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39화 (139/150)

139화.

기이한 안도감

호흡하지 못해서 정신까지 흐려지기 직전에 눈앞에 상태 창이 떴다.

<돌발! 이벤트> 바다에서 성공적으로 탈출하기 위한 도움!

수중 호흡이 가능하도록 시스템이 도와줘요.

제한 시간: 30분

동시에 숨이 탁 트이며 시야도 맑아졌다. 다급하게 숨을 들이켜고 내쉬자 내가 뱉는 공기 방울이 점점 흐릿해져 가며 위쪽으로 둥실 떠올랐다.

시스템이 이제야 도움을 주는 것이 탐탁지는 않았지만 다행이긴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죽지는 않을 테니 그다지 위기감이 들지는 않았지만 숨이 막혀 오는 감각은 조금 불편했으니까.

깊이조차 분간되지 않는 암흑 같은 밤바다였기에 얼마나 깊이 내려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땅에 발이 닿았다. 열쇠의 파란빛에 의지해서 앞을 보니 바닥에 자물쇠 달린 상자가 하나 있었다.

‘이거구나.’

망설임 없이 열쇠를 잡아채서 가져다 대자 자물쇠가 곧바로 열렸다.

상자 안에는 푸른빛으로 연하게 감싸인 노트가 한 권 있었다. 바닷물 속에서도 젖지 않은 채였다. 노트를 꺼내서 일단 바다를 벗어난 뒤에 살펴보려고 했지만, 노트 아랫면이 상자 바닥에 딱 달라붙어 있어서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제한 시간: 25분」

수중 호흡이 가능한 시간을 흘끔 살펴봤다. 이 시간 안에 다 읽을 수 있으려나. 정 안 되면 중요한 부분만 훑어보고 나중에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노트를 펼쳤다.

「운명은 절대적이다. 나는 그 틀을 깨는 데 실패했지만 후대를 위해 글을 남긴다.」

내가 첫 문장을 읽는 동시에 노트에 정갈하게 새겨져 있던 글자가 천천히 지워져 나갔다. 손으로 쓸어 봐도 펜이 지나간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다음 문장까지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글을 읽었다.

「선택받은 용사의 검은 그와 운명을 같이하는 마검이다. 마물을 처리할 때의 마기는 마검 안에 깃들기 때문에, 마기가 쌓여 더 큰 악으로 변질되기 전에 처리해야 한다.」

이어져 있는 글에는 신에게서 이미 들었던 내용과 처음 보는 내용이 혼재해 있었다. 글자가 앞쪽부터 서서히 지워지는 중이었으므로 중요한 내용과 중요하지 않은 내용을 간추려 읽을 새가 없어 최대한 빠른 속도로 전부 읽어 나갔다.

요약하자면 용사가 마기에 잠식되어 세상을 파멸로 이끌지 않기 위해서 신의 힘이 담긴 검을 제 심장에 박아 넣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당장의 상황은 해결할 수 있지만 마기는 다시 세상에 흩어지게 되고, 결국 균열이 열리는 것이 반복된다.

생각에 빠져 글을 한참 읽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랐다.

「나도,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도 끊임없는 굴레 속의 작은 한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 신의 힘이란 이토록 잔인하다. 본질적인 해결은 정녕 불가능한 것일까.

나의 시간이 끝나고 나면 내가 남긴 흔적은 모두 사라지겠지만, 내가 알아낸 것들을 정리한 이 노트만큼은 마지막 힘을 다해 남긴다. 이 노트를 찾아내 읽고 있을 당신이라면 성공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내가 해내지 못한 일을 당신에게 넘긴다.

죽음도 망각도 두려워하지 말기를. 진정으로 두려운 것은 벗어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글을 마치며, 마지막으로 당신의 행복을 빈다.」

글자가 모두 사라져 백지가 된 노트를 덮었을 때 눈앞에 붉게 변한 상태 창이 떴다.

「제한 시간: 1분」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흐르다니.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노트에서 손을 떼자마자 상자가 저절로 닫혀 다시 잠겼다. 열쇠도 안에 든 채였으니 이제 상자를 다시 열 방법은 없을 것이다. 숨을 급하게 들이켜고 땅을 박찼다.

「제한 시간: 47초」

이 시간 안에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가는 건 무리였다. 애초에 수영을 할 줄 몰랐다.

여기까지 데려왔으면 다시 데려다주기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입술을 짓씹으며 불안하게 뛰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혔다. 시스템이 나를 여기서 죽게 내버려 둘 리 없으니 괜찮았다.

「제한 시간: 30초」

발장구를 치며 조금씩 헤엄쳐 올라갔다. 생각보다 깊이 내려온 듯했다. 얼마나 더 올라가야 할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시야 한구석에서 깜빡이는 상태 창이 시간의 흐름을 적나라하게 보여 줘서 침착함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제한 시간: 14초」

순간 손목에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찌릿하는 느낌이 났다. 열쇠는 상자 안에 들어가 있을 텐데? 손목을 들어 살펴보니 전에 민주혁이 줬던 팔찌가 깨져서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다들 여관에 돌아왔나? 내가 방에 없다는 걸 안 건가?’

이 팔찌가 깨지면 나를 애타게 찾고 있는 거라고, 간절하게 말했던 그의 흔들리는 목소리가 문득 떠올랐다. 이런 망망대해 속에서 나를 찾아와 줄 누군가를 기대하기란 부질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쩌면 조금은….

「제한 시간: 4초」

「제한 시간: 3초」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상태 창이 눈앞에 들이밀어졌다.

「제한 시간: 0초」

그러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곧바로 숨이 막혀 왔다. 시스템의 빛이 사라지니 주변이 암흑이었다. 이거 생각보다 무서운데, 그렇게 애써 태평한 생각을 하며 끝까지 위로 올라가 보려 발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사람이 호흡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애초에 길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더 이상 숨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고통스럽다는 느낌은 없었으나 답답하긴 했다. 몸에 힘이 점점 빠졌다.

‘안 되는데.’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답이 없었다. 의식이 점차 침잠하고 있을 때, 저 위쪽에서 흐릿하게 빛이 보였다. 내게 점점 가까워지는 연두색의 빛. 내가 끼고 있는 반지의 보석에서도 같은 색의 빛이 연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이한 안도감이 들었다. 시스템이 내 목숨은 보전해 줄 것이라거나, 그가 어떻게든 나를 구해 낼 것이라거나. 그런 이유에서 기인하는 안도감이 아니라 그가 나를 찾아와 줬다는 것에서 느끼는 감정이었다.

더는 버틸 수가 없어서 눈이 저절로 감겼다. 내 몸을 부드럽게 안은 그가 내 목덜미를 감싸고 입에 숨을 불어 넣었다. 그가 내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물살을 가르며 빠르게 올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물속에서는 텔레포트를 못 쓰는구나.’

그 생각을 끝으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커헉…. 콜록, 콜록, 으. …흐윽, 하아.”

물을 뱉어 내고 거칠게 호흡하며 눈을 떴다.

“그렇지, 괜찮아. 숨 쉬어.”

박율이 누워 있던 내 몸을 천천히 일으켜 앉히고는 등을 쓸어 줬다. 그에게 기대서 숨을 골랐다. 정신이 없었다. 지금 무슨 상황이지? 여기가 어디지?

“놀랐죠. 이제 괜찮으니까 몸에 힘 풀어요.”

가슴께를 틀어쥔 내 손을 떼어 낸 라엔이 지압하듯이 손을 가볍게 주물렀다.

그제야 주변의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그 절벽 위였고, 주변에 용사들이 있었다. 여관으로 텔레포트를 쓸 겨를도 없이 응급 처치를 먼저 한 듯했다. 바닷물에 흠뻑 젖어 있던 몸은 어느새 완전히 마른 채였다.

갑작스레 닥쳐오는 현실감에 몸을 살짝 떨었다. 내 어깨 위로 담요가 덮였다.

“추워?”

내게 묻는 송하견에게 고개를 저었다. 민주혁은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깨어난 내 모습을 눈에 새겨 담는 것처럼.

“이한아. 너를 데리고 올라오느라 제대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바다 밑바닥에서 신의 힘과 비슷한 기운이 느껴졌었어.”

“아….”

박율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에게도 신의 힘이 있으니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자물쇠나 노트에 담긴 신력을 알아챈 듯했다. 이전의 선택받은 용사가 자신이 가진 신의 힘을 마지막으로 쏟아부은 것일 테니 상당히 강한 힘이었을 것이다.

“네 의지로 향했던 게 아니었지?”

그가 내게 눈을 맞추고 다정하게 물었다. 지난번에도 신력 때문에 강제적으로 다른 장소로 이동한 적이 있었으니 짐작한 듯했다. 이번 일을 달리 해명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었다.

“네. 구해 줘서 고마워요, 율이 형.”

“버티느라 고생했어. 네가 물을 뱉어 내는 게 먼저여서, 물 밖으로 나오기 전까지는 쓸 수 있는 마법이 없었거든.”

내가 짐작했듯 내 위치를 찾아낸 건 민주혁이라고 했다. 여관에 도착해서 내가 방에 없다는 걸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은 송하견이었고, 라엔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몸이 굳은 민주혁을 정신 차리게 해서 팔찌로 내 위치를 찾게 했다고 한다.

“어, 민주혁은 어디 갔어요? 방금까지 여기 있지 않았나요?”

“네가 깨어난 걸 확인하더니 여관으로 먼저 돌아가겠다고 하더라. 이제 우리도 돌아갈까?”

생각해 보니 그들은 며칠간의 전투를 끝내고 막 돌아온 거였다. 민주혁은 상태가 많이 안 좋은가? 아까 표정도 별로 좋아 보이진 않았다. 도착하면 민주혁을 찾아가 봐야지. 감사 인사도 해야 했고 치료도 해 줘야 했다.

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박율은 부드럽게 웃으며 내 손을 피했다. 내가 치료하려는 걸 눈치챈 듯했다. 그래도 밤은 길었으니 괜찮았다. 박율은 이따가 그의 방에 들어가서 치료해 주면 됐다. 언제든 방에 들어가도 좋다고 했으니 그가 더 물러날 방법은 없었다.

텔레포트를 쓰기 위해 나를 조심히 안아 드는 라엔의 목에 팔을 감았다.

「<힐러가 도울게요!> 치료하기, 성공!」

몸을 굳힌 라엔이 나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고는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리듯이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고마워요.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이한도 놀랐을 테니까…. 조금 참아 볼게요. 돌아가서 푹 쉬어요.”

내 방으로 텔레포트한 이후 송하견은 내게 마법 약을 건넸다. 마음이 진정되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약을 마셨기 때문인지 약을 건넬 때를 노려서 그의 손목을 잡고 치료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이 편해지기는 했다.

시간도 늦었으니 일단 쉬고 내일 얘기하자며 모두가 방 밖으로 나간 후, 나도 방에서 슬쩍 빠져나와 민주혁의 방문 앞에 섰다. 민주혁을 치료한 다음에 박율의 방으로 갈 생각이었다.

‘자고 있으면 어떻게 하지.’

잠을 깨우고 싶은 건 아니었다. 망설이며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잡니다.”

아니, 대답하는 걸 보면 안 자는 거잖아.

“잠깐만 들어가면 안 돼?”

짧은 정적이 지나고 문이 벌컥 열렸다.

“선이한?”

나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건가.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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