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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41화 (141/150)
  • 141화.

    기대했어

    “뭐가요? …아.”

    멍한 정신으로 박율이 뭘 물어보는 건지 생각하다가, 그의 손끝이 닿은 위치가 내 목 부근이라는 것을 상기하고는 그제야 깨달았다. 민주혁이 이로 물었던 곳이구나.

    ‘그렇게 세게 물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시스템 때문에 고통을 느낄 수 없어서 알지 못한 것뿐이지 잇자국이 남을 정도의 세기였을지도 모른다. 혹은 내가 피부가 약한 편이어서 멍이라도 들었거나.

    옷이 흐트러져서 자국이 보이는 것일 테니 옷을 바로 끌어 올리려다가, 이미 박율이 보기도 했고 굳이 숨길 필요도 없는 것 같아서 관뒀다. 지탱하기 힘든 몸을 박율에게 살짝 기대며 말을 이었다.

    “민주혁한테 갔다 왔는데 걔가 장난치다가 그런 거예요.”

    “장난…. 그렇구나.”

    박율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아 있는 듯해서 혹시 그가 오해했나 싶어 말을 덧붙였다.

    “별거 아니었어요. 싸운 것도 아니고요.”

    “…그래, 알아.”

    “형이 지금 만지고 있는 부분에 자국이 심하게 남아 있나요? 그래도 전혀 아프지는 않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어딘가 생각에 잠긴 듯한 박율의 얼굴을 살피며 말하자 그가 금방 표정을 풀고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었다.

    “응, 지금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지. 일단 열 떨어뜨리게 약 먹자.”

    “고마워요. 주세요, 내가 마실게요.”

    “무리하지 않아도 돼. 형이 먹여 줄 테니까 아, 해 봐.”

    박율에게 소환한 약을 달라고 손을 뻗었으나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거절하며 내 턱을 가볍게 쥐어 살짝 들어 올렸다. 문득 약을 먹여 줘야 한다는 이유로 길게 이어졌던 입맞춤이 떠올라 얼굴에 화르륵 불이 붙는 듯했다.

    그때를 생각하기만 해도 얼굴이 이 정도로 뜨거워지는데, 이번에 다시 박율이 입을 맞춰 온다면 열을 떨어뜨린다는 약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진정되지 않는 마음으로 다급하게 목소리를 냈다.

    “약 내가 삼킬 수 있어요!”

    “응?”

    “그러니까….”

    균열 안에서 내가 그에게 약을 먹여 줬을 때의 입맞춤은 왠지 말로 꺼내기가 부끄러웠다. 송하견의 중독 증상을 가져온 후 박율이 내게 물을 먹여 준 일은 이제는 꿈이 아니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니 그 얘기를 꺼내도 될 듯싶었다.

    “그, 저번에 내가 물을 제대로 못 삼켰을 때, 형이 직접… 나한테 먹여 준 적이 있잖아요.”

    막상 입을 떼고 보니 그 일을 꺼내는 것도 부끄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잠깐 갸웃하던 박율은 내가 더듬더듬 말을 마치고 나서야 뭔가 깨달은 표정으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래서, 이번에는 그렇게 안 해도 된다는 말이었어요.”

    열 때문에 멍한 정신으로 뒤늦게 괜한 말을 꺼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말하고 난 후였다. 박율이 가볍게 웃으며 약병을 내 손에 쥐여줬다.

    “사실 입에 갖다 대 주기만 하려고 한 거였어. 몸도 제대로 못 가눌 정도니까 직접 마시기 어려울 것 같아서.”

    “그…렇구나. 근데 정말 괜찮아요. 혼자 마실 수 있어요.”

    민망함에 빨리 약을 마시고 그를 돌려보내기 위해 약병을 들어 올렸다.

    “아.”

    손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약병을 순식간에 놓쳤다. 손안에서 미끄러져 떨어지는 약병을 박율이 재빨리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이불이 흠뻑 젖었을 터였다.

    “봐, 힘들잖아. 형이 도와줄게.”

    “…네, 고마워요.”

    민망함에 어물어물 말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가 아까처럼 내 턱을 부드럽게 들어 올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긴장해서 몸을 굳히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그는 웃으며 약병을 입에 가져다 대 주고 물약을 조금씩 흘려 넣었다.

    “기대했어? 이렇게 말고 다른 방법으로 도와준다는 걸까 봐.”

    “큽, 콜록, 콜록.”

    “이런, 잘못 삼켰나 보다.”

    내 등을 찬찬히 두들겨 주는 박율을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봤다. 지금 누가 한 말 때문에 사레들린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기대까지 한 적은 없었다. 그냥 조금…. 어쨌거나 이건 내가 괜히 오해한 게 아니라 박율이 처음부터 말을 불명확하게 한 탓이었다.

    ‘아쉬운 건가?’

    아니, 그럴 리가. 문득 떠오른 생각을 재빨리 지워 냈다. 그냥 조금 신경이 쓰였을 뿐이다.

    “천천히 마셔. 다 마셨으면 물도 마시자.”

    약도 물도 다 마셨으니 박율이 이제 제 방으로 갈까 싶었는데 그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고는 뜬금없는 말을 뱉었다.

    “다른 핑계 같은 거 안 대도 괜찮아.”

    “네?”

    “하고 싶으면 하고 싶다고 말해.”

    장난스럽게 웃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매끄럽게 호선을 그린 그의 입술에 시선이 닿았다. 내가 ‘지금 그런 뜻으로 말하는 게 맞아요?’ 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음에도 그는 의뭉스러운 웃음만 그린 채였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하면 하려고요?”

    “응.”

    “싫다고 하면 안 할 거예요?”

    “으음….”

    고민할 지점이 거기가 아니지 않나. 이런 태도를 보니 아무래도 박율은 처음부터 나를 놀릴 생각이었던 게 분명했다.

    “네가 싫다고 한다면 좋아하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지.”

    “기다린 적 없잖아요. 저번에도 형이 먼저….”

    잠깐, 생각해 보니 박율이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가 그렇게 하는 게 싫지 않았으니까.

    내가 거부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지 기민하게 살폈던 박율이었다. 분명 내가 싫어하는 기색이 전혀 없고 오히려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세차게 뛰어서 어쩔 줄 몰라 했던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부끄러움에 말을 돌렸다.

    “어쨌든 다행이네요. 싫지 않았거든요.”

    “싫지 않다는 말보다는 좋다는 말이 더 듣고 싶은데.”

    오늘의 박율은 평소의 담백한 모습과는 다르게 왠지 좀 더 끈질겼다. 약 기운이 슬슬 돌기 시작하는지 잠들기 전처럼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장난을 적당히 그만둘 생각이 없어 보이는 박율 때문인지 나도 평소와 다르게 장난기가 일었다.

    “꼭 말해야 알아요?”

    팔을 뻗어서 그의 목덜미를 감쌌다. 박율은 내가 뭘 하려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이끄는 대로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그대로 눈을 꾹 감고 그에게 입을 맞췄다. 박율과는 달리 나는 요령이 없었기에 생각보다 세게 부딪힌 것 같았다. 나야 당연히 아프진 않지만 혹시 박율은 아팠으려나 싶어 감았던 눈을 슬쩍 떴다.

    내게로 시선을 고정하고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박율과 눈이 마주쳤다.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그의 당황이 여실히 느껴졌다. 장난은 성공했지만 어쩐지 민망한 마음이 들어 실없이 웃으며 몸을 물렸다. 그러나 박율은 내가 물러난 만큼 훌쩍 가까워졌다.

    “그렇네. 말 안 해도 알아.”

    열이 오른 내 목덜미를 감싸는 손이 시원했다. 그는 고개를 기울여서 내 입술 위로 부드럽게 입을 맞댔다. 아까 내가 했던 것과 비교도 안 될 만큼 능숙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더니 그는 자연스럽게 내 입 안을 침범해 왔다.

    “하아… 형, 숨, 흐읏….”

    숨이 달떴다. 그렇지 않아도 열 때문에 숨쉬기가 벅찬 느낌이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박율도 내 상황을 알기에 지난번처럼 농밀하고 깊숙하게 움직이지 않으려 조절하는 것 같았지만, 그런 절제된 움직임이 왠지 더 간질거리는 듯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박율은 몇 번을 입을 떼서 내가 숨 쉴 틈을 주었다. 그럼에도 결국 숨이 모자라서 머리가 핑핑 도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을 때 그는 어떻게 알았는지 입을 완전히 떼어 냈다.

    “허억, 헉, 흐으….”

    “많이 힘들었어?”

    내가 한참을 숨을 고르자 박율은 내 입가를 닦아 내 주다 말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열이 더 오르진 않았는지 내 이마를 짚어 보기도 했다. 그는 아쉬워했다. 나를 위해서 그만뒀다는 기색을 완전히 숨긴 듯했지만, 나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박율이 이런 식으로 자신보다 나를 먼저 생각한다면, 나도 나보다 그를 먼저 생각해 주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숨이 찰 뿐이지 전혀 힘들지 않았고 오히려… 좋았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박율이 좋다는걸.

    고개를 가볍게 젓고 할 수 있는 한 환하게 웃었다.

    “아까는 말 안 해도 안다면서요. 좋았….”

    그가 손바닥으로 내 입을 막아서 말을 멈췄다.

    “지금은, 말하지 마. 이한아. 형이 정말 많이… 참고 있거든. 그러니까.”

    뚝뚝 끊기는 목소리였다. 내 얼굴을 못 보겠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여 이마를 내 어깨에 기댄 채여서 그의 표정을 살필 수는 없었지만 그가 노력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율이 형도 부끄러웠구나.’

    아까는 전혀 그런 기색 없이 능숙하기만 하더니. 어쨌거나 거기서 좋다는 말을 들으면 더 부끄러울 테니까. 박율이 말한 것처럼 입을 다물고 다 이해한다는 마음을 전하려 그를 껴안으니 탄탄히 잡힌 등 근육이 느껴졌다. 그 상태로 등을 가만히 다독이자 그가 몸을 굳혔다.

    “…이한아.”

    한숨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율은 한참을 말없이 나를 더 힘주어 끌어안고 있더니 고개를 살짝 들어서 내 목 부근에 입을 가져다 댔다. 더운 숨이 간지러웠다.

    “아야. 율이 형?”

    눈물이 핑 돌았다. 시스템 때문에 아픈 건 아니었지만 감각이 예민해져 있어서인지 느낌이 이상했다. 민주혁도 그렇고 박율도 뭐가 좋다고 남의 살을 그렇게 잘근잘근 무는 거야. 게다가 박율은 살을 빨아 들이기까지 했다.

    “형, 거기에는 자국 남아요.”

    “응…. 알아.”

    박율은 대답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듯 곧장 내게서 몸을 떼어 내고는 마른세수를 했다.

    “미안.”

    “뭐가요?”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까 입 맞췄던 얘기를 다시 꺼내는 건가 싶어서 양손으로 그의 뺨을 찰싹 소리가 나게 감쌌다. 아까 박율은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이렇게 계속 걱정할 거라면 확실하게 말해 두는 편이 나았다.

    “좋았어요.”

    「<힐러가 도울게요!> 치료하기, 성공!」

    손이 닿은 김에 치료까지 하고 나자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키득 웃자 박율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다가 겨우 ‘그래.’ 하고 한 마디를 뱉고는 이제 잘 때가 됐다며 나를 침대에 눕혔다.

    “잘 자.”

    내 몸 상태를 지켜보다가 갈 거라며 침대 옆의 의자에 가만히 앉은 그를 올려다봤다. 평소처럼 여유로워 보이는 박율의 얼굴을 뜯어보다가 아까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쩐지 마음이 간질간질해져서 빨리 잠들기 위해 눈을 꾹 감았다.

    다음 날 거울 앞에 서서 목 부근에 선명하게 남은 자국을 봤을 때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옷으로 잘 가리면 가려지는 위치여서 다행이었다. 물론 그 부근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던 민주혁에게는 들킬 수밖에 없었지만.

    “내가 이렇게까지 했다고?”

    “어.”

    “아닌데. 나 진짜 살살 했잖아. 아니야?”

    “살살 물긴 했지. 내 피부가 약해서 그런가 봐.”

    “야, 이거 진짜 어떡하냐. 안 아파?”

    바를 만한 연고가 있는지 신중하게 고민하는 민주혁의 모습을 보고 이제 그만 놀려야겠다 싶었다.

    “됐어, 안 아파. 그리고 너 혼자 그런 거 아냐.”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그렇게 넘어갈 생각이었는데 민주혁은 포기할 생각도 없이 끈질기게 물어봤다. 대강 ‘율이 형도 너랑 비슷한 행동을 하더라.’ 말하니 그는 착잡한 얼굴로 말을 하려다 말고를 반복했다.

    “형님이 왜…. 아니, 너는 형님이 그런다고 그냥…. 하긴 내가 그랬을 때도 그냥 있긴 하던데. 하, 아니 그래도.”

    그렇게 혼잣말인지 내게 하는 말인지 분간이 안 가는 몇 마디를 더 중얼거리던 그는 생각이 다 정리됐는지 양손으로 내 어깨를 턱 짚었다.

    “그거, 앞으로 아무한테나 허락하지 마.”

    “네가 맘대로 깨물었던 거잖아.”

    “아무튼.”

    “어차피 너나 율이 형이 아무나인 것도 아니고.”

    “너는 진짜….”

    민주혁은 한참 고민하더니 뭘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입을 다물고 한숨을 푹 쉬었다.

    “쓰리거나 아프면 말해. 연고라도 있나 찾아볼 테니까.”

    “하나도 안 아파. 그래도 고마워.”

    그는 목 부근의 자국이 안 보이도록 내 옷매무새를 다시 잘 정돈해 주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

    다들 이후로 마지막 균열을 처리하러 한동안 다시 낮에 자리를 비웠다. 나는 그간 고대 문자를 해독하는 걸 마쳤다. 그건 신전이 아닌 곳에서 신과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이 적힌 문자였다. 일회성이기는 했지만.

    방문을 닫고 신전에서 가져왔던 작은 책을 책상 위에 올려 뒀다. 그리고 품에서 작은 칼도 꺼내서 옆에 놓았다. 오랫동안 안 썼지만 다행히 칼날에 녹슨 부분은 없었다.

    ‘이런 것도 오랜만이네.’

    아마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방문을 잠근 걸 다시 확인하고 책상 앞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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