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33화 (133/150)

133화.

열쇠

점심 즈음 잠에서 깨어 보니 탁자에 편지가 있었다. 박율이 쓴 거였다. 잉크가 번진 부분조차 없는 반듯하고 정갈한 필체를 읽어 내려갔다.

「이한아, 지금 우리는 균열 근처로 와 있어. 이 편지는 네 방의 탁자 위로 이동시킬 건데, 아마 오차 없이 도착할 거야. 균열 상태만 잠깐 확인하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온 김에 주변에 영향이 없도록 마법을 둘러 두면 좋을 것 같아서. 하루 이틀 정도 더 걸릴 것 같네.

예정에 없던 일이어서 미리 말하지 못했어. 미안해. 그동안 주변 구경하거나 푹 쉬고 있어. 필요한 게 있으면 윤진 씨나 윤재영 씨에게 말하면 웬만해선 들어줄 거야. 식사도 못 챙겨 주고 나왔네. 일어나면 꼭 밥부터 먹고.」

편지 옆에는 상점가 지도와 동전이 담긴 주머니도 놓여 있었다.

‘내가 마법을 못 쓰니까 이럴 때 불편하네.’

나를 데려가지 않았다는 게 서운하지는 않았다. 그게 합리적인 판단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기분이 가라앉는 건 내가 조금 더 도움이 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마법을 쓸 수 있었더라면 텔레포트로 바로 이동했을 텐데.

‘지금 당장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를 명확하게 알았다. 다들 돌아오고 나면 열심히 치료해야지. 지금으로선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방을 나서서 1층으로 내려가니 윤진이 나를 반갑게 맞았다.

“일어났어요? 지금 점심 먹으려던 참인데 같이 먹을래요?”

“네, 고마워요.”

윤진은 내 앞에 수프와 빵이 담긴 그릇을 뒀다.

“입에 맞았으면 좋겠네요. 싱겁거나 짜면 말해요.”

“딱 좋아요. 맛있어요.”

물론 고소하고 맛있었지만, 박율이 만들어 주곤 했던 수프가 훨씬 맛있었다. 어쩌면 박율이 만든 음식에 입맛이 길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요리를 잘하는 것도 한몫했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윤진에게 실례인 줄 알기에 티 내지 않고 한 그릇을 몽땅 비웠다. 잘 먹는다며 한 그릇을 더 담아 주려는 윤진을 애써 말렸다. 배부른 건 배부른 거였다.

음식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나보다 윤진의 나이가 더 많다는 걸 알게 됐다. 그녀는 내게 허락을 구하고는 말을 놓았다.

“너 눈이 보석 같아. 오빠가 뭐라고 안 했어?”

“그 말 그대로 하던데요. 내 눈동자 색이 뭔가 이상한가요?”

“으응? 아냐. 그런 게 아니라, 보고 있으면 조금 묘해서 그래. 물 위에 햇빛이 쏟아지는 것처럼 반짝이는 것 같기도 하고.”

신력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몰랐다. 신관이 아니면 신력의 형태를 눈으로 쉽게 볼 수는 없겠지만 특유의 분위기 같은 건 감지할 수 있을 테니까.

“오빠가 용케 가만히 뒀구나. 하긴, 옆에서 그렇게 경계를 하고 있으니까.”

“네? 뭐를요?”

“아, 별거 아냐. 아무튼 윤재영은 보석이라면 환장을 해서 비슷한 것만 봐도 제정신을 못 차릴 정도거든. 지난번에는….”

“어쭈, 이제 오빠라고 부르지도 않아. 윤진, 내 얘기 하냐?”

소리 없이 나타난 윤재영이 자연스럽게 옆의 의자에 앉았다.

“고작 몇 분 차이면서 따지기는. 그리고 지금 맞는 말만 했는데, 뭐.”

“흐음….”

윤재영이 검지로 책상 위를 똑똑 소리 나게 두들기다가 나를 휙 돌아봤다.

“다 먹었으면 같이 나갈래요? 상점가에서 보석 감정 일을 하고 있거든요. 구경시켜 줄게요.”

“정직원도 아니면서.”

“곧 될 거거든. 아직 일 배우는 단계인데 어쩌겠어. 그래서 이한, 갈 거죠? 이후로 일정 없잖아요. 이런 기회 흔치 않아요.”

그의 제안이 싫은 게 아님에도 굳이 덧붙이는 말이 이렇게나 밉살스럽게 들리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는 말을 덜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윤재영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윤재영은 상점가의 한편에 있는 불 꺼진 상점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서 불을 켜고 작업장에서 도구를 꺼내 책상 위에 늘어놓는 모습이 익숙해 보였다.

“방금 문이 잠겨 있던데, 오늘 문 닫는 날인 거 아닌가요?”

“이런 작은 도시에서 보석 감정 의뢰가 들어와 봤자 얼마나 되겠어요. 장이 설 때만 상시로 열어 두고 지금 같은 때에는 예약이 있을 때만 열어요.”

“아, 그러면 오늘도 예약이 있나요?”

“아니요. 오늘 손님은 당신뿐인데요.”

“네?”

“나한테 제대로 보여 주겠다고 했잖아요.”

그가 손에 들고 있던 돋보기를 내 눈가로 가져다 댔다.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서자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보기만 하는 것도 안 돼요?”

“보여 준다고 한 적 없어요. 그리고 내 눈동자에 뭘 볼 게 있다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어요.”

“당연히 예쁘니까 그렇죠. 이한은 거울도 안 봐요?”

“거울 봐도 그런 생각은 안 해 봤어요.”

“그러면 앞으로 그런 생각도 좀 해 봐요. 나였으면 수시로 거울 들여다볼 것 같은데.”

아니, 그건 좀 이상하지 않나? 윤재영이 지금 나를 보는 얼굴처럼 어딘가 홀린 듯한 표정으로 거울을 멍하니 들여다보는 모습을 상상했다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등 뒤로 벽이 닿았다. 그가 내 바로 앞에 서서 턱을 가볍게 쥐고 들어 올렸다.

“싫어요?”

“좀 부담스러워요.”

“그렇구나…. 너무 빨랐나? 그러면 어쩔 수 없네요. 지금은 여기까지만 할게요.”

윤재영은 개의치 않는다는 말투와 달리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느릿한 움직임으로 내게서 물러났다.

“사실 오늘은 저번에 그쪽에서 준 보석을 감정하러 나온 거예요. 마지막으로 확인할 게 남아서요. 그냥 보기에도 질이 좋은 것 같긴 했지만 자세히 보니까 장난 없던데요.”

그는 작업장 쪽으로 가서 휘파람을 불며 도구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뭔가 생각난 것처럼 ‘아.’ 하고 탄식하더니 내 바로 옆에 있는 선반 쪽으로 살짝 손짓했다. 작은 상자 하나가 둥실 떠오르더니 내 손안에 들어왔다.

“옆에서 내가 하는 거 구경해도 되고, 아니면 저기 소파에 앉아서 그 상자 안에 있는 거 보고 있어요. 맘에 드는 거 있으면 가져가도 돼요.”

상자를 열자 반짝반짝 빛나는 물건들이 마구잡이로 담겨 있었다. 그중에서 둥글게 깎인 연파랑 색의 투명한 보석을 들어 올려서 천장의 불빛에 비춰 봤다. 빛이 담겨서 보석 자체가 발광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그냥 보관해 둬도 돼요?”

“아, 그건 보석이 아니라 그냥 유리라서요. 유리병 조각이 파도에 깎여서 다듬어진 거예요. 상품으로서의 가치는 없지만 예쁘잖아요?”

“그렇네요.”

“그 상자 안에 있는 다른 것들도 다 상품으로 내놓을 만한 건 아니에요. 바닷가에서 주운 거거든요. 기념 삼아서 부담 없이 가져가요. 이왕이면 보답으로 눈동자 한 번만 제대로 들여다보게 허락해 주면 좋을 것 같네요.”

“네에…. 고려해 볼게요.”

고려해 볼 필요도 없었다. 구경이나 하자는 마음으로 상자를 뒤적였다. 동그랗게 깎인 유리 조각 말고도 작은 원석처럼 보이는 것들도 있었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물건들이 있었다. …어, 잠깐. 이건 뭐지.

“이 열쇠도 주운 거예요?”

“응? 무슨 열쇠요?”

윤재영이 보석을 감정하다 말고 이쪽을 돌아봤다. 눈을 가느다랗게 뜬 모습이 뭔가를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런 것도 있었나? 하도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나네요. 열쇠에 보석이 박혀 있는 걸 보니까 예전에 주워 왔던 것 같기도 하고요. 어쨌든 그 상자 안에 있었던 거라면 사용하지는 않는 거예요. 그게 마음에 들어요?”

“…네. 마음에 들어요. 안 쓰는 거라면 이거 하나만 가져가도 될까요?”

중앙에 조그만 보석이 박혀 있는 열쇠는 시스템의 푸른 빛으로 연하게 둘러싸여 있었다. 열쇠의 형태는 아주 예전에 밤이 내린 숲에서 저택을 열 때 사용했던 그 열쇠와 비슷했다.

“가져가요. 바닷가에서 주운 것일 테니까, 해변을 걷다 보면 그 열쇠와 꼭 맞는 자물쇠를 찾을지도 모르겠네요. 찾으면 나한테도 알려 줘요.”

“혹시 이 도시에 사용하지 않는 건물 같은 데는 없나요? 이 열쇠로 열 만한 건물이요.”

“그런 건 딱히 없어요. 열쇠가 버려져 있던 걸 보면 자물쇠도 버려져 있는 게 아닐까요?”

이 열쇠는 윤재영이 주운 게 아닐지도 모른다. 시스템이 열쇠가 내게 발견되도록 술수를 썼을 가능성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내가 이 열쇠로 뭔가를 알아내야 한다는 것만은 명확했다.

“열쇠는 잘 간직하고 있을게요.”

“아, 잠깐만 기다려 봐요.”

그는 열쇠를 품에 넣으려고 하는 나를 멈춰 세우고는 열쇠 끝부분에 끈을 걸었다.

“목걸이랑 팔찌 중에서 어느 게 좋아요?”

“목걸이요.”

“아하. 기억해 둘게요.”

허공에서 끈이 매듭지어지더니 내 목에 자연스럽게 걸렸다.

“고마워요. 근데 기억은 왜 해 둬요?”

“나중에 뇌물이라도 줄까 하고요. 당신 눈동자가 진심으로 마음에 들었거든요. 더 자세히 보고 싶은데.”

이 정도로 끈기 있게 일관된 요구를 하는 것도 신기했다. 열쇠를 받았으니 한 번쯤 허락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눈동자가 닳는 것도 아니니까.

“봐요. 뭐가 그렇게 궁금한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 정말요?”

아까는 돋보기를 들이대더니 이번에는 내가 부담스러워할 것을 고려했는지 아무것도 손에 들지 않고 나와 눈을 맞췄다. 생각보다 꽤 진지한 표정에 괜히 어색해서 나도 모르게 눈을 돌렸다.

“이쪽 봐 줘요.”

순수한 호기심이라는 게 이렇게나 무섭구나. 나는 손을 꼼지락대면서 오 분 정도를 그와 가만히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그 공기가 어색해서 호흡까지 어색해지는 것 같았다.

윤재영은 보석 감정을 마무리한 후에 상점가를 둘러보며 구경시켜 주고는 나를 다시 여관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그날 밤, 여러 군데를 돌아다녀서 피로한 몸을 침대에 누였다. 머리를 베개에 대자마자 의식이 순식간에 흐려지고 잠이 들었다.

지직, 하고 시스템이 오류 나는 것 같은 불쾌한 소리에 눈을 떴다.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지고 몸이 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것을 보니 꿈속이었다. 눈앞에 어떤 장면이 깜빡이며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눈이 뻑뻑해졌지만 마음대로 눈이 감기지도 않았다. 빠르게 깜빡이던 장면은 이제 어떤 장면인지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속도가 줄었다. 내 의지가 아니었기에 그 장면에서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박율은 양쪽 무릎을 땅바닥에 댄 채였다. 그 앞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건 나였다. 나는 검 손잡이를 쥐고, 검 끝을 그를 향해서 겨누고, 힘을 실어서 한 번에….

푸욱,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몸을 자리에서 튕기듯이 일으켜 앉으며 꿈에서 깨어났다. 숨이 가빴다.

“윽… 커헉.”

쏟아져 나오는 피가 이불을 적셨다. 눈앞에 시스템의 파란 빛이 어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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