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악몽
송하견은 여관 뒤쪽의 샛길로 들어섰다.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길인지 주변이 휑했다. 그는 나와 발걸음을 맞춰 천천히 걸었다.
“할 말이 뭐예요?”
“첫 번째 균열의 처리가 거의 끝나 가.”
“아, 한동안 다들 나가 있겠네요.”
“응.”
내가 혼자 있기를 싫어한다는 걸 다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 박율이 따로 얘기한 것 같지는 않았다. 박율은 나와 그가 둘이서만 차고 있는 보석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까.
“내일 떠나면 며칠 후에 볼 수 있을 거야.”
“그렇구나….”
“위험해서 너를 데려갈 수 없어. 미안.”
“미안할 일이 아닌걸요. 조심히 다녀와요, 기다릴게요.”
송하견과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고 걸었지만 침묵조차도 편했다. 나는 송하견 특유의 고요함을 좋아했다. 어쩌면 그도 지금 나에 대해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기쁠 것 같다.
바닥에 모래가 밟히는 걸 보니 어느새 도시 밖으로 나온 듯했다. 도시 안으로 들어오는 것보다 나가는 게 상대적으로 자유롭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았다.
“오늘은 마무리를 일찍 해서 다들 돌아와 있어. 그래서….”
“이한!”
라엔이 저쪽에서부터 순식간에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나를 끌어안았다.
빠른 속도였기에 몇 걸음쯤 뒤로 밀려 날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그가 무척이나 소중하다는 듯이 사뿐하게 나를 감싸서 그런지 전혀 타격이 없었다. 그 모습이 라엔다워서 웃음이 나왔다. 송하견은 말이 끊겨서인지 얼굴을 묘하게 찌푸렸다가 금방 갈무리했다.
“들었겠지만 내일 배를 타고 나갈 거예요.”
“형, 멀미는 괜찮겠어요?”
“그래서 미리 이한의 기운을 조금 받아 가려고요.”
라엔은 정말 기운을 받아 가기라도 하려는 듯이 나를 더 힘주어 안았다. 나보다 그의 키가 컸기에 발뒤꿈치가 땅에서 살짝 들릴 정도였다. 넘어질까 봐 그의 등에 손을 둘렀다. 그가 살짝 웃음을 흘리며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기운이든 뭐든 줄 수 있다면 주고 싶지만 치료하는 건 미리 할 수가 없어요.”
“아무것도 안 줘도 괜찮아요. 한동안 못 만나니까, 그냥 이렇게 조금만 더 있어 줘요.”
그게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있는데 송하견이 라엔의 로브를 잡고 그를 내게서 떼어 냈다. 그러고는 몸을 맡기고 있던 사람이 사라져 순간 휘청이는 내 어깨로 손을 뻗어서 나를 지탱했다.
“그냥 핑계 대는 거야. 떨어져, 라엔.”
“하견은 이한과 단둘이서 걸어왔잖아요. 나는 여기서 계속 기다렸는데요.”
“역할을 그렇게 나눴으니까. 억울하면 이기지 그랬어.”
“운이 없는 편인 걸 어떡해요. 운이 필요한 내기는 자신 없는걸요.”
“그걸 알았으면 박율 형처럼 처음부터 양보하지.”
“그냥 포기할 수 있나요. 이렇게 시간 낼 수 있을 때가 흔하지 않은데.”
라엔은 구겨진 로브를 다시 바르게 펴고는 내게 손을 뻗었다.
“갈까요? 지금은 해안가 쪽의 절벽으로 갈 거예요. 주혁이 좋은 장소를 찾아 뒀더라고요. 낮에 시간이 나는 날은 오랜만이니까 숨도 돌릴 겸 이한이랑 시간도 보낼 겸 해서요.”
“박율 형이랑 민주혁은 음식 사러 갔어.”
“취향에 맞춰서 잘 사 올 거예요. 샌드위치랑 과자랑 달콤한 음료를 사 올 거라고 하던데요.”
“와, 좋아요.”
얘기하다 보니 해안가 절벽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눈앞에 온통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절벽 끝에 서서 바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힘 있게 굽이치는 파도가 하얀 물보라를 만들며 부서지고 있었다. 쪼그려 앉아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았다.
“마음에 들어요?”
“네. 너무 예뻐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도 도시 밖으로 혼자 나오는 건 위험할 수도 있어. 꼭 우리랑 있을 때 나와.”
“맞아요. 아니면 진 씨나 재영 씨한테 얘기해 보고요. 그것도 영 여의치 않으면 도시 밖에 다녀올 거라고 쪽지라도 꼭 남겨 줘요.”
“그럴게요.”
얼마 지나지 않아 박율과 민주혁이 돌아왔다. 민주혁은 나를 보자마자 칭찬을 바라는 듯 반짝이는 눈으로 어필을 했다.
“나 여기 진짜 열심히 찾았어. 아는 사람만 아는 숨겨진 관광 명소던데.”
“응, 정말 좋다. 진심으로.”
“네가 좋다니까 보람이 있다.”
민주혁은 내 머리칼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바람에 헝클여져 있긴 했으니 이번에는 봐줘야겠다 싶었다. 그에게 고맙기도 했고.
박율이 내 손에 샌드위치를 쥐여 줬다. 나도 충분히 손이 있는데, 그가 내 음료수를 든 채 건네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중간중간 빨대를 내 입에 물려 줬다.
“응? 이한아, 왜 그렇게 봐?”
“내가 언제 음료를 마시고 싶어 하는지 바로 아는 게 신기해서요.”
“관심이 있으니까.”
“아하….”
홧홧해지는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박율은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걸까. 심지어 이렇게 한결같은 웃음을 짓고선.
그러나 그는 이번만큼은 정작 중요한 내 마음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이렇게 다정하게 대하는데 내가 그를 어떻게 쉽게 포기할 수 있을까. 박율이 너무 쉽게 놓아 버린 자신을 나는 홀로 간절하게 붙잡고 있었다.
그건 꽤 서러운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미워할 수 없었다. 애초에 좋아하기에 놓을 수 없는 거니까.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고 느껴질 만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노을이 질 때 즈음 여관으로 다시 돌아왔다. 얼마나 밖을 돌아다녔다고 그새 피곤해진 몸을 침대에 누였다. 윤진이 말했던 건강 주스라도 먹어야 하는 걸까. 멍하니 생각하다가 잠에 빠져들었다.
◇
이튿날 각혈하며 깨어났다. 푸른빛을 내며 손에 감겨 있는 열쇠를 풀어내서 저만치로 던졌다. 지긋지긋한 꿈도 그대로였다. 창밖으로 해가 어스름히 밝아 있었다.
‘내 주변에 용사들이 없을 때만 작용하는 건가.’
박율과 모두가 돌아온 후로는 단 한 번도 그 꿈을 더 꾼 적이 없었다. 그들이 출발했을 시점에 또다시 이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을 보면 무언가 영향이 있는 듯했다.
손에 껴 있는 반지를 확인했다. 연둣빛 그대로였다. 보석을 한참 바라보다가 클린 마법으로 주변을 정리하고 책상 앞에 앉았다. 더 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고대 문자 책을 꾸역꾸역 다시 펼쳤다.
‘며칠 안 자는 것쯤은 괜찮아.’
전에는 일주일을 내리 자지 않은 적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호기롭게 생각했던 건데, 현재 내 체력을 너무 과대평가한 듯싶었다. 책상에 앉은 채로 조는 바람에 또 같은 꿈을 꿨고, 피를 한번 거하게 쏟아 냈다. 그렇게 곧 잠들 것 같은 상태로 며칠을 보냈다.
드디어 다들 돌아온 걸 확인하고 치료한 후에 곧바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다행히 모두 큰 부상은 없었다. 다들 내 안색을 보고 걱정하긴 했지만 적당히 잘 답했던 것 같다. 어차피 잠만 자면 금방 회복될 거였다. 오랜만의 수면이 달콤했다.
“…헉, 허억.”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새벽이었고, 피는 토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방금 그건 그냥 꿈이었다는 뜻이다. 내 손에 스러지는 박율이 그렇게나 생생한데.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무작정 박율의 방문 앞에 섰다. 잠이 덜 깨서 반쯤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지금 그는 잠들어 있을 터였다. 닫힌 문 앞에서 감정을 추스르며 멍하니 서 있는데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박율이 침대에 앉아 있는 채였다. 바로 옆에 연한 빛을 내는 등이 켜져 있었다.
“내가 깨웠어요?”
“아니, 안 자고 있었어. 네가 있는 걸 아까부터 알았는데, 형이 안 부르면 날이 밝을 때까지 그 앞에 서 있기만 하겠다 싶어서.”
부드럽게 웃던 박율은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표정을 굳히고는 나를 훅 끌어당겨서 침대에 앉혔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못 이기는 척 그의 옆으로 파고 들어가서 자리에 누웠다. 이대로 잠들면 딱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졸린데 형이 옆에 없으니까 잠들 수가 없어요.”
“아까도 피곤해 보이더니, 전혀 못 잤던 거야?”
“오늘만 같이 자도 돼요? 딱 하루면 돼요.”
박율이 내 눈가를 손으로 덮고 다독였다. 뒤이어 내 옆으로 그가 몸을 누이는 느낌이 났다.
“문 처음부터 안 잠겨 있었어.”
“…네.”
“네가 아무 때나 들어와도 된다는 뜻이야, 이한아.”
몽롱한 정신으로 그의 말뜻을 천천히 이해했다. 박율이 이제 자라는 것처럼 나를 안아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꽃향기. 바로 근처에 바다가 있는 이곳에서도 그의 체취가 선명했다.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대고 순식간에 다시 잠들었다.
◇
열쇠 때문은 아니었지만 악몽을 꾸는 일이 몇 번 있었고, 그때마다 내가 박율의 방문 앞에서 망설일 때면 그가 먼저 나를 불러왔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그가 부르기도 전에 내가 먼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게 됐다.
박율은 늘 깨어 있었지만 단 한 번 잠들어 있던 적이 있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은 언젠가 균열 속에서 마주했던 그를 떠올리게 했다. 그가 깨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참을 그 옆에서 서 있었던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다.
“…이한아.”
“아, 깼어요? 미안해요.”
“이리 와. 자자.”
그는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웃으며 자기 옆에 공간을 만들고는 빨리 누우라는 듯이 침대를 톡톡 쳤다. 뜨거운 체온으로 나를 끌어안고 있는 그의 작은 움직임과 살갗을 스치는 숨결이 지나치게 생생해서 정신이 말똥해졌다.
박율의 품에 안긴 채로 그의 얼굴을 뜯어봤다. 어둠 속에서도 날렵한 턱선과 긴 속눈썹이 도드라졌다. 무심코 그의 뺨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박율이 가물가물 눈을 뜨더니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지금, 왜… 무슨….”
제대로 된 문장이 뱉어지지 않았다. 유혹하듯 호선을 그리는 그의 눈꼬리를 보는 순간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아무 말 없는 그가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서 터질 듯한 심장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눈을 꾹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그가 내 반지에 입을 맞췄던 것과 내가 그의 초커에 입을 맞췄던 건 마법을 위한 거였다. 그렇지만 지금 이건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마법 때문인 것도 아니….”
박율을 바라본 순간 하던 말이 저절로 끊겼다. 그의 고른 숨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자요…?”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맞추고, 다시 자요?
내 허탈한 목소리에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잠든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목에 걸린 초커로 시선이 갔다. 연둣빛 보석을 살짝 쥐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그 모든 말 중에서 겨우 입 밖으로 나온 건 단 한 문장이었다.
“언제까지나 당신을 지켜볼게요.”
이건 그에게 초커를 걸어 줄 때 내가 하지 못한 말이었다. 내 속삭임은 그가 듣지 못한 채 허공에 흩어졌다. 괜찮았다, 내가 이 말을 했다는 걸 내가 제대로 알고 있으면 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