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잘될 거니까
방금 평소보다 훨씬 많은 말을 한꺼번에 했기에, 그중 어떤 말 때문에 라엔이 이렇게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서 부끄러워하는 건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지금 라엔이 잠들 수 있도록 하는 거였다.
“이번에는 형이 나를 달래 줄 차례라면서요. 내가 형이 없으면 잠이 안 올 것 같아요.”
“…알겠어요. 같이 누워요.”
망설이던 라엔은 결국 내 고집에 못 이겨 옆에 누웠다.
“잘 자요.”
그는 가만히 말하고서는 긴장한 듯이 뻣뻣하게 누웠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서 내가 먼저 잠든 척하고 몸을 굴려 그를 살짝 안았다. 잠깐 숨을 들이켠 라엔이 곧이어 팔을 둘러서 나를 꼭 껴안았다.
“이한. …좋아해요. 정말로요.”
내가 깰까 봐 걱정됐는지 워낙 조그맣게 속삭이는 탓에 내 이름을 부르는 것까지만 들렸다. 라엔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상태로 금방 잠들었다.
눈을 감은 채 고른 숨을 내쉬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도 슬슬 몰려오는 졸음에 눈을 감았다. 라엔의 온기 덕분에 몸이 따끈하게 데워지는 것 같았다.
◇
“이제 마지막 균열만 남았어.”
박율이 눈앞의 마물에 검을 박아 넣자 그의 뒤로 선명하게 열려 있던 균열이 얼기설기 기워 갔다.
그의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남은 균열은 하나. 올해가 끝나기까지 남은 시간도 한 달 남짓. 그 시간 안에 균열을 닫는 데 성공한다면 혹시….
‘아니, 그럴 리가.’
쓸데없는 희망은 경계해야 했다. 애초에 선택받은 용사의 숙명이란 모든 균열을 닫았을 때 그 스스로 희생해야 하는 거였다. 예외가 있을 리가 없었다.
언젠가 꿈에서 봤던 박율의 모습이 생생했다. 그의 앞에 있던 커다란 마물과 붉게 쪼개지는 하늘도. 지금 아무런 일도 없는 평화로운 하루하루가 오히려 불안했다. 태연해 보이는 박율의 상태도 마음에 걸렸다. 어떻게 아무런 동요가 없을 수 있지?
“다음 균열은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맞아요. 걸어서 이동했다가는 해가 다 질 테니 텔레포트로 이동하는 게 나을 것 같네요.”
라엔의 시선을 따라서 하늘로 고개를 올렸다. 파란 하늘이 노을로 서서히 물들어 가고 있었다. 아직 밝은 편인데도 걸어갔을 때 깜깜해질 정도라면 거리가 꽤 되는 듯했다.
“그래. 거처도 그 주변으로 다시 잡는 게 낫겠다.”
박율의 말에 송하견도 고개를 끄덕이고 나자 라엔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텔레포트를 썼다.
「‘세상의 끝’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눈앞에 파란 상태 창이 생겨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먼 곳에 낭떠러지가 보였고, 커다란 균열이 그 끝 쪽의 아슬아슬한 곳에 열려 있었다. 어쩐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시간이 늦었으니까 오늘은 거처만 정해 두고 내일부터 마물을 처리하는 걸로 하자.”
“네, 알겠습니다.”
“하견이랑 주혁이가 거처로 정할 만한 장소를 살펴봐 줄래? 형은 라엔이랑 이 주변 지형을 파악하고 있을게.”
“응. 가자, 민주혁.”
심장이 불안하게 뛰는 소리가 귓가에 웅웅대며 울려서 용사들의 목소리가 흩어지듯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떨리는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세상을 구해 줘! 용사 일행의 유일한 힐러, ‘선이한’ 님. 반갑습니다.」
「페널티를 조절하며 용사 일행을 치유하고, ‘□□□ □’에 도달하십시오.」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이 상태 창을 왜 지금 보여 주는 거지? 이어서 또 다른 상태 창이 떠오르며 비어 있던 네모 칸의 글자가 채워졌다.
「페널티를 조절하며 용사 일행을 치유하고, ‘세상의 끝’에 도달하십시오.」
잠깐만. 아까 여기가 어디라고 했지? 지금 이 지역이 세상의 끝이라고 했던가? 늘어나는 혼란에 머리가 빙빙 도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상태 창은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세상을 구할 ‘운명’은 그곳에 있습니다.」
눈앞에서 모든 상태 창이 사라지는 순간, 내 시선은 박율의 뒷모습에 닿아 있었다. 라엔의 옆에서 지도를 펼쳐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의 위로 노을에 붉게 물든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여기였다. 바로 이곳이었다. 박율이 운명을 받아들이고 종착지로 삼을 장소도, 시스템이 첫 순간부터 나를 이끌며 내 목적지로 삼았던 장소도.
‘각오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마주하니까 아니었다. 나는 아직 무언가 결단을 내리기에는 준비되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누구도, 무엇도 잃고 싶지 않았다. 두려움에 손이 떨렸다.
순간 머리에 피가 몰렸다가 한순간에 쭉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위가 뒤틀리는 것처럼 구역감이 치밀어 올랐다.
“…욱.”
한 손으로 입가를 틀어막고 다른 한 손으로 명치께를 쥐었다. 손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허리가 절로 구부러졌다.
‘상태 창.’
이렇게 다급한 기분이 드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이것도 페널티인가 싶어서 상태 창을 불러 보았으나 페널티가 진행되고 있다는 알림은 없었다. 그러면 지금 왜 이러는 거지?
“이한아. 선이한.”
“잠깐,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자리에 주저앉은 내게로 어느새 박율과 라엔이 다가와 있었다. 내 어깨를 두들기며 뭐라고 급하게 말하는 것 같긴 했는데 거기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식은땀이 뺨을 타고 똑 떨어지는 느낌도 났고, 아무튼 고통만 없을 뿐이지 몸 상태가 엉망이었다. 고개를 들 정신도 힘도 없었다.
‘진정하자.’
간신히 심호흡을 했지만 아무것도 나아지는 건 없었다. 울 것 같은 기분으로 입술을 짓씹다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형, 저, 몸이 이상한데….”
눈물샘이 고장 난 것처럼 눈물이 주륵 흘러내리며 바닥에 원을 그렸다. 이런 식으로 어리광 피우듯 말하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당장 너무 괴로웠다. 메스꺼움 페널티를 받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었는데.
“천천히 숨 쉬어 보자. 그렇지, 괜찮아. 지금 열은 없는데, 토할 것 같아?”
“아니요, 그냥….”
“그냥 메스꺼워?”
내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자 라엔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명치 쪽이 아프지는 않아요?”
“…모르겠어요. 원래 아픈 건 못 느껴요. 신력… 그런 거 때문에요. 근데 속이 좀….”
“체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위경련일지도 몰라요. 내가 겪었던 증상과 비슷해 보이는데, 최근에 지나치게 무리했거나 스트레스받을 일이 있었다면 갑자기 그럴 수 있어요.”
박율이 따뜻하게 데운 도톰한 천을 내게 안겨 주고는 내 한쪽 손을 조심조심 지압했다.
“아파? 더 살살 할까?”
“…괜찮아요.”
“리더 형, 약 제조법은 알고 있는데 나한테는 지금 그 약에 쓰이는 약초가 없어요. 하견은 가지고 있을 거예요. 금방 불러올게요.”
“이쪽 두 군데로 먼저 가 봐. 형이 생각한 동선이 맞는다면 그쯤을 살펴보고 있을 거야.”
“알았어요. 이한, 조금만 참아요. 미안해요.”
라엔이 텔레포트로 순식간에 사라지고 박율은 여전히 내 손을 천천히 주물렀다. 따뜻한 걸 안고 있으니까 아까보다 아주 조금 더 나은 것 같기는 했다.
“이한아,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어?”
당연히 있었다. 아까 라엔이 말한 것처럼 위경련인 거라면 원인은 짐작이 갔다.
“얼마 안 남았잖아요.”
“뭐가?”
“…마지막이요.”
‘형은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아요?’라는 뒷말은 삼켰다. 대답을 듣기가 무서웠다. 그가 평정을 가장하고 있는 거라면 내가 그 질문을 했을 때 그를 상처 입히게 될 것이고, 만약 그가 진심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거라면 반대로 내가 상처 입을 것 같았으니까.
“마지막 균열이라고 생각하니까… 조금 긴장됐던 것 같아요.”
“그랬구나. 그래도 지금까지처럼 잘 처리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형이 마지막까지 잘 마무리할게.”
그래서 걱정되는 거였다. 내가 생각해 둔 여러 방법을 실행하기도 전에 그가 혼자 사지에 뛰어들어서 모든 것을 끝마친 후일까 봐. 내가 손을 쓰기도 전에 그를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럼에도 그에게 내 계획을 미리 말할 수는 없었다. 그가 미리 알아챈다면 행동하지 못할 게 뻔했으니까. 결국 혼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동안 불안함은 커져만 갔다.
박율에게 몸을 가만히 기댔다. 눈물이 나는 이유가 속이 메스꺼워서인지 그에 대한 생각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눈 감고 있어도 괜찮아. 그래도 잠들지는 말자, 혹시 모르니까 약은 먹어 둬야 해.”
“…네.”
“그래. 곧 괜찮아질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 라엔이 송하견을 데려왔는지 텔레포트를 쓸 때 특유의 바람이 살랑 불어왔다.
“선이한. 얘기 들었어. 약 한 모금만 삼킬 수 있겠어?”
“내가 위경련이 왔을 때 마시곤 했는데 이 제조법으로 만든 약이 가장 잘 들어요. 지금 속이 많이 안 좋겠지만 한번 삼켜 볼래요? 조금만이라도 괜찮아요.”
약 한 모금쯤 마시는 거야 어렵지 않았다. 박율이 손을 지압해 주는 동안 처음보다 조금 나아진 상태였기에 메스꺼움 페널티로 단련된 나로서는 이제 견딜 만한 정도였다. 내가 약을 한 모금 마시자 송하견이 내 머리칼을 가볍게 헤집었다.
“잘했어. 나아지는지 상태를 지켜보자.”
들어 보니 민주혁은 내가 바로 이동해서 쉴 수 있도록 거처를 준비해 두고 있다고 했다. 약을 먹어서인지 몸 상태가 서서히 나아지고 있었기에 별것 아닌 일로 다들 너무 놀라게 한 듯해서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토할 것 같은 느낌이 서서히 가라앉으면서 몸이 나른해졌다. 내가 잠이 쏟아지는 걸 알아챘는지 라엔이 식은땀에 젖었던 내 머리칼을 마법으로 말려 줬다.
“약이 들어서 다행이에요. 푹 자요. 자고 일어나면 하나도 안 아플 거예요.”
“응. 원래 잠이 오는 약이라서 그래.”
“다 잘 마무리될 거니까, 이제 그건 걱정하지 말고.”
박율이 나를 조심히 안아 들었다. 잠기운에 흐려지는 시야로 그의 얼굴을 좇다가 이내 그에게 완전히 몸을 맡겼다.
“알아요. 다 잘될 거예요.”
◇
한 달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용사들은 ‘세상의 끝’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곳에서 마지막이 될 전투를 했다. 그렇게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 어느덧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