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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37화 (137/150)
  • 137화.

    못 본 걸로

    이튿날 점심 즈음 잠에서 깼을 때 옆에 박율은 없었다. 내게 꼼꼼하게 덮여 있는 이불을 걷어 내고 일어나 앉아서 이마를 멍하니 매만졌다.

    ‘그건 꿈이었나.’

    지금보다 훨씬 이른 아침, 옆에 누워 있던 박율이 몸을 일으키는 움직임에 나도 따라 깼다. 그는 조심히 행동하는 것 같았지만 나와 서로 살이 맞닿아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눈을 감고 있어도 느껴지는 푸른 아침 햇살. 잠에서 완전히 깨지 않은 채였기에 몽롱한 정신으로 서서히 다시 잠들 무렵, 어젯밤과 같은 다정하고 따뜻한 감촉이 이마에 느껴졌다.

    ‘다녀올게.’ 하고 말하는 그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얼핏 들렸다. 소중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이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헤집는 애정 어린 손길도.

    “아, 정말….”

    무릎을 모은 채로 얼굴을 푹 숙였다. 이렇게 선명한데 꿈일 리가 없잖아.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한참을 식히다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창가로 갔다. 닫혀 있던 커튼을 치니 방 안이 환해졌다.

    ‘커튼도 쳐 주고 갔네.’

    나도 모르게 그의 흔적을 쫓다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정신 차려야 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내 방으로 돌아와서 고대 문자 해독에 박차를 가했다. 맥락도 없이 불쑥불쑥 떠오르는 박율에 대한 생각을 지워 내려고 의식적으로 더 집중하려 노력했다. 그 때문인지 큰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어떤 고대 문자인지 알아낸 것이다.

    문자는 개수가 방대해서 아직 해독하지 못했지만, 상대적으로 개수가 적은 숫자는 해독할 수 있었다. 적혀 있는 건 네 개의 숫자였다.

    ‘16, 37, 41, 50.’

    이게 뭘 의미하는 거지? 숫자 크기를 보니 날짜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이나 위치 좌표인가? 혹은 이 책의 페이지를 나타내는 것일 가능성도 있었다. 정확한 건 나머지 문자까지 해독하고 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족스럽게 책을 덮고 몸을 일으켰다. 용사들이 돌아올 시간이었다.

    내가 1층으로 내려가고 얼마 되지 않아 용사들이 돌아왔다. 한 명씩 손을 잡아 치료하고 마지막으로 박율의 손을 잡았다. 내가 치료를 끝내고서 빤히 올려다보자 박율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또 그 웃음이다. 그가 의도한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부드럽게 휘어지는 그의 눈꼬리에 어쩐지 심장이 빨리 뛰는 것 같았다. 시선을 돌려야겠다고 생각해 놓고,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멍하니 바라봤다.

    “이한아, 왜?”

    “네? 뭐가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서.”

    “…딱히 그렇지는 않아요.”

    “말하기 어려운 거야? 그래도 형한테만 살짝 말해 줄래? 걱정돼서 그래.”

    “그게 아니라 그냥….”

    말끝을 흐리며 빨갛게 달아올라 있을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푹 숙였다.

    “음, 컨디션이 안 좋은 건가? 열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가 걱정하듯 내 이마를 짚었다. 나도 내 이마를 탁 소리 나게 짚고 싶은 심정이었다. 박율이 지금 나를 놀리는 건지 진심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눈치가 빠른 편이니 당연히 전자겠다 싶었지만 내 안색을 신중하게 살피는 모습을 보니 후자인 것 같기도 해서였다.

    뭐라도 말해야겠다 싶어서 주제를 바꾸고 당장 떠오르는 질문을 던졌다.

    “괜찮아요, 조금 더워서 그런가 봐요. 사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던 건 맞아요. 형, 요즘 많이 피곤해요?”

    생각해 보니까 정말 궁금했다. 최근 다들 피곤해 보이기도 했고, 심지어 박율은 어젯밤에 평소와 달리 잠에 취해 있을 정도였으니까.

    “신경 쓰였구나. 고마워. 그래도 그렇게 걱정할 만한 정도는 아니야.”

    “맞아. 이번 균열은 처리하기가 조금 까다로워서 그렇지 크게 힘들지는 않아.”

    박율과 민주혁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용사들을 치료하고 나서 치료하기 게이지가 차는 걸 보면 부상이 작지 않았음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것보다 선이한 너, 컨디션 괜찮은 거 맞아?”

    “당연하죠. 나는 오늘 여관에만 있었는데 괜찮지 않을 리가 있겠어요.”

    “저녁은 먹었어요?”

    “아.”

    잊고 있었다. 고대 문자를 해독하는 일에 몰두해 있느라 생각도 못 했는데. 이미 반응을 이렇게 했으니 저녁을 먹었다고 거짓말하기는 늦었고, 한 번만 넘어가 달라는 눈빛으로 라엔을 바라봤다. 물론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 시간까지 식사도 안 했나요?”

    “잊고 있었어요. 그래도 한 끼 안 먹는다고 큰일이 나는 건 아니니까요.”

    따지자면 점심도 건너뛰었으니 두 끼를 거른 거였다. 그래도 큰 차이는 없으니까 별로 상관은 없었다.

    “내일부터는 잘 챙겨 먹을게요.”

    “혹시 속이 안 좋은 건가요?”

    “아니요, 다른 거 하느라 잊었던 거예요.”

    “그러면 가요. 지금 조금이라도 먹어요.”

    “네?”

    라엔이 박율과 시선을 교환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송하견이 내 손목을 잡아끌어서 1층 식당의 식탁 앞에 앉혔다. 저녁때가 지나서 식당은 영업을 중지해 텅 비어 있었다. 윤진도 자리에 없었다.

    “식당을 운영하지 않는 시간에는 조리 기구를 마음껏 써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거든.”

    어느새 조리 기구 앞에 선 박율이 식자재를 여러 개 띄워 놓고는 나를 살짝 돌아봤다.

    “속에 부담이 안 되는 걸로 만들어 줄 테니까 조금이라도 먹어 보자.”

    “형, 나 때문에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요.”

    물론 박율이 해 주는 음식은 좋았지만, 방금까지 고생하다 온 그에게 요리까지 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를 말리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내 어깨를 민주혁이 재빨리 눌러 앉히고는 내 맞은편에 보란 듯이 자리를 차지했다.

    “어딜 일어나려고. 거기 딱 앉아 있어. 나도 같이 먹을 거니까.”

    “어?”

    “그렇지 않습니까, 형님?”

    “맞아. 주혁이 몫도 만들 거거든.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이한아.”

    박율의 동의를 얻은 민주혁이 그것 보라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민주혁의 몫을 만드는 김에 내 몫을 조금 더 만드는 거라면 내게는 말릴 권한이 없었다.

    민주혁은 박율에게 뭐라도 도와줄 것이 없는지 물으며 일어섰지만 박율이 이미 음식을 다 만든 후였다. 박율은 내 앞에 죽이 담긴 그릇을 놓아 주며 지나가듯이 말했다.

    “너만을 위해서라도 만들었을 거야. 네가 맛있게 먹어 주면 그걸로 충분하거든.”

    “…고마워요.”

    마음이 간질간질해서 괜히 숟가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죽을 한입 크게 떠먹었다. 맞은편에 앉은 민주혁은 자기 먹는 것은 뒷전으로 미루고 내가 먹는 것만 씩 웃으면서 바라봤다.

    “남겨도 되니까 무리해서 먹지는 말고.”

    따뜻한 죽을 먹어서인지 몸 안에 온기가 도는 것 같았다.

    용사들이 말한 것처럼 이번 균열을 처리하는 건 이전보다 쉽지 않은 듯했고, 나도 그만큼 치료하기 스킬을 빈번하게 쓰게 됐다. 그 말은 즉 치료하기 게이지를 생각보다 더 자주 비워 내야 했다는 뜻이다.

    용사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한낮, 2층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의 세면대 앞에 섰다. 방 안에서 피를 뱉어 내고 클린 마법으로 정리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클린 마법을 쓸 수 있는 종이가 한정되어 있었기에 될 수 있는 한 낭비하지 말아야 했다.

    ‘라엔이 눈치챌 수도 있으니까.’

    그가 여러 마법이 담긴 종이를 매번 넉넉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지만, 열쇠 때문에 꿈을 꿀 때마다 피를 토하곤 했기에 클린 마법만 소모 속도가 빨랐다. 부족하다고 말하면 더 만들어 줄 테지만 지금껏 써 온 양보다 배로 늘어난 셈이니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이 시간에는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네.’

    윤진은 점심 이후로는 저녁 시간 전까지 자리를 비우곤 했고, 윤재영은 보통 여관에 없었다. 그래도 화장실에 들어오자마자 습관처럼 문은 잠가 뒀지만, 늘 그랬듯 이번에도 별일 없이 지나갈 것이 분명했다.

    세면대에 물을 조금씩 흘려보내며 치료하기 게이지를 손끝으로 건드렸다.

    “욱, 콜록.”

    익숙해질 만도 했건만 비릿한 피 냄새는 여전히 역했다. 화장실에 환기 시설이 잘되어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생리적으로 눈에 고인 눈물을 소매로 닦아 내다가 문득 눈앞의 거울 속 내 모습을 마주했다.

    ‘혈색이 좀 좋아졌나?’

    각혈하는 중이기에 입 주변에 피가 조금 묻고, 눈물을 흘려서 눈가가 붉어 보인다는 것만 뺀다면 이전보다 좋아 보였다. 용사들이 내 몸 상태를 곧잘 걱정하곤 했지만, 신전에서 살 때와 비교해 보면 지금이 훨씬 나았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식사를 걸렀다고 하니까 바로 음식을 만들어 주고, 잠들 수 없다고 하니까 옆에 눕게 해 주고. 되짚는 기억 속에 온기가 선명했다. 내가 이 자리에 제대로 존재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해 준….

    똑똑똑.

    노크 소리였다. 아니, 잘못 들었나? 소리에 집중하려 수도를 잠갔다.

    똑똑똑똑똑.

    문손잡이가 덜컹거렸다. 누군가 잠긴 문을 흔들고 있었다.

    “콜록, 잠, 깐, …읏.”

    급하게 말하려다가 숨을 잘못 들이켜서 피가 기도로 넘어간 듯했다. 허리를 살짝 숙여 소매로 입을 틀어막고 기침하며 상태 창을 불렀다.

    「‘치료하기 게이지 비워 내기’

    중단하기 / 계속하기」

    “이한? 이한 씨 맞아요? 왜 그래, 괜찮아요? 잠깐 들어갈게요?”

    “아, 콜록, 흐윽. 아니, 들어오지….”

    윤재영이었다. 그가 이 시간에 여관에 있을 리가 없는데. 밖에서 열쇠가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마스터키라도 꺼낸 듯했다. 얼빠져 있을 시간이 없었다.

    ‘중단하기.’

    「‘치료하기 게이지 비워 내기’를 중단합니다.」

    각혈은 멈췄으나 기침은 멈추지 않았다. 그것보다 지금 이 상황이 문제였다. 아까 생각할 겨를 없이 소매로 입을 막아서 하얀 천이 피로 흥건해져 있었다.

    달칵, 열쇠가 꽂히는 소리가 들렸다. 품을 뒤졌으나 마음이 급해서인지 클린 마법이 담긴 종이가 잡히지 않았다. 앞섶이 구겨지는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조급함에 인상을 찡그림과 동시에 문이 세차게 열렸다.

    “어….”

    말을 잃은 윤재영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하고선 고개를 살짝 돌려 거울을 봤다.

    “콜록, 흐으. …후우.”

    모습이 말이 아니었다.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서는 일단 진정할 필요가 있었기에 천천히 숨을 골랐다. 품에 넣고 있는 손이 묘하게 가슴팍을 움켜쥐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손을 빼낸 후, 물을 틀어서 입을 한번 가볍게 헹궈 내고 피가 번진 입술도 문질러 닦았다.

    이제 됐다. 찡그렸던 인상을 풀고 손을 등 뒤로 돌려 피로 물든 소매가 안 보이도록 자연스럽게 숨겼다.

    “재영 씨, 못 본 걸로 해 줄래요?”

    웃으며 말하긴 했지만 꽤나 간절했다. 윤재영이 용사들에게 말을 흘리기라도 하면 곤란했으니까. 윤재영은 입을 꾹 다물고 내 앞으로 성큼 걸어왔다. 분위기를 보니 내 부탁을 쉽게 들어주지는 않을 것 같아서 어떻게 해야 그가 그냥 넘어가 줄지 머리를 굴렸다.

    윤재영은 내가 뒤로 숨긴 손목을 잡아 앞으로 내보였다. 아, 소매를 그렇게 함부로 쥐면 손에 피 묻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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