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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43화 (143/150)

143화.

잠들기 아쉬우니까

“안 다쳤어요. 그냥 놀라서요. 잡아 줘서 고마워요.”

라엔은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이 가볍게 웃더니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먼저 내려가서 손잡아 주려고 했는데 그새 발을 헛디뎠네요. 처음부터 이렇게 안고 내려올 걸 그랬나 봐요.”

“그건…. 다음에는 조심해서 내려올게요.”

“그래요. 그래도 항상 한 발자국 앞에서 잡아 줄 테니까 너무 긴장하지는 말아요.”

“…고마워요.”

기분이 간질간질해서 괜히 말을 흐리며 라엔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윤재영이 말했던 비석은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가 배를 정박한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모래사장에서였다. 그 비석에 손을 대고 속삭였다.

“행복할게요.”

순간 센 바람이 내 몸을 감싸며 스쳐 지나갔다. 쏴아, 하는 시원한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물이 힘차게 밀려왔다가 부드럽게 흩어지는 묘한 소리였다.

“됐다. 파도 소리가 제대로 들리는 걸 보니까 이 지역의 뒤틀린 부분이 원래대로 돌아왔네. 고생했어.”

“…….”

“이한아?”

“이게 파도 소리예요?”

“맞아. 이한이는 처음 듣겠구나.”

“네. 소리가 시원하고 좋아요.”

어둡게 물든 밤바다를 멍하니 바라봤다. 연한 달빛이 비치는 파도가 부서지며 선명한 물보라를 만들어 냈다. 박율은 가볍게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들기고는 먼저 간 송하견과 라엔을 따라 함께 잠자리를 만들러 갔다.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다.”

바로 옆에서 나지막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끝이 없어 보이는 새까만 바다를 눈에 담느라 민주혁이 내 옆에 다가왔다는 것도 그제야 알아챘다. 그가 키득대며 말을 이었다.

“네가 좋아할 줄 알았어.”

“응. 여기가 조용해서 파도치는 소리가 더 잘 들리는 것 같아.”

“그래도 이건 여행으로 치지 말자.”

“어?”

“나중에 나랑 바다로 여행 가기로 했잖아. 너 설마 벌써 잊은 건 아니지.”

이 지역으로 처음 왔을 때 민주혁이 그런 얘기를 스치듯이 했던 일이 기억났다.

“안 잊었어. 그래도 난 지금 이걸로도 충분한데.”

“내가 안 충분해.”

“그럼 어떻게 해야 만족할 건데?”

“음, 너랑 둘이서만 가면?”

민주혁은 여러 사람보다는 한 사람과 소소하게 여행하는 걸 더 좋아하는 성향이구나.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나랑만 가면 재미없을걸. 내가 지금까지 신전에서만 살아서 아는 게 많이 없으니까 답답할 거야. 공부는 해 보겠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테니까.”

“내가 옆에서 다 알려 줄 텐데 뭐가 걱정이야.”

“그렇다면 고맙지만, 내가 체력이 없어서 여러 군데 다니지도 못할 거야. 물론 이것도 노력하겠지만….”

“그건 노력할 필요 없어.”

민주혁이 내 말을 재빠르게 끊고는 말을 이었다.

“널 위해서… 음, 아니, 그냥 같이 즐기려고 가는 거잖아. 네가 힘들면 무슨 소용이야. 푹 쉬면서 컨디션 괜찮을 때만 여유롭게 돌아다니면 되지. 그런 것도 다 낭만이잖아?”

“왜 그렇게 하면서까지 나랑 여행 가고 싶어 해?”

“너라서 의미 있는 거니까. 왜, 선이한. 너는 싫어?”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내 얼굴을 살피는 그에게서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어쩐지 간절해 보이기도 했다. 내가 아니라 형들한테 부탁해 보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이러면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도 민주혁과 둘이서 여행을 가는 게 당연히 싫지 않았다. 좋다고 확답하고 싶었지만 나중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르니 조금 망설여졌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고 싶지는 않은데.

“누가 싫대? 네가 힘들까 봐 그랬지.”

“뭐? 그럴 리가. 내가 너 때문에 힘들어할 일은 없어. 너는 쓸데없는 걱정이 너무 많아.”

“그럼 됐어. 너랑 여행 간다면 나야 좋지. 기회가 된다면 꼭 가자.”

“약속한 거다.”

민주혁은 이런 모호한 대답으로도 만족한 듯 보였다.

‘다행이다.’

기회가 된다면 당연히 갈 수 있었다. 기회가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었고. 말장난이나 다름없었지만 적어도 거짓을 말한 건 아니었다며 스스로 조금 위안을 얻었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자각하고선 허탈해져서 웃음이 나왔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말을 아끼던 박율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내 마지막 순간이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건 생각보다 더 비참한 일인 것 같았다. 박율은 용사로 선택받은 순간부터 그런 마음으로 살아왔을 테고.

문득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 같아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바닷가의 찬 공기가 순식간에 폐에 가득 들어차자 기침이 나왔다.

“들어가자. 더 있다간 감기 걸리겠다.”

민주혁의 손을 잡고 바다에서 멀어져 텐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를 돌아봤을 때 밤에 잠긴 바다는 여전히 어두웠고 둥근 달만이 빛을 내고 있었다.

텐트에 누운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끊임없이 귓가에 울렸다. 거슬리는 건 아니었지만 그 소리를 들으면서 잠들기에는 아직 적응되지 않은 것 같았다.

눈만 깜빡이며 누워 있기보다는 해안가를 따라서 산책이나 할 요량으로 텐트 밖으로 나왔다. 온통 고요한 와중에 모래사장이 사박거리는 소리를 내며 밟혔다. 근처의 나무에 기대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누군가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이 안 와?”

“아마도요. 율이 형은요?”

박율의 옆에 자연스레 다가가 앉았다. 그는 담요를 하나 소환해서는 내 어깨에 자연스레 둘러 주고는 열을 재듯이 내 이마에 손을 살짝 올렸다가 뗐다. 목덜미에도 손을 짚어 본 그는 그제야 내 말을 믿는 듯했다.

“밤이라서 추워.”

“고마워요.”

그는 잠깐을 말없이 바다만 바라봤다. 박율의 옆에 있어서인지 마음이 편해져 몸이 노곤하게 풀어지는 것 같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정신이 말똥했는데. 박율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대자 그는 내가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자세를 조금 바꿨다.

그의 호흡에 몸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작은 움직임을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제는 파도치는 소리가 그렇게 크게 들리지 않았다. 내 심장이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뛰는 소리만이 귓가에서 흐릿하게 울렸다.

“형은 잠들기 아쉬워서 나와 있었어. 언제 또 바닷가에서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 모르잖아. 이런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기억해 두려고.”

느릿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는 나를 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민주혁이 같이 여행을 가자고 하더라고요. 둘이서요.”

“그랬구나.”

“확실히 둘이서만 여행을 가면 둘만의 기억도 늘어날 것 같아요.”

괜히 긴장되는 마음에 침을 꼴깍 삼키고 말을 이었다.

“형, 다음에는 우리 둘이서 바다에 와요.”

어둠 속에서 내게로 오롯이 향한 연둣빛 눈동자, 그리고 그 빛과 같은 색의 보석이 달린 초커까지. 달빛마저 그에게로 온전히 쏟아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가 사르르 웃었다.

“이한이가 옆에 있어서 더 소중한 시간이 되겠네.”

“…나한테도 그래요. 형이 있어서요.”

“이제 슬슬 잠이 오나 보다. 편하게 자. 형이 안아서 텐트 안에 눕혀 줄게.”

“…….”

하고픈 말은 많았지만 막상 꺼내려고 하니 말문이 막혔다. 내가 그의 운명을 틀기 위해 어떤 일을 하려는지를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고, 그에게 무턱대고 더 먼 미래를 생각해 달라는 건 잔인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아까 깨달았으니 그 말도 할 수 없었다.

눈을 감고 박율에게 완전히 몸을 맡기며 기댔다. 내가 꽤 무거웠을 텐데도 그는 안정적으로 나를 지탱했다. 언젠가 나도 그에게 이런 존재가 될 수 있을까. 그를 내게 기대게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나도 이 시간을 기억할 거예요. 지금까지 형이랑 있었던 모든 순간도요.”

내가 정말 하고픈 말은 이거였는지도 모른다. 박율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쩌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가 수면제라도 되는 것처럼 잠이 쏟아졌다. 그렇게 그의 옆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잠들었다.

다음 날 해가 뜨고 나서 곧바로 배를 타고 육지로 돌아왔다.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기에 배를 반납한 후 텔레포트를 써서 레데오에 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레데오에 오랜만에 오네요.”

“그렇네. 피곤할 테니까 푹 쉬자. 곧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해서 오래 머무르지는 못하겠지만 피로를 풀 시간은 충분할 거야.”

“거기가 마지막 장소라고 했었지.”

“맞습니다. 이제 균열이 열린 지역이 그 한 곳만 남았으니 고지가 코앞입니다.”

송하견과 민주혁의 말을 듣던 라엔이 잠깐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올해가 가는 것도 머지않았네요.”

박율의 얼굴을 슬쩍 올려다보았으나 그는 표정 변화 없이 여전히 부드러운 웃음을 그린 채였다. 라엔이 짤막하게 덧붙였다.

“리더 형의 용사 임기도 얼마 남지 않았고요.”

“응. 그때까지 조금만 더 힘내자.”

“…그래요.”

잠깐의 침묵 끝에 대답한 라엔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 있었다.

‘라엔 형도 선택받은 용사가 마지막 순간에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는 건가?’

박율이 먼저 말하지는 않았을 테니, 그가 스스로 알아낸 것일 터였다. 이어질 라엔의 말에 신경을 곤두세웠으나 그가 말을 삼키곤 그 주제를 더 이상 이어 나가지 않았기에 확인할 길은 없었다.

한동안 발길이 닿지 않아 먼지가 내려앉아 있던 레데오는 용사들의 마법 몇 번 만에 순식간에 깨끗해졌다. 그럼에도 송하견의 방에 은은하게 배어 있던 약초 향기는 그대로였다.

“형 방에서 나는 약초 향은 그대로네요. 신기해요.”

“그래? 나는 잘 모르겠는데.”

“정말요? 형 방에서 처음부터 줄곧 나던 향이었는데. 지금도 선명해요.”

“그런 거라면 방에 있는 약초 주머니 때문일 수도 있어. 나는 익숙해져서 안 느껴지는 것일 테고.”

“그렇구나. 형한테서도 비슷한 향이 나요.”

송하견은 자기 팔목을 코에 가져다 대 보더니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자기 체취를 자기가 맡을 수 있을 리가 없지. 내가 키득 웃자 그가 내 쪽으로 몸을 숙이고는 목 부근이 보이도록 입고 있는 옷을 아래로 조금 잡아당겼다.

“지금도?”

얼굴을 가까이하고 숨을 깊게 들이쉬자 송하견이 잠깐 몸을 굳히는 것 같았다.

“네. 항상 좋은 향이 나요.”

“…좋아?”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가만히 생각하더니 옷의 단추를 천천히 하나씩 풀었다. 뭘 하는 건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가 단추를 세 개쯤 풀었을 때가 되어서야 황급히 그의 손을 붙잡았다.

“뭐 해요?”

“옷 벗어 주려고.”

“…그러니까 갑자기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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