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선물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며칠 만에 푹 자고 일어나서인지 잠에 취한 듯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내 손을 가만히 주무르고 있는 커다란 손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느릿하게 들어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율이 형.”
“응, 왔어.”
창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연한 금발이 반짝였다. 어쩐지 현실감이 없었다. 이것도 금방 깨어질 꿈일까 봐 간절하게 그의 말간 웃음을 아로새기며 눈을 깜빡였다.
“문은 내가 따고 들어온 게 아니라 원래 안 잠겨 있더라.”
“…아.”
키득대는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이 맑아졌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편지 봤구나. 그래서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내게 와 준 건가. 약간의 부끄러움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형이 그렇게 보고 싶었어?”
“내가 애도 아니고….”
며칠 못 봤다고 그럴 리가 있겠어요, 하는 능청스러운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눈물샘이 고장이라도 난 게 틀림없었다. 눈가가 시큰거리고 눈을 깜빡일 때마다 시야가 맑아졌다가 다시 흐릿해지기를 반복했다. 뺨이 젖어 가는 게 느껴졌다. 당황해서 다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지금 이러려던 게 아닌데. 이러면 괜찮다고 말할 수가 없잖아.
어쩌면 나는 생각보다 더 많이 박율을 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흐윽, 하고 새어 나오려는 흐느낌을 막으려고 입술을 짓씹었다. 박율이 어떻게 알았는지 곧바로 손을 뻗어 내 입술을 부드럽게 쓸었다. 힘이 탁 풀렸다. 다시 그를 올려다봤다. 내가 먼저 말하기를 가만히 기다리는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나서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안 괜찮았고, 이제야 괜찮아졌구나.’
며칠 간의 불안과 긴장이 이제야 풀린 거였다. 지금 눈물이 나는 건 서럽거나 화나서가 아니라 안심해서였다. 그걸 알고 나자 신기하게도 가빴던 호흡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멈추지 않은 눈물은 흐르는 대로 내버려 뒀다.
“꿈을 꿨어요. …그래서 형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요.”
박율이 차가운 물이 적셔진 손수건으로 내 눈가를 차분하게 눌렀다. 그 손길에 가만히 눈을 감았다.
“형 말이 맞아요. 보고 싶었어요.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형이 옆에 없는 밤이 무서웠어요.”
“…그랬구나.”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내 눈물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자 박율은 나를 번쩍 들더니 자기 무릎 위에 앉혔다. 박율의 단단한 가슴팍이 느껴졌다. 뭐, 아니, 잠깐. 내가 지금 갑자기 박율에게 안기게 된 건가?
놀라서 파드득 떨며 일어나려고 하는 나를 박율이 가두듯이 감싸 안았다. 한쪽 팔을 내 허리에 둘러 지탱하는 행동이 자연스러웠다.
순식간에 눈물이 쏙 들어갔지만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울 것 같았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그에게까지 전해질 것 같아서 괜히 옷만 만지작거렸다.
박율은 내 앞으로 다른 한 손을 뻗어서 허공에 유리처럼 투명하고 조그만 보석 두 개를 소환했다.
“네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형이 어떤 걸 해 줄 수 있을까 생각해 봤어. 선물이야. 하나를 골라서 손에 들어 볼래?”
“이게 뭔데요?”
그는 내가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보석을 바라보며 내 손목을 단단히 쥔 채 마법을 외웠다. 보석 주위로 빛무리가 반짝이더니 둥실 떠올라서 내 손가락에 반지 형태로 얽혔다. 실처럼 가느다란 빛이 여러 겹 둘러 있는 모양새였다.
“상대의 마나 흐름에 반응하는 반지야. 반지가 색을 잃기 전까지는 마나 반응이 있다는 얘기고, 그건 상대가 멀쩡하게 있다는 뜻이지.”
박율은 내가 무엇 때문에 불안해하는지 알고 있었다. 나는 그를 잃을까 봐 두려운 거였으니까, 그래서 그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는 반지를 주는 거겠지. 이걸 선물로 주는 걸 보면 어떻게든 끝까지 살아 줄 생각인 걸까, 하는 희망이 싹텄다.
“그런데 무슨 색이요? 지금 이 보석은 그냥 투명하지 않나요?”
“아직 마법이 끝난 게 아니거든.”
그는 내 손을 들어서 고개를 숙여 반지에 입을 맞췄다. 따뜻하고 말랑한 느낌. 그의 입술이 내게 닿는 느낌이 선명해서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 박율은 그 상태에서 고개를 살짝 기울여 나와 시선을 맞췄다.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나의 모든 것을 너에게 보일게.]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폐가 터질 것 같아서 그제야 숨을 급하게 들이켰음에도 산소가 모자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가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음에도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러자 박율이 더 환하게 웃었다.
반지가 그의 눈동자 색처럼 연둣빛으로 물들었다. 지금까지 많은 마법을 봐 왔지만 지금이 가장 마법 같은 순간처럼 느껴졌다.
“이제 끝났나요?”
“아직. 이제 이한이가 형한테 할 차례야.”
나도 해야 한다고? 싫은 건 아니었지만, 아니, 오히려 좋았지만…. 심장이 남아나지를 않을 것 같았다. 박율이 이번에는 허공에 떠 있는 다른 보석을 바라보며 마법을 외웠다. 보석에 똑같이 빛무리가 퍼지더니 이번에는 초커 형태로 박율의 목에 채워졌다.
“형은… 반지가 아니네요?”
“이한이가 보는 쪽이고, 형이 보여 주는 쪽이니까.”
모호한 말이었지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보는 쪽과 보여 주는 쪽에 차이를 둔다는 말인 것 같았다. 이런 마법 식은 누가 무슨 이유로 만들어 낸 건지 문득 궁금해졌다. 이 상황에서 중요한 건 아니었지만.
“나도 입을 맞춰야 하나요?”
“맞아. 혹시 싫어? 불편하면 억지로 하지 않아도 괜찮아.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
“아니, 좋아요. 좋은데, 부끄러워서….”
박율이 생각을 돌릴까 봐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가 나지막하게 웃더니 내게로 목을 보이며 몸을 살짝 숙였다.
“우리 더한 것도 했었는데.”
“…!”
사실이었지만 그걸 굳이 지금 짚어 줄 필요는 없었다. 그에게 할 말을 찾는 대신에 그의 목을 끌어안고 초커 위로 입을 맞췄다. 순간 박율의 호흡이 잠깐 흐트러지는 게 느껴졌다. 봄의 정원 같은 꽃향기가 얼핏 났다.
다시 마주한 그는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이었지만 뺨이 미미하게 붉어져 있는 것 같았다. 나만 박율을 의식하는 게 아니라 박율도 나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 생각에 괜스레 심장이 더 빨리 뛰었다.
박율이 내 한 손을 비집고 들어와 깍지를 꼈다. 그의 손이 커서 조금 벅차긴 했지만 성공적이었다. 그는 그 상태로 나와 시선을 맞췄다.
[언제까지나 나를 지켜봐 주세요.]
잔잔한 목소리와는 달리 일렁이는 그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쳤다. 그는 내게 온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초커에 걸린 보석에서 내 반지와 똑같은 연둣빛이 돌았다. 박율은 그제야 깍지를 꼈던 손을 풀어냈다.
“됐다. 이제 다 끝났어, 이한아. 이 보석은 마법의 당사자인 우리 둘한테만 보이는 거야.”
“신기하다…. 고마워요. 마법 효과는 언제까지 지속되는 거예요?”
“원래는 상대의 몸에서 보석을 직접 떨어뜨려서 마법을 깨기 전까지 지속돼. 그런데 방금 한 건 완전하지 않은 마법이거든. 그래서 언제까지 갈지 모르겠다.”
“내게 마나가 없어서 완전하지 않은 건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래서 마지막에 형이 이한이랑 깍지를 낀 채로 말한 거야. 원래는 반지를 낀 쪽에서 ‘언제까지나 당신을 지켜볼게요.’ 하고 마나를 흘려보내면서 말하는 거거든.”
내가 마법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나 원망스러웠던 적이 있던가. 근래 마나 때문에 아쉬운 일이 많은 것 같았다. 박율은 아쉬워하는 나를 달래듯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임시로나마 잘 엮어 뒀으니까 걱정하지 마. 몇 달은 충분히 지속될 거야.”
“……. 그렇겠네요.”
몸이 굳었다. 몇 달. 박율은 왜 몇 달이라고 콕 짚어 말한 걸까.
정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용사 임기가 끝나기까지 이제 몇 달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꿈속에서 체념한 듯 무릎을 꿇은 채 눈을 감고 있던 그의 모습을 문득 떠올렸다가 재빨리 지워 냈다. 손에 끼워진 반지의 연두색 보석을 손끝으로 조심히 만져 봤다.
“이거라면 안심할 수 있겠지?”
‘아니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나는 형한테서 어떻게든 살아가겠다는 말을 듣고 싶어요. 순응하지 않겠다고, 목숨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내 앞에서 제대로 말하는 걸 듣고 싶어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삼켰다. 가슴이 아팠다. 박율이 자기의 마지막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내가 아직 그의 퀘스트를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그래도 박율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안다. 그에게 있어서 운명은 거스를 수 없는, 절대적인 무언가일 테니까. 그러니까 나는 그에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내가 검으로 박율을 찌르지 않더라도 결과는 같을 것이다. 내가 하지 않는다면 그는 스스로 자기를 찌를 테니까.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으니까 그가 희생해야만 하는 거였다. 물론 나는 어떻게든 그를 살릴 거지만.
지금은 울지 않았다. 눈물 흘릴 필요가 없었다. 박율은 계속 살아 나갈 거니까.
나는 박율을 치료하고 나서 다른 용사들의 방에 찾아가 그들도 치료했다.
-앞으로 마물을 처리할 때 며칠씩 떠나 있을 일은 많이 없을 거예요. 밤바다가 꽤 위협적이기도 하고 텔레포트를 써서 낮에만 다녀올 거거든요. 그래도 균열이 거의 닫힐 때쯤에는 며칠씩 가 있어야 할 텐데, 그때는 꼭 미리 말할게요.
라엔의 말대로 다들 그날 이후로 해가 떠 있는 시간에만 바다로 나가 마물을 상대했다. 돌아오고 나서 치료하기를 썼을 때 게이지가 차는 양을 봐서는 꽤 많은 부상을 입는 것 같았다.
걱정이 들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나도 데려가 달라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나를 텔레포트 시키는 데 들어가는 마나까지 감당하는 건 더 큰 부담이 될 테니까.
‘오늘은 고대 문자 책의 여덟 번째 장을 살펴볼까.’
낮 동안 나는 서점에서 사 온 책을 읽어 나갔다. 내가 몰랐을 뿐이지 이 대륙에 고대 문자의 종류가 지역별로 꽤 많았다. 그중 신전 책에 적혀 있던 암호 문자와 비슷해 보이는 문자를 몇 개 추려 우선순위를 정해 놓았다.
‘이번에는 수확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무런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여러 고대 문자 체계를 고려해 봤을 때 그 암호문은 고대 문자가 맞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그 문장 중 몇 단어가 숫자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까지 알아냈다. 이제 어떤 지역의 고대 문자인지만 찾아내면 됐다.
똑똑.
누군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용사들이 올 시간이 아닐 텐데. 윤진이나 윤재영인가. 갑작스러운 노크에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들어오라고 말했다.
“어, 하견 형? 일찍 왔네요.”
송하견은 문밖에서 가만히 나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순간 드는 생각에 몸을 벌떡 일으켜서 그에게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많이 다쳤어요? 괜찮아요?”
“아니. 할 말이 있어서. 지금 나갈 수 있어?”
내가 그의 손을 채 잡기도 전에 그가 내 손목을 쥐었다. 그 상태로 치료하기를 쓰니 다행히 게이지가 차는 양이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송하견은 치료가 끝났는데도 손목을 놓지 않은 채로 나를 이끌며 여관 밖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