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고대 문자는 신과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었다. 적힌 숫자들은 책의 페이지였다. 각 페이지를 찢어서 손에 모아 쥔 다음에 신력을 불어넣으면 됐다. 신력을 불어넣는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많이 해 봤으니까.’
예전에 미래시 퀘스트를 할 때처럼 피를 내서 적시면 됐다. 책에서 하라는 대로 종이를 찢어서 쥔 다음에 칼을 집어 들었다. 조금 망설이다가 눈에 잘 띄지 않는 팔뚝 안쪽으로 칼을 댔다.
팔을 긋는 게 이전과 달리 새삼스럽게 망설여지는 이유는 아마도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라고 몇 번이고 말했던 용사들의 목소리가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야.’
따뜻한 핏방울이 팔뚝을 타고 흘러내리는 감각이 생생했다. 종이가 서서히 붉게 물들어 갔다.
왜 이런 유용한 책이 신전에 방문했을 당시에 갑자기 내 눈에 띄었는가를 따져 볼 필요는 없었다. 신의 안배이거나, 우연이거나, 운명이거나. 그중 하나일 것이다.
어쨌거나 기회는 일단 잡고 봐야 했다. 나는 바닷속에서 이전의 선택받은 용사의 노트를 보고 나서부터 고민하던 것이 있었고, 신에게 그것에 대한 답을 얻어야 했다.
피가 종이를 다 적시고 더 이상 스며들 곳이 없어서 땅바닥으로 원을 그리며 톡 떨어졌다. 그제야 파란 빛무리가 주위로 번지며 노트를 좀먹어 갔다. 어느 순간 시야가 깜깜해졌다.
【아이야.】
익숙한 음성에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눈가를 비비다가 눈알을 찌르고 나서야 내가 눈을 뜨고 있다는 걸 제대로 인식했다. 빛 한 점조차 없어서 그런지 기이한 부유감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나를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단다. 분명 한참은 걸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신전에서 이 책을 가져왔다는 걸 알았나 봐요. 역시 당신의 안배였나요?”
【마음대로 생각하렴. 이 공간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으니 본론부터 말하려무나. 무엇이 필요하느냐? 정해져 있는 답을 네게 말해 줄 수는 있으나 내가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는 없단다.】
“내가 율이 형의 심장을 찔러야만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했죠. 그 이유를 말해 주세요.”
【네게 전한 나의 힘이 선택받은 용사의 검을 매개로 작용하기 때문이란다. 선택받은 용사가 스스로의 심장을 찌르면 몸에 쌓인 마기가 세상으로 다시 흩뿌려지게 되지. 그러나 나의 힘을 가진 네가 찌르면 그 마기를 본질적으로 정화할 수 있단다.】
“그게 꼭 심장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모든 힘이 심장으로 모이기 때문이란다. 마나도 마기도 마찬가지지.】
“…신력도요?”
【그렇단다.】
큰 수확이었다. 내가 얻고자 했던 답도 얻었고, 박율을 희생시키지 않을 수 있는 방법도 어렴풋이 떠올랐으니까. 점차 공간에서 의식이 멀어져 가는 게 느껴졌다.
“전에 신전에서도 같은 걸 물어봤었는데 그때는 때가 안 되어서 말해 줄 수 없다고 했었잖아요. 지금은 답을 내어 주는 것을 보니 때가 되었나 봐요.”
【끝이 보이기 때문이란다.】
“…당신이 본 것과는 다른 끝일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공간과 연결되었던 의식이 완전히 끊겼다. 시야가 점차 돌아왔다. 나는 아까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손에 들려 있던 피에 젖은 종이는 다 흩어져 사라진 채였다.
창밖을 보니 다행히도 시간이 많이 지나 있지는 않았다. 붕대를 꺼내서 팔뚝의 상처에 대강 묶었다가 잠깐 고민한 후에 다시 풀어냈다. 그리고 용사들이 가르쳐 줬던 대로 상처를 소독하고 약도 바른 후에 다시 제대로 묶어 뒀다.
‘올해도 얼마 안 남았네.’
박율의 미래를 그려 봤다. 시간은 빠르고, 박율의 퀘스트는 아직 성공하지 못한 채였다. 그렇지만 내가 그를 포기하지 않았으니 운명은 이미 바뀌기 시작했을 것이다.
◇
세 번째 균열을 마무리하러 떠날 때, 한참을 고민하던 용사들은 나를 데려가기로 마음먹었다. 두 번째 균열을 처리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을 때처럼 내게 혹시라도 무슨 문제가 생기진 않을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짐은 다 정리했나요?”
“네. 아까 정리 다 하고 인사할 때 진 씨가 쿠키도 줬어요.”
라엔에게 대답하며 조그만 쿠키를 하나 더 먹었다. 안에는 블루베리 잼이 들어 있었다. 아까는 사과 잼이었는데. 물론 둘 다 맛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라엔은 배를 타기 전엔 아무것도 안 먹는다고 했으니까 줄 수가 없었고, 박율과 민주혁은 출발하기 전에 먼저 배에 올라서 상태를 점검하고 있었다. 옆에 있는 송하견이 아까부터 이쪽을 흘끗대기에 그에게 쿠키를 내밀자 그가 고개를 살짝 숙여 쿠키를 이로 물었다.
“…달아.”
“쿠키니까요. 생각해 보니까 형 단것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았나요?”
“응. 기억하고 있었네.”
“그러면 싫다고 하지 왜 그냥 먹었어요….”
“지금은 안 싫었어. 네가 주는 거니까.”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나는 하견 형이 계속 보고 있길래 먹고 싶어 하는 줄 알았어요.”
“……너를?”
“네?”
“쿠키 말고 너를 보고 있던 건데.”
“……이제 우리도 배에 올라요. 리더 형과 주혁도 마무리된 것 같네요.”
송하견의 말을 멍하니 생각하는데 라엔이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자연스레 나를 이끄는 라엔을 따라 배에 올라가니 시야가 높아져서 저쪽 멀리에 방금 떠나온 도시가 보였다.
‘균열을 닫고 나서 배를 반납한 후에 레데오로 곧장 돌아갈 거라고 했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여관방에 있는 짐도 모두 정리한 뒤였다.
윤진은 나와 종종 밥도 같이 먹고 상점가도 둘러보곤 했기에 그새 정이 들었는지 떠날 거라는 말을 듣고는 무척 아쉬워하며 갓 구웠다던 쿠키를 챙겨 줬다. 그리고 윤재영은 나를 따로 불렀었다.
-왜요? 할 말 있어요?
-네. 건강하라고요.
-아…. 네, 그렇죠. 건강해야죠. 잘 쉬다가 가요.
-그래요. 그리고 포기하지 않으면 방법은 항상 있더라고요. 뭐, 내가 이한 씨 사정을 자세히 몰라서 함부로 말하긴 그렇지만….
-무슨 뜻인지 알아요. 상대방이 포기했더라도 내가 포기하지 않으면 되는 거잖아요. 내가 놓지 않으면 어떻게든 바꿀 수 있는 거니까요.
-의사가 이한 씨를 포기…한다고 했나요? 당장 다른 의사를 찾아요. 그렇게 함부로 진단하다니 안 봐도 돌팔이네. 어쨌거나 이한 씨, 좋은 마음가짐이에요. 일찌감치 손 놓고 포기하는 건 아깝잖아요.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도움이 됐어요, 고마워요.
-그래요, 잘 지내요. 일행들이 이한 씨 생각을 들으면 좋아하겠어요. 다들 이한 씨에게 그렇게 안달하는데 오래 붙어 있어야죠. 혹시라도 좋은 소식 있으면 편지하고요.
-무슨 좋은 소식이요?
-내가 보석 상점에서 일하는 거 잊은 건 아니죠? 혹시 보석이 박힌 반지라든가, 그런 중요한 걸 선물 받으면 보석 감정을 해 보고 싶어질 수도 있잖아요.
-…….
-박율 씨가 여관비로 지불했던 보석 품질을 생각해 보면 감정은 필요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한 씨가 그런 걸 안 따질 것 같긴 한데…. 그래도 궁금하면 몰래 살짝 봐 줄게요.
-괜찮아요, 성의만 받을게요.
윤재영과 헤어지는 것도 아쉬울 뻔했으나 마지막까지 실없는 말을 하는 걸 보고는 아쉬움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배를 타고 몇 시간이 지나 드디어 균열이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용사들이 바다라는 불리한 조건에서 어떻게 마물을 처리하는 건지 걱정이 됐는데, 그들은 마법을 써서 허공에 뜬 채 육지에서 싸울 때처럼 마물을 공격했다. 물론 육지에서 싸울 때보다 부상이 더 잦긴 했다.
이번에는 마물을 처리하고 균열을 닫는 데 이틀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전과 비교해 본다면 확연히 빠른 속도였다.
“이한이가 계속 치료해 준 덕분에 이번에는 처리하기가 더 수월했네. 고마워.”
“그것도 이유가 될 수 있긴 하지만, 형들이 서두르는 것 같기도 했어요. 혹시 내가 위험한 곳까지 따라온 게 신경 쓰여서 무리한 건 아닌가요?”
“야, 무리는 네가 했지. 새벽에 혼자 피 게워 내고 있었다는 거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건 잠깐이었어. 금방 괜찮아지기도 했고. 그땐 고마웠어요, 율이 형. 하견 형도요.”
민주혁이 말하는 건 새벽에 내가 치료하기 게이지를 비워 내던 걸 들킨 일이었다. 치료하는 빈도가 높아지니 게이지를 비워 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배 안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그걸 완벽하게 숨기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내 부재를 알아챈 박율이 배의 가장 구석에 있는 화장실에서 피를 토하고 있던 나를 찾아냈다. 그리고 각혈이 멎을 때까지 옆에서 내 등을 쓸어 주며 상태를 확인했다. 송하견이 언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곧바로 여러 가지 약을 만들어 줬다.
‘나 때문에 새벽에 제대로 잠들지도 못했을 텐데.’
미안한 마음이 컸다.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박율과 송하견은 밤새 내 곁을 지켰다.
“네가 괜찮으니 다행이지.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박율이 나와 시선을 맞추며 눈을 접어 웃었다. 옆에서 송하견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저번에 윤재영 씨가 비석 위치를 알려 줬다고 하지 않았어?”
“네, 맞아요.”
윤재영이 내가 각혈하는 걸 알게 된 이후 그는 허구한 날 나를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나서 윤재영에게 이 지역에 비석 비슷한 것이 있는지 물어봤었다. 윤재영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지도의 한 부분을 짚었다.
-비석 비슷한 거라면 들은 적이 있어요. 바다에 작은 섬들이 있는데 그중 한 곳에 있다고 알아요. 아마 여기가 맞을 거예요.
-고마워요.
-그런데 여기가 관광 명소인 것도 아니고 이 지역 토박이들 몇몇만 알고 있는 건데 이한 씨가 그걸 어떻게 알죠? 신전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뭐, 비슷해요.
-오… 그런 거였구나….
윤재영은 그제야 뭔가 의문이 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윤재영이 짚었던 곳을 신중하게 떠올려 보고, 옆에서 라엔이 펼쳐 든 지도의 한 부분을 짚었다.
“이 부근에 있는 섬이었어요.”
“여기서 멀지는 않네요.”
“음, 그런데 배를 타고 가야 하니까, 거기 도착하고 나면 해가 완전히 질 거야.”
“텔레포트로 다녀오는 건 어렵겠네요. 누군가는 배에 마나를 계속 공급하고 있어야 하고, 돌발 상황이 일어날 수 있으니 갈라지는 건 위험하니까요.”
“아예 섬에서 밤을 보내고 내일 출발하는 건?”
“그게 낫겠다. 이한이랑 라엔이도 출렁이는 배 위에서 자는 것보다는 육지가 편할 테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뱃머리가 섬 쪽으로 돌아갔다. 박율의 말대로 섬에 도착하고 나니 해가 완전히 져서 주위가 어두웠다.
배에서 내리다가 발을 삐끗해서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생각보다 경사가 가팔랐다. 이대로 바닥에 구르면 조금 부끄러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꾹 감았다. 그러나 떨어지는 나를 아래에서 덥석 안 듯이 받아 내며 단단히 지탱해 오는 손길이 있었다.
“괜찮아요?”
맞닿은 가슴에서 심장 고동이 느껴졌다. 그도 나 못지않게 놀란 듯했다. 눈을 슬쩍 뜨자마자 걱정스러운 라엔의 눈동자를 코앞에서 마주했다.
“왜 그래요? 어디 다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