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지금 그대로의 모습을
잠깐, 생각해 보니 옷을 갈아입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옷을 벗어 주려고 한다는 거였다. 설마 내가 한 말 때문인가.
“좋은 향이 난다면서.”
“그건 그렇긴 한데….”
“아. 입고 있던 옷은 조금 그런가.”
송하견은 제 겉옷을 몇 벌 소환해서는 내 어깨에 차곡차곡 걸쳐 줬다. 그사이에 나도 그의 단추를 다시 잠가 줬다. 그러다 내 손이 그의 살갗에 스치자 그가 행동을 멈추곤 그대로 굳었다.
“형?”
그가 대답하진 않았지만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기는 했으므로 말을 이었다.
“옷은 안 줘도 괜찮아요.”
“…그러면 나라도 줄까. 너한테라면 줄 수 있어.”
“네?”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제대로 들은 게 맞았다.
송하견도 농담을 하는구나. 게다가 이렇게 진지한 표정이라니 더 놀라웠다. 그의 의외의 면을 본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좋기도 해서 웃음이 나왔다.
“음, 그냥 꼭 뭔가를 해 줄 필요는 없다는 말이었어요.”
“네가 좋아하는 건 다 주고 싶어. 다 줄 수 있고.”
이렇게 부끄러운 말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하는 걸 보니 송하견은 그냥 표정 변화가 별로 없는 사람인 게 분명했다. 괜히 내가 부끄러워져서 티 내지 않으려 부러 더 환하게 웃으며 그가 내게 걸쳐 준 겉옷을 톡톡 두들겼다.
“좋아하는 걸 이미 이만큼이나 가지게 됐잖아요. 고마워요, 형.”
그렇게 쌀쌀해진 날씨에 겹쳐 입을 겉옷이 여러 벌 생기고 침대 머리맡에 약초가 담긴 주머니까지 걸어 놓게 됐다.
레데오에서 짧은 휴식을 취하는 동안 날이 부쩍 추워졌다.
‘오늘 떠난다고 했었지.’
긴장한 채로 잠들어서인지 다행히 눈이 일찍 떠졌다. 그렇지만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깬 것은 아니어서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침대 머리맡에 잠깐 기대 눈을 감았다.
“힘들어?”
걱정이 담긴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뜨고 그를 바라봤다.
“괜찮아요. 잠이 덜 깨서 그래요. 하견 형은 안 피곤해요?”
“졸리면 더 자. 말해 둘게. 출발이 급한 건 아니야.”
송하견이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내 상태부터 살피는 건 익숙했다. 그와 대화하면서 잠이 어느 정도 깨기도 했고 더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아서 고개를 젓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씻은 후에 두꺼운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송하견은 내게 목도리까지 둘러 줬다. 내가 송하견보다 옷을 몇 벌은 더 껴입은 채였음에도 그의 눈엔 내가 추워 보이는 듯했다.
“나갈까?”
“네, 이제 가요.”
건물 밖으로 나오니 얼어붙은 날씨에 입김까지 나왔다. 라엔은 텔레포트하기 위해 내 어깨를 감싸고는 자연스럽게 내가 입은 옷에 보온 마법을 걸었다. 고맙다고 말하자 그는 별거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갈 곳은 호숫가예요.”
“거기도 뒤틀린 지역인가요?”
“아니요, 그곳에 이상 현상은 없었어요.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지만요.”
“맞아. 그래도 라엔 형님이 감지 마법을 통해서 확인하셨으니까 균열이 열려 있는 건 확실해.”
“네. 뒤틀린 부분 관련해서는 가서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어요. 이제 텔레포트할게요.”
라엔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람이 몸을 감싸더니 주변이 휙 바뀌었다. 옆에 커다란 호수가 있어 물 냄새가 났고 주변의 앙상한 나무와 말라붙은 풀에는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이번에는 상태 창이 안 뜨네.’
그동안에는 시스템이 늘 지역 이름을 말해 줬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는 것을 보니 라엔의 말처럼 여기는 뒤틀린 지역이 아닐 확률이 컸다.
“…아.”
한 걸음을 딛기가 무섭게 중심을 잃고 휘청이는 몸을 라엔이 단단히 잡아 지탱했다.
“조심해요. 바닥이 얼어 있어서 미끄러워요.”
조심조심 걸었는데도 바닥이 빙판이어서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다시 휘청이자 옆에서 지켜보던 박율이 나를 가뿐하게 안아 들었다.
“잠깐 안을게. 걷기 어려워 보여서.”
부끄럽지만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박율에게 가만히 안겨 가다가 문득 드는 생각이 있어서 그를 콕콕 찔러 귀를 빌려 달라는 표시를 했다.
“그런데 형은 어떻게 그렇게 멀쩡하게 걸어요?”
“응?”
“다른 형들도요. 빙판 위에서 잘 걷게 해 주는 마법 같은 게 있어요?”
“글쎄, 딱히 뭔가 마법을 걸지는 않았어. 그냥 걷다 보니까 익숙해진 거지.”
그래서 그런 마법이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마법이 있으면 나한테 지금 걸어 줄래요? 내가 걸어갈게요.”
“여기만 벗어나면 빙판길이 곧 끝나. 금방 가니까 조금만 이렇게 가자.”
결국 박율은 빙판 위를 잘 걷게 해 주는 마법의 존재 여부를 끝까지 알려 주지 않은 채로 거처까지 나를 안고 갔다.
◇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균열의 처리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어느 늦은 밤, 텐트 안에서 문득 잠에서 깼다. 다들 잠들어 있을 이 시간에 내가 일어나는 일은 흔치 않았으므로 지금이 치료하기 게이지를 비워 낼 절호의 기회였다. 그동안은 자다가 일어날 자신이 없어서 아예 잠들지 않고 있다가 새벽녘에 게이지를 비워 내야 했다.
‘이번에는 치료하기 게이지가 한계까지 찬 건 아니지만.’
그래도 대비해 두는 편이 좋았다. 그간 그랬던 것처럼 익숙하게 겉옷을 걸치고 텐트 밖으로 조용히 나왔다. 그리고 텐트 뒤쪽의 수풀로 들어가는데, 순간 위쪽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이한? 뭐 해요?”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 와중에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애써 침착하게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라엔 형은요?”
“나야 뭐, 별일은 아니에요. 이제 보니 이한을 만나려고 잠이 안 왔나 보네요.”
나무 위에 걸터앉아 있던 라엔이 주변에 떠 있던 종이 같은 것들을 순식간에 갈무리하고는 이쪽으로 훅 내려왔다. 마법을 쓰지 않은 것 같았는데도 안정적인 착지였다.
“그래서 이한은 무슨 일이에요?”
그는 내가 말릴 틈도 없이 자연스레 자기가 입고 있던 로브를 벗어서 내게 걸쳐 줬다.
“괜찮아요, 형이 입고 있어요. 나도 형처럼 그냥 잠이 안 와서 산책이나 할까 싶어 나온 거였어요.”
“벗지 말고 그대로 있어요. 입고 있던 게 체온 때문에 더 따뜻해서 이걸로 걸쳐 준 거예요. 정 신경 쓰이면 나도 새로 하나 걸칠게요.”
그러고선 로브 하나를 소환해서 제 몸에 걸치기까지 하자 더는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가 입고 있던 로브가 그의 온기로 따뜻해져 있어서 좋은 건 맞았으므로 더 사양하지 않고 내 몸에 맞게 제대로 입었다. 라엔은 그런 나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치료하기 게이지는 다음에 비워야겠네.’
라엔의 옆으로 가서 그가 차곡차곡 정리해 둔 상태로 옆에 둥둥 떠 있는 종이를 가리켰다.
“보고 있던 건 뭐예요?”
“지도랑 여러 가지 자료요. 균열이 어디 남아 있는지 살피기도 하고, 많지는 않지만 관련된 자료도 좀 봤어요.”
“이 새벽까지요?”
라엔은 나처럼 자다가 일어난 것도 아닌 듯했다. 이전처럼 불면증이 도졌나 싶어서 걱정이 들었다. 그런 거라면 나는 언제든 그의 옆에서 같이 자 줄 수 있었다. 여전히 내가 그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낮에 바로 출발하려면 지금 준비해야 하니까요.”
“다른 형들은 자는데요. 할 일은 다 끝난 거 아닌가요?”
“준비에 끝은 없어요.”
“설마 다른 형들이 라엔 형만 일하게 하는 건가요?”
내가 장난식으로 묻자 라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절대 아니에요. 그냥 내가 불안해서… 확신이 안 서서요.”
상황은 때때로 위험했다. 마물이 예기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올 때도 있었고 부상을 입는 일도 잦았다. 그렇지만 그건 누군가 부주의하거나 준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냥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라엔의 말이 이어졌다.
“리더 형은 선두에서 가장 큰 위험을 감수해요. 주혁도 방어 마법을 전개하려면 다른 데에 신경 쓸 여념이 없을 테고요. 하견이 공격 마법 보조를 해 주긴 하지만 본질적인 역할은 공격 패턴을 분석해서 돌발 상황에 대비하고 더 효율적으로 전투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거예요.”
“그래서 라엔 형이 책임감을 많이 느끼고 있는 건가요.”
“맞아요. 내가 정신 차리고 빠르게 공격하지 않으면 모두가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요. 실제로 그런 적이 몇 있고요.”
“그건 형 탓이 아니에요.”
“그렇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런 일이 일어났죠. 어쩌면 나는 실력에 비해서 과한 평가를 받고 지나친 기대를 모으는 걸지도 몰라요.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조금이라도 더 준비하고 노력하는 것뿐이에요.”
흔들리는 그의 목소리를 곱씹다가 그의 손을 쥐었다.
“형, 나를 믿나요?”
“…네. 믿어요. 처음 그때부터 말했죠. 당신의 모든 걸 믿겠다고.”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라엔은 성실하게 대답했다.
“나는 형을 믿어요.”
“…….”
“이제 형이 형을 믿을 차례예요. 알아요? 지금까지 계속 형을 보면서 나도 형처럼 믿음직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나를 멍하니 바라봤다. 달빛이 그의 뒤에서 쏟아졌다. 손을 뻗어서 라엔의 뺨을 감쌌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뺨이 붉어 보였다. 아마 날이 추워서겠지. 그렇지만 내 손바닥에 닿은 그의 뺨에서는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신전에서 살 때 기대라는 걸 받아 본 적이 없어요. 기대는커녕 나를 제대로 봐 주는 사람도 없긴 했지만요. 그래서 내가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어요.”
“이한, 그건….”
“그래도 이제 그때 일은 상관없어요. 옆에 형들이 있고, 나는 내가 뭔가를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내가 가볍게 웃자 살짝 창백하게 질렸던 라엔이 그제야 안심한 듯 미소를 띠었다.
“사실 내가 잘 해내야 하는 일이 있어요. 지레 겁먹고 포기하기에는 너무 간절한 일이에요. 그래도 막막하긴 했는데, 신기하게 일단 내가 해낼 수 있다고 무턱대고 믿어 보니까 방법이 하나씩 보이더라고요.”
“다행이네요. 잘해 내야 한다는 일이 뭔지도 궁금한데, 알려 줄 건가요?”
“그건 비밀이에요. 어쨌거나, 그래서 형도 형을 믿었으면 좋겠어요. 형의 능력이나 형 스스로를요. 오히려 그러면 방법이 보일지도 몰라요. 너무 스스로를 혹사하지 마요. 내가 봐 온 형은 충분히 대단하거든요.”
라엔이 내 손 위로 자기 손을 겹치고는 고개를 기대듯이 살짝 기울였다.
“그런 말을 들으면 너무 좋잖아요.”
“전부 진심이에요. 더 노력하지 않아도, 지금 그대로의 형을 믿고 있고 좋아하고 있어요.”
“……고마워요. 이 늦은 시간까지 이한이 나를 달래 주기만 했네요. 이제 내가 달래 줄 차례예요. 자러 갈까요?”
“형, 오늘도 잠들기가 어려운 거면 옆에서 같이 자요.”
“아니요, 괜찮아요. 이한이 잠드는 것만 보고 갈게요.”
나를 텐트 안에 들여다 눕혀 놓고 자기는 옆쪽에 앉아 있으려는 라엔의 소매를 쥐었다. 잠들 수 없어서 이 늦은 시간까지 깨어 있던 걸 뻔히 아는데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같이 안 누워 줄 거예요? 라엔 형.”
부러 간절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러나 들려온 건 예상과는 달리 세차게 흔들리는 목소리였다.
“내가 아까 이한에게서 그런 말을 듣고선… 어떻게 바로 옆에서 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