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편지
울컥 쏟아져 나오는 피를 뱉으며 고개를 들었지만 눈앞에 상태 창은 없었다. 파란빛은 내가 목에 걸고 잠들었던 열쇠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열쇠는 처음 봤을 때보다 더 밝은 빛을 내고 있었다.
‘방금 그 꿈은 뭐지?’
미래시라면 상태 창이 떠 있어야 했다. 상태 창이 없으니 미래시 스킬이 사용된 게 아닌 건가? 열쇠의 빛이 밝아진 걸 보면 이 열쇠가 뭔가 작용을 한 건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그 꿈이 의미가 있다는 건 분명했다. 지금 각혈하는 건 분명 그 꿈을 본 대가, 즉 페널티 같은 거였다. 꿈에서 깨자마자 각혈하는 상황은 페널티로밖에 설명이 안 됐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각인시키려는 건가?’
숨이 턱턱 막혀 왔다. 목이 졸리는 듯한 착각이 들어서 열쇠를 목에서 빼내 탁자 위 저만치에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졌다. 내 손에 묻어 있던 피가 옮겨 묻었을 테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눈앞에서 치우고 싶었다.
열쇠는 여전히 푸른빛을 내며 어둠 속에서 제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그게 기분이 나빠서 하, 하고 헛웃음이 나왔다.
“흐으, 욱….”
아직도 각혈하는 양이 꽤 됐다. 지금 호흡이 흐트러지면 피가 기도로 넘어갈 수도 있었다. 사레 들지 않으려면 울면 안 된다는 뜻이다. 알고 있는데도 가슴이 조여드는 것처럼 괴로워서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이건 신체적인 고통이 아니었다. 정신적인 고통이었다.
이불을 그러쥐어 손안에 푹신한 감촉만 가득한데도 꿈에서 봤던 것처럼 검 손잡이를 쥐고 있는 듯 자꾸만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다. 박율이 담담하게 꿇어앉은 모습이 선연했다.
내가 토하고 있는 피 냄새가 너무 선명했다. 그래서인지 푹, 소리가 난 이후 자리에서 고꾸라지던 박율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콜록, 컥. 윽… 하아….”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울음을 억지로 참으려고 하니까 숨쉬기가 더 힘들어지는 것 같아서 그냥 다 흘려보냈다. 아무도 없으니까 그래도 됐다. 밤이라 소리는 좀 죽여야겠지만.
그러다가 문득 박율이 내게 말했던 게 떠올랐다. 차라리 울어 줬으면 좋겠다고, 그러니까 참지 말라고. 그때의 다정한 목소리가 떠올라서 가슴이 먹먹했다. 눈물은 흘려보낼 줄 알아도 이런 감정은 어떻게 흘려보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더 서럽게 눈물만 쏟아 냈다. 이러다 몸 안에 있는 수분이 다 빠져나가는 건 아닌가 싶을 때쯤 각혈이 서서히 멎었다. 눈물도 멎었다. 넘실거리는 감정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은 채였지만.
‘클린 마법, 써야지.’
코를 훌쩍이며 품을 뒤졌다. 종이를 찢어서 클린 마법을 사용하고 나자 피범벅이 되어 축축했던 이불과 옷이 말끔해졌다.
환기를 시키기 위해 창을 열자 찬 밤공기가 방 안으로 순식간에 들어왔다. 정신이 조금 들었다. 밖을 내다보며 창틀을 가만히 쓸어 보다가 몸을 돌려서 곧장 방 밖으로 나갔다.
‘보고 싶어.’
그 생각뿐이었다. 멀쩡하게 있는 박율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꿈에서 본 끔찍한 장면을 희석해서 희미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의 목소리와 온기가 필요했다.
발걸음이 멈춘 곳은 박율의 방문 앞이었다. 멍하니 서서 닫힌 문을 멀거니 바라봤다. 여기에 그가 없을 거라는 건 안다. 알면서도 멍청하게 여기로 온 것이다. 똑똑, 하고 의미 없는 노크를 해 봤다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달칵. 잠금장치 없이 문이 돌아갔다.
화들짝 놀라서 손을 떼어 냈다. 그럼에도 열리기 시작한 문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부드럽게 밀려 났다.
허락도 없이 주인 없는 방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이성의 외침은 묵살됐다. 나는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쩌면 그의 흔적이나 온기 한 조각이라도 찾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율이 형.”
내 목소리가 텅 빈 방 안에서 조용히 울렸다. 내 방과 구조가 완전히 같은 방은 박율이 얼마간 묵었음에도 생활감이 전혀 없었다. 가지런히 개어 있는 이불을 빤히 바라보다가 책상으로 눈을 돌렸다. 그의 방 안에서 유일하게 사적인 물건이 있는 곳이었다.
여러 권의 두꺼운 책, 둘둘 말린 양피지, 반듯하게 쌓여 있는 흰 종이. 그리고 검정 잉크가 담긴 작은 유리병과 펜촉이 날카로운 펜. 그 앞에서 고심하다가 흰 종이 한 장을 꺼내 들고 의자에 앉았다. 이 정도는 사용해도 될 듯싶었다. 잉크에 펜을 담갔다.
「율이 형, 쪽지 봤어요. 형은 항상 그랬듯 아무 일 없이 돌아오겠죠. 알아요. 그러기를 바라고 있기도 하고요.」
편지를 쓰는 목적도 어떤 말을 쓸지도 정하지 않은 채였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곧바로 본심이 튀어나왔다.
「그래도 형이 없으면 불안한 것 같아요. 보고 싶어요.」
아차 싶어서 문장 위로 선을 여러 번 그어서 지웠다. 보고 싶은 건 맞았지만 그걸 여기에 적고 싶은 건 아니었다. 게다가 박율을 못 본 지 하루밖에 안 되지 않았던가.
뒤늦게 종이를 아예 바꾸는 게 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허락도 받지 않았는데 그의 물건을 함부로 낭비하는 건 조금 그랬다. 꼼꼼히 지웠으니까 괜찮을 듯싶었다.
내가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를 적고, 말미에 ‘항상 데려가 달라는 무리한 부탁은 하지 않을 테니까 웬만하면 데려가 주세요.’ 하고 본심을 덧붙여 편지를 마무리했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이 한 문장에 다 들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전하지 못할 것 같아서 편지로 남겨요. 마음대로 방에 들어와서 미안해요. 나는 형처럼 마법으로 편지를 전할 수가 없는걸요. 문은 내가 따고 들어온 게 아니라 원래 안 잠겨 있었어요. 앞으로는 안 그럴 테니까 이번 한 번만 봐줄래요?」
추신까지 완벽하게 적은 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방으로 돌아오니 공기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창을 닫고 탁자에 저만치 던져 뒀던 열쇠를 가져와서 묻어 있던 피를 닦아 냈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을 현재에 안주하지 않도록 만든다. 이제는 움직여야 할 때임이 분명했다.
그런 꿈을 꾸고 난 뒤여서 그다지 잠을 자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다. 날이 밝도록 신전에서 가져왔던 조그만 책을 읽었다. 내용적인 면에서 특별할 건 없었지만 책의 중간 즈음에 해독할 수 없는 문자가 적힌 페이지가 하나 끼어 있었다.
‘이걸 누군가에게 섣불리 물어볼 수는 없어.’
이상한 내용이 적혀 있는 거라면 곤란했다. 신전에서 살 때 서고를 들락거리며 꽤 많은 책을 읽었지만 제목도 없는 이 책을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니 이 책 역시 뭔가 힌트를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자 인상이 찌푸려졌다.
‘내게 매여 있는 운명 같은 건 없다고 하더니.’
열쇠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생각해 보면 이전에도 시스템이 보상을 사용하는 타이밍이 모두 절묘했다. 여러 갈래 갈림길을 지나더라도 도착지는 정해져 있으니 나 하고픈 대로 하라고 했던가. 한숨을 푹 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멈춰 설 수는 없으니까.
1층으로 비척비척 내려갔다. 윤진은 아침부터 식당에서 부지런히 뭔가를 하고 있었다. 고소한 빵 냄새가 났다.
“오늘은 일찍 일어났네? …으응? 이리 가까이 와 봐.”
그녀는 졸음기 하나 없는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그 시선이 어색해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피곤해?”
“조금요. 잠이 잘 안 와서요.”
“설마 아예 못 잔 거야? 자리가 불편했어?”
“아니요, 전에도 말했지만 편하고 좋아요. 원래 가끔 잠이 안 올 때가 있어서 그래요. 괜찮아요. 잠깐 밖에 좀 다녀올게요.”
“기다려, 아침은 먹고 가. 빵 다 구워지려면 얼마 안 남았어.”
윤진은 나를 기어이 끌어다 자리에 앉히고는 갓 구운 빵을 앞에 놓았다.
“어디로 가려고? 나도 곧 나갈 건데 근처면 같이 가자.”
“서점에 가 보려고 했어요.”
책에 적혀 있는 문자를 해독하기 위해서 고대 문자와 관련된 책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암호로 쓸 만한 거라면 자체적으로 만든 문자이거나 고대 문자 중 하나일 터였다. 전자라면 파악하기가 쉽지 않을 테니 후자이기를 바라며 정보를 얻어 볼 예정이었다.
“큰길가에 있는 서점 말하는 거 맞지? 나는 그 옆쪽에 있는 꽃집에 갈 거야. 잘됐다.”
“그렇네요.”
내가 빵 한 조각을 다 먹어 갈 때쯤 나를 흘끗대는 윤진의 시선이 느껴졌다.
“빵 맛있었어요. 고마워요.”
“으응, 맛있다니 다행이네. …다 먹은 거야?”
“네. 누나도 다 먹었으면 나갈까요?”
“음, 한 조각만 더 안 먹을래?”
윤진은 제안이 아닌 부탁이라도 하는 것 같은 얼굴로 접시를 내 앞으로 슬쩍 밀었다. 문득 용사들과 함께 밥을 먹었을 때가 오버랩됐다. 윤진에게 나는 단순한 투숙객에 지나지 않을 텐데 왜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지? 지금은 투숙객이 없어서 적적한가.
그녀는 쾌활한 편이었으니 말 상대가 필요한 걸지도 몰랐다. 가만히 생각하다가 빵을 집으려고 하자 윤진이 접시를 휙 들어 올렸다.
“잠깐! 강요하는 건 아니야. 사실 부탁받았거든!”
“네?”
“박율 씨가 자기가 혹시라도 자리를 비우게 되면 너 식사 잘하는지 봐 달라고 해서. 대실 비용을 많이 받았으니까 웬만한 부탁은 들어드리려고 했고…. 그리고! 지금 보니까 네가 진짜 안 먹는다 싶어서. 그런 부탁을 할 만하더라.”
박율의 이름을 듣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정리되지 않은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윤진은 다시 접시를 탁자 위로 내려놓았다.
“억지로는 먹지 마. 원래 몸이 좀 안 좋은 편이야? 건강 주스, 뭐 그런 거라도 사다 줄까?”
어색하게 거절하는 나를 보며 윤진이 장난스럽게 ‘너 아주 귀엽구나?’ 말하고는 그럼 이제 가자며 몸을 일으켰다. 이럴 때 보면 윤재영이랑 아주 판박이였다.
서점에서 고대 문자와 관련된 책을 간신히 찾아 구매했을 무렵에는 이미 해가 진 후였다. 여관방에 돌아와서 자리에 눕기 전에 목에 걸고 있던 열쇠를 탁자 저편으로 떨어뜨려 놓았다. 열쇠를 소지하고 있어서 그 꿈을 꾼 것일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금방 잠이 들었는데….
“커헉, …흑.”
어제와 같은 상황이었다. 숨을 고르며 쏟아져 나오는 피를 뱉었다. 꿈은 심지어 어제보다도 더 선명했다. 게다가 분명 탁자 위에 뒀던 열쇠 목걸이는 내 손목에 끈이 칭칭 감긴 채였다.
각혈이 멈춘 후 방을 정리하고 나서 손목에 묶인 끈을 풀어냈다. 내가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건 둘째치고 그런 꿈을 꾸고 싶지 않았다. 아예 열쇠에 묶인 끈을 잘라 버리려고 칼을 댔지만 푸른빛이 파직 튀더니 고작 끈 주제에 잘리지도 않았다.
“…피곤하다.”
침대에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열쇠의 끈을 자르는 건 포기하고 멀리 던져둔 채였다. 내가 지금 잠든다면 깨어났을 때 다시 내 손목에 묶여 있을지도 몰랐다. 박율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방 안을 다 환기했음에도 여전히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자고 싶지 않았다.
‘내일쯤에는 다들 돌아오겠지.’
그러면 그 꿈을 꿔도 이렇게 불안하고 힘들지는 않을 것 같다. 살아 있는 박율의 모습을 곧바로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면 딱 내일까지만 졸린 걸 참아 보자.
잠들지 말아야지, 하고 이를 악물었지만 창밖으로 동이 터 올 때쯤에는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자면 안 되는데. 얼핏 노크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의식이 점점 침잠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내 손목에는 열쇠 목걸이의 끈이 감겨 있는 게 아니라 선명한 온기를 가진 누군가의 손이 닿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