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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46화 (146/150)

146화.

같이 가요

“오늘로 끝이겠네.”

전투를 준비하며 평소와 다름없이 말하는 박율을 올려다봤다. 시선을 눈치챈 그가 나를 바라보며 티 없이 웃었다. 나도 부자연스럽게 보이지 않기를 바라며 그를 따라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응. 남은 마물의 수를 보면 오늘 안에 마무리될 것 같아.”

송하견의 대답을 들으며 입술을 짓씹었다.

‘그래. 오늘로 끝이겠지.’

마물을 처리하고 균열을 닫는 것도, 올해도.

아직 세상이 멸망할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오늘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든 박율을 살리겠다는 목표 하나만큼은 굳게 다진 채였다.

“형님, 여기는 다 준비됐습니다.”

“별다른 특이 사항은 없어요. 전략도 이전처럼 그대로 유지하면 돼요.”

“그래, 이제 출발하자.”

앞장서서 나아가는 박율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도 송하견의 옆에서 발을 맞추어 걸음을 뗐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박율의 얼굴을 정면에서 제대로 마주할 기회가 아까 그때가 마지막은 아니었을까.

‘좀 더 환하게 웃어 보일걸.’

마지막 순간은 좋은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티 없이 맑게 웃는 모습으로. …박율이 아까 내게 보였던 그런 모습처럼.

어느덧 해가 져 가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마물의 수가 확연히 줄어들어 있었다. 상황이 거의 마무리되어 가는 듯했다. 나는 아까와 다름없이 후방에 있는 송하견의 옆에 서서 민주혁의 방어 마법을 두른 채로 용사들을 틈틈이 치료하고 있었다.

‘율이 형은 초조해 보여.’

겉으로는 침착해 보였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박율은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조급한 것처럼 검을 휘둘렀다. 그의 감정에 동화되듯이 나도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며 손끝이 떨렸다.

그러다가 한순간 박율이 우뚝 멈춰 섰다. 민주혁이 ‘왜 그러십니까?’ 하고 묻는 동시에 라엔이 흔들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잠, 깐. 저건.”

라엔의 시선을 따라가자 허공에 아가리를 벌리듯 서서히 열리고 있는 균열이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불규칙적으로 분포하며 늘어나는 균열 안에서 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균열이 열리는 양상이 지금까지 봐 왔던 것과 달라요.”

“큰일인데. 여유 부릴 상황이 아니야.”

“저 마물들을 다 처리하는 게 정말 가능할까요. 끝이 안 보이는데.”

막막함을 담은 라엔의 혼잣말에 송하견이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우선 그동안의 전략 같은 건 생각하지 마. 필요 없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조건 밀어붙여야지. 마나가 고갈되기 직전까지, 쓸 수 있는 모든 마법을 써서.”

검붉은 핏빛으로 좀먹어 가는 하늘은 세계의 멸망을 가리키고 있는 듯했다. 압도적인 규모에 나조차도 저절로 몸이 굳었다. 옆에서 누군가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정신 차려. 흐트러지면 안 돼.”

박율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민주혁도 마찬가지였는지 손을 앞으로 뻗고는 방어 마법을 서둘러 보완했다.

라엔은 사태를 빠르게 간파하고는 이미 공격 마법을 쏟아붓고 있었다. 한발 물러나 상황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보완하던 송하견은 이전과 달리 라엔과 합을 맞추어 공격 마법을 외웠다. 그리고 박율은….

“율이 형?”

“이곳에 있는 마물의 핵은 이게 마지막이야.”

박율이 앞에 있는 마물에 검을 찔렀다가 빼냈다. 그 마물은 재가 되어 사라졌으나 새로 열린 균열에서 쏟아지고 있는 마물은 여전했다.

순간 득달같은 마물의 공격이 방어 마법의 틈새를 파고들어 와 송하견에게 부상을 입혔다. 급박하게 전개되는 상황에 머리가 어지러운 와중에도 떨리는 손을 본능적으로 그에게 뻗었다. 그를 붙든 채 곧바로 치료하자 선혈이 뚝뚝 떨어지던 상처가 서서히 아물어 갔다.

재빨리 방어 마법을 보완한 민주혁은 무리하고 있는지 숨을 몰아쉬다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러면 저것들은 어떻게 처리합니까?”

“이곳에서는 해치울 수 없어.”

“그러면요?”

불안한 눈빛으로 박율을 바라봤다. 나를 돌아본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박율은 이것까지 알고 있었구나.

이전까지의 조급해 보였던 기색은 온데간데없고 오히려 담담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쩌면 그가 이 순간을 수없이 그리며 각오해 왔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마기는 한곳에 모이는 성질이 있어. 이곳에 있는 근본적인 악을 처리한 후에 마기가 분산되고 나면 이쪽의 마물들은 자연히 사라질 거야.”

박율이 슬며시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붙잡아야 해. 그 생각만으로 박율을 향해 튀어 나가는 몸을 송하견이 반사적으로 끌어안았다. 곁에 있지 않으면 나를 보호하기가 어렵다고 했던가. 그렇지만 지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가지 마요. 아니, 차라리 같이 가요. 형, 나도 데려가요.”

“언젠가 이런 상황이 또 있었지. 다들 그때도 잘 버텼으니 지금도 잘 버틸 거라고 믿어.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형님? 어디 가십니까?”

불길함에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박율은 어쩌면 지금 제 목숨을 희생해서 상황을 끝내려고 하는 걸지도 모른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는 그의 말은 귀환을 보장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지난번처럼 돌아올 거라는 말을 기어코 입에 올리지 않았다.

“형, 안 돼요. 같이… 흑, 같이 갈래요.”

여러 번 머릿속에서 그려 봤던 상황이었지만 막상 닥치니 침착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없이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박율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하견아, 잘 붙들고 있어. 그리고 민주혁.”

박율은 민주혁과 시선을 맞췄다. 찰나의 순간 박율의 눈동자에 여러 복잡한 감정이 담겼다가 금세 갈무리됐다. 그는 내게로 시선을 돌리고는 굳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절대 따라오지 못하게 해.”

등을 돌린 박율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앞으로 나아갔다. 빠르게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안 돼…. 이거 놔요, 하견 형.”

“박율 형, 지금 무슨….”

송하견에게도 예기치 못한 상황이었는지, 공격 마법을 외우면서도 나를 단단히 붙잡고 놓지 않던 그의 팔에 순간 힘이 풀렸다. 때를 놓치지 않고 그에게서 빠져나와 풀숲 사이로 자취를 감춘 박율을 쫓아 달렸다.

“야, 선이한!”

“이한, 안 돼요!”

민주혁과 라엔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라엔이 곧바로 나를 쫓았으나 달려드는 마물에 길이 막혔다. 나도 조금만 늦었더라면 마물에 포위된 채였을 것이다.

뒤에서 용사들이 나를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눈앞의 상황을 수습해야 하니 나를 쫓아오지는 못할 것이다. 쉼 없이 달음박질을 했다. 이런 마지막을 위해서 그동안 준비한 게 아니었다. 그를 이렇게 보낼 수 없었다.

‘어디까지 가야 하지?’

길은 하나였지만 박율이 아직 보이지 않았기에 맞게 가고 있는 건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숨이 턱까지 차고 머리가 빙빙 돌았다. 그때 옆에서 뭔가가 빠르게 다가오는 듯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곧장 발을 멈췄지만 그 반동으로 인해 앞으로 성대하게 엎어졌다.

“으….”

다리에 힘이 풀려서 일어서지도 못한 채 겨우 뒤를 돌아본 순간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방금까지 내가 서 있던 곳에 마물의 촉수 같은 것이 길게 뻗어져 있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그대로 몸이 뚫릴 뻔했어.’

뒤이어 마물의 본체가 이쪽으로 느릿하게 기어 왔다. 나를 찾아내려는 듯 이리저리 움직이는 촉수가 위협적이었다. 빨리 도망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더는 남은 체력이 없었고 힘이 풀린 다리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공포가 몸을 잠식해 왔다. 마물에 당하는 것 자체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다만 이러고 있는 사이에 박율이 내가 붙잡을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릴까 봐 두려웠다. 입술을 꾹 깨물고 품에 손을 넣어 라엔이 마법을 담아 줬던 종이를 뒤적였다. 한심하게 굴 때가 아니었다.

‘라엔이 공격 계열 마법도 전해 줬었나?’

아, 있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서 쓰라고 했던 마법. 빠르게 종이를 꺼내서 찢었다. 눈앞에 빨간빛이 터지자 마물이 주춤거렸다.

‘이런. 역시 마법을 직접 쓰는 것보다는 못하나.’

위력이 세 보였는데도 마물은 멀쩡했다. 오히려 내가 공격 마법을 쓴 게 자극이 됐는지 표면이 울룩불룩해지며 당장이라도 나를 공격하려는 듯한 태세를 갖췄다.

이 상황에서 다른 공격 마법을 쓰는 건 의미가 없었고, 도망치기에는 늦었다. 남은 건 내가 입을 부상의 크기라도 줄이는 것이었다. 적어도 다시 일어나서 달릴 몸 상태는 되어야 박율을 따라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공격을 한 번 비껴가게 하고선 그 틈에 곧장 달려야 한다.

‘눈 떠. 눈 뜨고 있어야 돼.’

속으로 주문처럼 외우며 나를 공격하려는 움직임을 좇았다. 순간 마물의 촉수가 내게로 곧장 뻗어져 왔다. 심지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반사적으로 감기려는 눈을 다시 한번 부릅떴다. 치명적인 타격만 입지 않으면 괜찮을 거다. …괜찮나?

“이제 괜찮아.”

내 눈 위로 누군가의 손이 덮였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시야가 가려져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앞에서 연한 바람이 불었다. 곧 마물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가 마물을 공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뒤이어 몸이 번쩍 들렸다. 그는 그대로 나를 안은 채 곧장 달렸다. 밝아진 시야에 그의 얼굴이 보이자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떨리는 손을 그의 목에 감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율이 형.”

“다쳤어?”

다급하게 물었던 박율은 내가 고개를 젓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박율의 거친 호흡이 맞닿은 몸으로 느껴졌다.

“지금은 저 마물을 완전히 처리할 수 없어. 묶어 두는 게 고작이라 거리를 벌려야 돼.”

“고마워요.”

“…왜, 왜 따라왔어, 이한아.”

한참을 달려 풀숲을 빠져나온 박율이 그제야 멈춰 섰다. 그는 여전히 나를 안은 채로 천천히 숨을 골랐다.

“같이 가자고 했잖아요.”

“네가 다칠 뻔했잖아!”

몸이 흠칫 떨렸다. 박율이 이런 격정적인 목소리를 내는 건 처음이었다. 그는 나를 살며시 품에서 내려 주고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바로 뒤에 펼쳐진 절벽 때문에 그의 모습이 더 위태로워 보였다. 그의 손을 조심히 붙들었다.

“화…났어요? 미안해요.”

“…뭐? 아니, 아니야. 미안해. 이한아, 형은 화낸 게 아니라 네가… 너를 잃을까 봐….”

박율이 내 손을 그러쥐었다. 그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더니 순간 몸을 웅크리고는 다른 손으로 가슴께를 쥐어 잡았다.

“형? 왜 그래요, 괜찮아요?”

그의 목덜미에 식은땀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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