 빛을 내고 있었으니까. 그의 앞에 지금껏 봐 왔던 것보다 훨씬 거대한 마물이 있었다.

마침 핵을 찾았는지 그가 허공에 떠오르더니 마물 깊숙이 검을 박아 넣었다. 휘청이는 그의 상태가 멀리서 보기에도 심상치 않아 보였다.

‘지금 이 상황이다.’

내가 언젠가 꿈에서 봤던 것과 똑같았다. 마물이 서서히 재가 되어 흩어져 사라졌고, 박율은 바닥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그러고는 발을 땅에 딛기가 무섭게 자리에 그대로 무너져 무릎을 꿇었다. 그 모든 게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곧장 박율에게로 뛰어갔다. 베이고 뚫린 깊은 상처들, 군데군데 찢긴 채 피에 푹 젖어 들어간 옷.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는 그의 앞에는 날카로운 검이 마법으로 둥실 떠올라 있었다. 그의 심장을 겨눈 채로.

“율이 형!”

내 목소리를 들은 박율이 나를 돌아봤다. 이마에서 흐르고 있는 피 때문에 오른쪽 눈은 찡그려 감고 있는 채였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의 왼쪽 눈동자가 타오르는 듯한 붉은빛을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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