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숨 막히는데
“설명해요.”
윤재영은 입을 달싹이다가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시선은 여전히 피로 물든 내 소매에 고정한 채였다. 하긴 자기 소유의 여관 화장실에서 투숙객이 피를 토하고 있으니 놀랄 만도 했다.
“물을 틀고 있어서 세면대는 별로 안 더러워졌어요. 피가 조금 튄 건 치우고 가려고 했고요.”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건가? 그런 걸 설명하라고 한 거 아니에요.”
“아, 병 같은 건 아니에요. 당연히 옮는 것도 아니고요. 방법은 모르겠지만 원한다면 어떻게든 확인시켜 드릴 수 있어요.”
“그딴 걸 걱정한 게 아니….”
“그냥 오늘 컨디션이 나빠서 그래요. 재영 씨가 신경 쓸 필요는 없잖아요.”
내가 윤재영의 말을 끊고 얘기하자 그가 관자놀이에 손을 짚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 그렇게까지 걱정을 했나.”
“누가요?”
“누구긴 누구겠어요? 당신 일행들이요. 볼 때마다 다들 이한 씨를 못 챙겨서 안달이던데.”
“그….”
그 정도는 아니에요, 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용사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이제는 모를 수가 없으니까. 그러니 더더욱 윤재영이 용사들에게 말해선 안 됐다.
“처음부터 허약해 보이긴 했는데 컨디션이 나쁘다고 각혈까지 할 정도인지는 몰랐네요.”
“허약하지 않아요.”
“화장실에서 혼자 우는 건가 했는데, 이러고 있을 줄은….”
윤재영은 내 말을 가뿐하게 무시하고는 내 턱을 살짝 쥐어 고개를 들게 했다.
“봐 봐, 지금은 괜찮아요? 심장 쪽이 좀 안 좋은 거예요?”
“…비슷해요.”
아무래도 내가 아까 품을 뒤적이던 걸 오해한 듯했다. 달리 변명할 말도 없었으므로 말을 흐리며 대강 대답했다. 이 주제로 더 깊게 파고들면 곤란했으므로 재빨리 말을 돌렸다.
“여관에는 무슨 일로 왔어요? 이 시간에 온 건 처음인 것 같아서요.”
“그건 어떻게 알았어요. 나한테 관심이 많은가 봐요.”
당연하지. 아무도 없는 시간대를 노려서 치료하기 게이지를 비워 내야 했으니까.
내가 부러 과장된 말투를 써서 ‘네에.’ 하고 건성으로 대답하자 윤재영 역시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이었다.
“윤진이 이한 씨가 요즘 방에만 있다고 하기에 같이 주변이나 둘러볼까 해서 왔어요. 이왕 놀러 왔는데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건 아깝잖아요.”
그건 고대 문자를 해독하느라 바빠서였지만, 처음에 윤재영과 윤진에게 우리가 놀러 왔다고 말했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근데 이렇게 여행 다녀도 되는 거예요? 치료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치료는 필요 없어요.”
“음….”
찰나의 순간 윤재영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치료할 방법이 마땅치 않은가 봐요. 뭐, 괜찮은 건 맞죠?”
피를 이렇게 토하는데 진짜 괜찮은 건가, 하는 작은 중얼거림을 듣고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평화로운 세상이 도래한 이후 시스템이 사라지고 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솔직히 말하자면 시스템이 있으니 그간 내 안위에 대해서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시스템이 내게 부여한 스킬은 생명을 유지시켜 준다는 것이었지 다시 몸을 멀쩡하게 돌려놓는다는 건 아니었다.
신과 대화했을 때 신은 내 몸에 영향은 없을 것이고 나는 괜찮을 거라고 말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도 되는 걸까? 혹시라도 몸 상태를 멀쩡히 돌려놓아 주는 게 아니라면, 나중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생명을 유지시켜 준다는 스킬이 사라진다면 나는….
“설마 죽기야 하겠어요?”
“…그걸 나한테 물어보는 거예요?”
“아, 아니요. 잘못 말했어요. 괜찮은 거 맞아요.”
생각에 빠져 있다가 대답이 잘못 나와서 급하게 정정했으나 윤재영은 경악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일행들이 이한 씨 몸 상태를 알고 있어요?”
“네, 알고 있어요. 괜히 더 걱정 끼치기 싫으니까 방금 본 건 말하지 마요.”
“그렇게 걱정한다면서 왜 이한 씨를 혼자 두고 갔어요?”
“체력이 안 되니까요. 가만히 쉬기만 했는데도 이런걸요. 그리고 그냥 방에서 바깥 보는 것도 좋아하고, 종종 같이 나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해요.”
품에서 클린 마법이 담긴 종이를 꺼내 찢어서 피로 물든 옷을 정리했다. 이런 상황이 생길 줄 알았으면 게이지를 방에서 비워 낼걸.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말끔해진 옷을 확인하고 고개를 들자 윤재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고 있었다.
“왜 마법을 직접 안 쓰고 그렇게 써요? 마나 회로에도 문제가 있어요? 아니면 마나 고갈?”
“마법은 원래 못 써요. 그래서 지금까지 신전에서 지냈어요.”
이 옷을 보고도 모를 수가 있나 싶었지만 곰곰이 따져 보니 곧바로 아는 게 특이한 거였다. 신전은 폐쇄적인 집단이기에 보통 외부로 잘 나가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신전에서 지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만했다.
“어쨌든 약속해요. 절대 말 안 하기로요.”
“이한 씨, 괜찮은 거 맞아요? 참는 게 능사는 아니에요. 걱정을 끼치더라도 심각한 상황이라면 다들 알고는 있어야죠.”
“괜찮아요. 내 몸은 내가 잘 알아요.”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네.”
내 단호한 태도에 윤재영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윤재영은 말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그 일 이후로 종종 낮에 여관에 와선 내 방문을 두드리곤 했다. 같이 주변을 산책하자거나 간식을 사 왔다거나 하는 괜한 핑계와 함께였다.
치료하기 게이지를 비워 내는 건 꼭 해야 할 일이었으므로 중단할 수는 없었다. 피를 뱉는 중에 그를 두 번쯤 더 마주치게 되자 그는 노골적으로 내게 신경을 썼다. 심지어 내가 용사들과 함께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용사들이 나와 윤재영 사이에 뭔가 있었다는 걸 알아채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한,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밤이 내려앉을 무렵이었다. 라엔은 내가 허락하자마자 방 안으로 조용히 들어와 침대에 있는 나와 마주 본 채 의자에 앉았다.
“이번 균열의 마무리가 거의 다 되어 가서 며칠쯤 자리를 비우게 될 것 같아요.”
“이게 두 번째 균열이었죠. 이제 이것만 처리하면 이 장소에는 마지막 하나만 남는 거네요.”
“네, 맞아요.”
“몸조심해요. 라엔 형은 멀미도 심해서 걱정돼요.”
라엔이 숨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잠깐 망설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걱정돼요? 나는 이한이 걱정돼요. 솔직하게 말해 줘요. 재영 씨랑 무슨 일 있었어요?”
“그럴 리가요.”
“그런데 왜 재영 씨가 이한에게서 시선을 못 떼요?”
어둠 속에서 나를 곧게 바라보는 그의 금안이 빛났다. 평소보다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조바심을 내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내 쪽으로 의자를 바짝 당겼다. 길쭉한 손가락이 내 손에 감겼다.
“이한도 의식하고 있잖아요. 아닌가요?”
틀린 추측을 하고 있으면서 말투는 단정적이었다. 그러면서도 표정은 내가 아니라고 말해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간절해 보였다.
“의식하는 게 아니라 귀찮아하는 거예요.”
“네…?”
“재영 씨가 얼마 전에 내가 신전에서 살았다는 걸 처음 알았거든요. 신관을 처음 봐서 신기하대요.”
“그게 다예요?”
“놀랍게도 그게 다예요. 신관이라고 해도 마법을 못 쓰는 것 말고는 다를 것도 없는데도요. 얼마 지나면 시들해지겠죠.”
내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키득 웃자 라엔이 내 뺨을 양손으로 부드럽게 감쌌다.
“아니요, 이한은 특별해요.”
라엔은 시선을 살짝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재영 씨와 아무 일도 없었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불안했어요.”
“왜요?”
“떨어지고 싶지 않아요. 누가 채 갈까 봐….”
“누가 채 간다고 해서 내가 순순히 따라갈 사람처럼 보이나요?”
그가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와 시선을 맞췄다. 잠깐을 멍하니 있던 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렇네요. 나한테도 아직 안 넘어왔잖아요.”
라엔이 내게 서서히 가까워졌다. 자연스럽게 눕혀져서 등이 침대에 닿았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선명한 눈동자에 깊은 감정의 일렁임이 보이는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풀려 내려오는 붉은 머리칼과 옅게 웃는 얼굴 때문인지 그에게서 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의 얼굴이 내게 서서히 가까워졌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귀 바로 옆에 나지막한 속삭임이 스쳤다.
“늦은 시간에도 허락해 줘서 고마워요. 잘 자요.”
눈을 떴을 때 그의 얼굴이 바로 내 코앞에 있었다. 라엔은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가만히 맞댔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온기가 선명해서 이마를 매만지다가 문 여는 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를 불렀다.
“라엔 형도 잘 자요.”
“고마워요. 아, 리더 형이랑 송하견, 그리고 민주혁에게도 재영 씨에 대한 얘기 말해 둘게요. 다들 궁금해하고 있을 테니까요.”
방을 나서는 라엔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나와 윤재영 사이에 있었던 일을 다들 그렇게까지 궁금해하려나 의문이 들었다.
◇
용사들이 두 번째 균열의 마무리를 위해 자리를 비운 며칠간 잠들지 않았다. 또 그 꿈을 꾸기 싫어서였다. 그래도 다들 오늘내일 중으로 돌아올 예정이라고 했으니 괜찮았다.
새벽녘에 책상 앞에 앉아서 책을 펴 놓고 버티다가 결국 아래로 떨어지는 고개를 막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간 졸았을까, 손에 느껴지는 이물감에 정신을 차렸다.
‘이번에는 꿈을 안 꿨네.’
멍한 생각을 이어 나가기도 전에 왼손이 휙 들렸다. 손목에 열쇠 끈이 감겨 있었고 열쇠는 비현실적으로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이게 왜….”
당황하며 끈을 풀려고 했지만 조금의 느슨함도 없이 단단히 묶인 끈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열쇠가 시스템의 빛과 같은 색으로 푸르게 빛났다. 그러고는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것처럼 한 방향으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강한 힘이었기에 버티고 있다간 팔이 빠질 것 같아서 질질 끌려 나가듯이 방에서 나와 걸음을 옮겼다.
‘도시 밖으로 나가는 건 조금 그런데.’
전에 송하견과 함께 도시 밖으로 나갈 때 걸었던 여관 뒤쪽의 길이었다. 주위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건 그때와 같았지만, 지금은 주변이 어두워서인지 분위기가 서늘했다. 어쩌면 도시 밖으로 혼자 나오는 건 위험하다고 말했던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걸음을 멈추려 했는데도 열쇠는 계속해서 나를 잡아끌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절벽이었다. 전에 민주혁이 찾아서 다 같이 놀러 왔던 경치 좋은 절벽. 돌아가는 길을 알아 그나마 다행이라고 안도하고 있었는데, 열쇠는 여기까지 와서도 나를 이끄는 걸 멈추지 않았다.
“아니, 잠깐.”
어디로 향하는지 알았다. 나는 절벽 끝으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나를 여기서 떨어뜨리려는 작정이었다. 몸을 뒤로 젖히고 발뒤꿈치를 바닥에 단단히 박았지만 열쇠가 팔을 끌어당기는 힘이 더 컸다. 내 발이 흙바닥 위로 선 두 개를 굵직하게 파면서 끌려 나갔다.
빛을 집어삼킨 건가 싶을 정도로 새까만 바다를 배경으로 푸르게 빛나는 열쇠가 이질적일 정도로 선명했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으며 발아래로 땅이 닿는 감각이 사라졌다.
차가운 물 속으로 순식간에 잠겨 갔다. 물살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고, 수영 같은 걸 할 새도 없었다. 열쇠는 나를 점점 바다 저 깊은 곳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오른손으로 목을 감쌌다. 숨, 막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